*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흙으로 빚은 얼굴

광주 조선백자요지를 돌아보며



무늬 하나 없이 그저 희고 둥근 항아리의 매력은 무엇일까.  어디에 두어도 튀지 않고 주변과 조화롭게 어울린다. 밤하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달처럼 말이다. 달항아리. 어쩜 이름도 이렇게 잘 붙였을까. 백자대호, 혹은 백자 항아리에 달항아리라 이름을 붙인 이는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라고도 하고 그의 친구이자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었던 최순우라고도 한다. 1950년대에 그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두 사람이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퍼져나간 이름이 아닌가, 많은 이들이 추측한다.

최순우 선생은『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백자 달항아리 부분에서 ‘한국의 폭넓은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달항아리를 한국미의 표상으로 보는 것이다. 흰빛과 둥근 모양을 곧 우리 민족의 성정으로 본다. 달항아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용인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백자 달항아리(1991) ©문화재청


달항아리는 광주에서 왔다. 400년 이상 왕실용 도자기를 생산한 관요의 고장에서 구워낸 도자기가 달항아리만은 아니지만 한국 전통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달항아리를 전면에 내세운 전시관이 광주에 하나 있으면 좋겠다. 광주의 도자기 전시관은 크게 분원백자자료관과 경기도자박물관이 있다. 경기 도자사와 관요사를 다루고 있는 전시관으로 광주시의 도자사를 알아보는 데 도움을 주는 곳들이지만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기에는 조금 아쉽다. 이웃한 이천과 여주도 도자기박물관과 도자기축제를 성대하게 치르는 데다 ‘왕실 도자’라는 광주 도자사만의 특징이 크게 드러나지 않아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21년 분청사기·백자실을 재단장하면서 달항아리 단 한 점만을 위한 전시공간을 따로 만들었다. 달항아리 뒤 벽면에는 조선시대 회화를 재구성한 영상이 재생된다. 눈 내리는 달밤, 거문고를 멘 선비의 여정, 보름달 아래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우윳빛 달항아리 뒤로 스쳐 간다. 반가사유상 두 점을 전시한 사유의 방 못지않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시그니처 전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2005년 개관전으로 ‘백자 달항아리전’을 열어 박물관과 달항아리를 동시에 알렸다. 2011년에는 문화재청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일곱 개의 백자대호를 ‘백자 달항아리’로 이름을 바꿔 공식화했다. 영어로도 ‘Moon Jar’라고 쓴다. 이 정도 위상과 대중적 인기라면 달항아리를 생산한 광주에도 달항아리 특별관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조선시대 광주에서 만든 백자대호는 현재 20여 기정도 밖에 남지 않았고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들은 삼성 리움미술관, 국립고궁박물관, 용인대학교 박물관 등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국보·보물 지정 달항아리를 전시하지 못하더라도 달항아리만을 주제로 한 테마전은 충분히 꾸릴 수 있다고 본다.



관요가 있던 분원리에 자리한 분원백자자료원 전경 ©광주시


분원백자자료관에도 달항아리가 전시되어 있다. 유물로서 전시는 아니고 실내 장식으로 2층 세미나실로 향하는 계단 아래 빈 곳에 멀뚱하게 놓았다. 이곳도 전시관은 아담하다. 폐교된 분원초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 했는데 외관을 붉은 철판으로 둘렀다. 수장고 같은 모습을 표현했다는데 이곳은 철기박물관이 아니라 백자박물관이기에 어쩐지 아쉬운 디자인이다. 전시는 1층이 전부로 조선 도자기의 변천사와 사옹원 분원이 광주에 자리 잡게 된 과정과 전개, 분원의 운영과 광주 관요 출토자료, 분원의 백자 유물 등을 소개하고 있다. 강화 유리 바닥 아래에는 도편들이 가득하다. 깨서 버린 도편들의 무덤, 도총을 표현한 것이다. 도총은 ‘장인정신’의 상징이다.


광주에 도자 장인들은 어떻게 모이게 되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왕실용 자기를 생산하는 기관, 사옹원司饔院이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사옹원 소속의 사기장 380명이 등재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청자의 전통이 계승, 변화되면서 분청사기가 주로 만들어졌다. 15세기 전반까지 조선왕실은 분청사기를 쓰다가 세종 때 명나라에서 청화백자가 유입되고 새로운 도자 기술이 전해지면서 백자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늘어나는 백자 수요에 맞춰, 1467년 사옹원은 광주에 분원分院을 설치했다. 이때 조선백자, 광주도자사의 서막이 열렸다. 광주는 한강을 통해 왕궁으로의 백자 조달이 편리하고 수림이 무성해 땔감도 풍부했다. 더욱이 분원 설치 이전에도 이미 질 좋은 백자를 공납하던 곳으로 유명했다.



