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실학의 형성과 전개, 천문과 지리 - 1. 실학의 형성

16세기 중엽 이후 서양 문물이 동양으로 진출하면서 한․중․일의 삼국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은 조총의 수입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통일하고, 명나라는 새로운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결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양란으로 국토가 황폐하게 되었고, 국가를 재건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이런 시대 과제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이었다. 조선의 부세는 전세, 공물 및 요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백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된 것은 공물이었다.


이 공물을 전결田結의 부담으로 돌려 단일품목인 쌀로 징수한 것이 대동법大同法이다. 그리고 정부는 인신人身을 대상으로 부과하던 군역도 전결의 부담으로 돌렸는데, 이것이 균역법均役法이다. 대동법과 균역법은 복잡한 과세 대상과 과세 물종을 전결을 대상으로 쌀로 통일함으로써 수취제도의 획기적 개혁이 되었다. 그 결과 백성들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넉넉해지고 이 때문에 정기시인 장시場市를 중심으로 상품경제가 발전하였다. 하지만 당시 학문 세계는 아직도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이기론理氣論이나 사장학詞章學이 아니면 형식적인 예학禮學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러한 학풍에 대한 반성으로 17세기 중반부터 학문의 목적은 인간 생활의 필요에 이바지하는데 있다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실학의 선구이다. 실학 형성의 역사적 배경은 조선 내부에서 추진된 각종 개혁의 전개와 서양으로부터 자연과학의 전래였다.


개혁의 전개는 토지제도 및 군신관계와 같은 제도의 개혁과 상공업의 진흥 및 기술개발을 촉진했고, 자연과학의 전래는 천문학과 지리학의 발전을 자극하여 여기서 실학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실학이라는 학풍의 대두로 이제 학문의 대상은 제도개혁론, 상업진흥론 및 기술개발론, 천문학, 지리학 등으로 서서히 옮아가게 되었다.


지봉유설 芝峯類說

이수광李睟光(1563~1628)이 중국을 통해 얻은 외국 문물에 대한 지식을 조선에 소개한 백과사전적 저서이다. 총 3,435조목을 25부문 182항목으로 나누어 각각의 기사에 출처를 밝히고 있다. 이 같은 체제와 내용은 후대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유희柳僖의 『물명고物名考』,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수광은 『천주실의』에서 본 세계지도를 ‘구라파국여지도歐羅巴國輿地圖’로 소개하고 있다.



서양문물은 16세기 중엽부터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예수회[Jesuit] 선교사의 일원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중국명 利瑪竇 1652~1610)가 1601년 북경에 정착하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중국에 수입된 서양문물은 연행사 등을 통하여 곧 조선으로 도입되었다. 중국에 수입된 서양문물에 관해서는 1641년에 저술된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류설芝峯類設』에 의하여 조선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조선중기 문신인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명나라에 세 차례나 사행使行 하였는데, 북경에서 동남아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동남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경에서 활동하던 서양선교사들의 종교문화활동을 보면서 서양문화를 이해하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1600년에 지은 「산해여지전도 山海輿地全圖」를 보고 유럽 여러 나라의 사정도 알게 되었다.


『지봉류설芝峯類設』에서는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였고, 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이탈리아 등을 포함한 세계 50여개국의 지리, 기후, 물산, 역사 등을 소개하였는데, 전통적인 경직된 화이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소개하였으며, 불교와 이슬람교에 대하여서도 호의적으로 소개하였다. 중국 이외의 세계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인 인식은 실학의 세계인식에 선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송하한유도 松下閒遊圖
1637년 김육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명나라 화가인 호병胡炳이 그렸다. 종이에 채색한 이 그림은 소나무 아래에 윤건과 학창의를 착용하고 서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몸은 약간 오른쪽으로 향해있어 움직이는 모습을 그렸다. 우측 상단에는 영조가 지은 어제찬御製贊이 있다.



연행사란 사대事大의 실현을 위한 일환으로 청의 수도인 연경燕京[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일컫는다. 연행사는 수백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연경에 도착하면 방물을 바치고 회사품을 받으며, 교역도 하였다. 사행기간은 수개월에 이르렀다. 사행은, 청의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청의 문물을 도입하고, 천주당을 찾아가 서양문물을 도입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조선문화의 발전, 특히 실학의 발생과 발전에 큰 자극이 되었다.


송하한유도는 조선시대 최대 개혁을 이끈 대동법 실시에 있어 중심적인 인물이었던 김육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명나라 화가인 호병胡炳이 그린 것이다.


김육은 네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1636년 명나라에 동지사로, 1643년 심양瀋陽에 원손보양관 元孫輔養官으로, 1645년에 사은부사 謝恩副使로 연경燕京에, 1650년에 진향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이를 통해 조청관계와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하게 되었다.


잠곡유고 潛谷遺稿

조선 효종 때 개혁 정책을 이끌었던 잠곡潛谷 김육金堉(1580~1658)의 문집이다. 그는 대동법의 시행을 주도하였고(1638), 화폐 유통을 추진하였으며, 수차水車와 수레 도입을 건의하였다. 또 1646년 서양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을 배워 시행할 것을 주장하여 1653년 조선에 시헌력을 도입하였다.



김육은 개혁적인 정치가로서 대동법과 시헌력에서 보는 바와 같은 개혁구상을 실행에 옮긴 실천가로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저작으로는『잠곡유고潛谷遺稿』를 포함하여 『잠곡별고潛谷別稿』, 『잠곡속고潜谷續稿』, 『유원총보類苑叢寶』 등이 있으며, 『잠곡유고潛谷遺稿』 중 '소차疏箚' 부분은 대동법의 시행과 화폐 유통에 대한 추진 등 경세가로서의 사상과 정책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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