분원백자자료원 내부 ©광주시


분원백자자료관이 있는 분원리도, 이곳에 닿기까지 거쳐온 퇴촌면, 남종면 일대 길목이 모두 국가가 운영하는 관요官窯가 있던 자리다. 장인들은 분원에 거주하면서 대를 이어 자기를 생산했는데, 주변 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썼기 때문에 나무를 다 베어다 쓰면 다른 숲으로 분원을 옮겼다. 그래서 광주 전역의 가마터가 350여 기나 남은 것이다. 분원리는 조선의 마지막 관요였다. 분원의 잦은 이동이 문제가 되면서 분원리에 자리를 잡은 후부터는 다른 지역에서 땔감을 구해왔다. ‘분원리 시대’는 1910년, 대한제국이 막을 내릴 때 끝난다. 마지막 분원을 두었던 동네는 이름도 분원리分院里가 되었다. 1974년에는 팔당호가 생겨 분원리 일대가 수몰되었고 그 바람에 일부 분원의 흔적도 사라졌다. 수몰될 위기에 있던 우천리의 선정비들은 분원백자자료관 앞뜰에 모아 놓았다. 영조 때부터 고종 때에 이르는 분원의 제조(잡무 및 기술계통 관직) 및 번조관(사옹원에 속해 땔감을 관리하던 책임자)의 선정비들이다.


달항아리 생산은 분원을 1752년에 분원리로 옮기기 전, 금사리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달항아리를 정의하면 18세기초 금사리 가마에서 제작된 높이 45cm의 백자대호다. 금사리 백자라고도 칭한다. 1726년부터 1752년까지, 분원이 분원리에 정착하기 직전 30년간 이곳 금사리에서 오늘날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달항아리와 코발트 안료로 들풀 문양을 넣은 추초 무늬 청화백자, 노르스름한 빛깔을 띠는 백자 등이 만들어졌다. 분원리에 정착한 분원이 130년 동안 운영한 세월을 생각하면 금사리에서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수한 명품 백자를 생산한 셈이다.



분원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백자와 백자편이 출토되었다


500년간 백자를 굽는 장인들의 기술은 점점 발전해 갔다. 백자는 흙이 깨끗해야 해서 흙에서 철분을 제거하는 기술, 철이 없는 유약을 만드는 기술 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백자는 청자보다 발전된 형태의 도자기이다. 더구나 관요는 왕실에 납품하는 도자기를 만들었기에 이곳의 장인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기법과 채색 등 모든 면의 기량이 늘어갔다.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사옹원의 체계가 잡힌 18세기의 조선백자는 세련된 기형, 아름다운 채색으로 예술성의 정점에 달한다. 특히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넣은 청화백자는 15세기부터 꾸준히 제작해 조선왕실 도자기의 상징으로 굳혀졌다. 광주 분원에서 생산한 청화백자는 청화매죽문 항아리, 청화죽문 각병 등 국보만 7점으로 총 19점의 조선백자 중 가장 많은 개수다. 도자기의 그림은 도화서 화원이 직접 분원을 방문해 그렸다고 한다. 청화백자는 아니지만 검은색 안료를 쓴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는 조선백자 회화의 걸작이라 일컬어진다. 높이 53.3cm의 철화포도문 항아리는 달항아리를 훌쩍 뛰어넘는 크기로 조선백자 중 가장 크다. 이 항아리 역시 18세기 전반 금사리 가마에서 빚어졌다.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백자 달항아리(2007-1) ©문화재청


그림이 없는 달항아리는 세 점의 국보가 있다. 회화가 없으니 청화백자, 철화백자들과 비교해 덜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민무늬의 크고 하얀 이 항아리에 열광한다. 최순우 선생의 말대로 도공들은 이 항아리를 만들 적에 그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빚진 않았을 것이다. 욕심 없이 무심하게 빚었을 것이나 백자를 빚는 데 숙련된 손과 머리가 사람의 몸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항아리를 탄생케 했을 것이다. 자꾸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달항아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나도 조금은 알 것 같다. 빛깔은 햇빛처럼 쨍하지 않고 은은한 달빛처럼 희다. 질감은 달빛처럼 차갑지 않고 햇볕처럼 따뜻하다. 그리고 그 형태는 탐스러운 얼굴 같다. 희고 고운 얼굴. 보이지 않는 표정은 보는 이마다 달리 느낄 것 같다. 내 표정이 무심하면 무심한 대로, 웃으면 웃는 대로 저마다의 나를 닮은 표정일 테다. 광주에서 흙으로 빚은 달, 아니 얼굴을 보고 간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너머의 도시들- 경기 중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광주시 : 희고 고운 얼굴>에서 발췌했습니다.

세부정보

  • 광주 분원백자자료관

    주소/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산수로 1642-1

    관람시간/ 10:00~18:00, 월 휴무

    누리집/ www.bunwon.or.kr

    관람료/ 무료

글쓴이
걷고쓰는사람
자기소개
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누리집
https://www.youtube.com/@yooseungh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