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과천 렛츠런파크 주말 단상

노인과 경마




벚꽃이 만개한 봄의 렛츠런파크는 상춘객으로 붐빈다. 


토요일 오전 10시, 경마공원역은 인파로 북적였다. 경마를 직접 보려면 꼭 경기가 있는 주말에 경마장을 찾아야 하고 이왕이면 첫 경기부터 봐야 목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다는 경험자의 조언이 있었다. 그 조언대로 지하철역 상가에서 ‘경마 정보지’를 2천 원에 샀고 잰걸음으로 경마장으로 향했다.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소설과 그 소설을 각색해 만든 동명의 영화가 떠올랐는데 정작 작품에는 경마장이 전혀 나오지 않아서 제목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경마장 가는 길은 남자 노인들로 가득했다. 평소 노인이 무리 지어 있는 장소를 갈 일이 없고 그래봤자 놀이터 정자에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 떠는 할머니들만 접해온 나는 다수의 노인 무리 속에 섞여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걷는 내 자신이 어색했다.


경마장이라는 이름이 입에 잘 붙는데 이곳의 공식 명칭은 렛츠런파크 서울이다. 렛츠런파크 서울의 시초는 1928년,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던 경성경마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공식 경마는 1922년 조선경마구락부가 생겼을 때로 알려져 있다. 이후 경마장은 1954년에 현재 서울숲 자리로 이전했다가 1989년 현재의 자리에 ‘서울경마장’이란 명칭으로 새롭게 개장했다. 명칭은 1998년 서울경마공원으로 한 차례 바뀌었다가 2014년 시민레저공간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반영해 ‘렛츠런파크 서울’로 개명했다.


 과천시에 있는데도 렛츠런파크 과천이 아니고 렛츠런파크 서울이다. 이유는 서울대공원과 같다. 서울에 있던 주요 위락시설들이 옮겨간 것이긴 하지만 땅만 내어주고 이름은 가져오지 못한 과천시가 조금 안타깝다. 서울을 중심으로 제주, 부산·경남에 경마장을 둔 렛츠런파크는 한국마사회에서 관리한다. 우리나라에서 합법적으로 경마를 열고 베팅을 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렛츠런파크뿐이다. 한국마사회의 본사가 이곳 렛츠런파크 서울에 자리한다. 



1987년 렛츠런파크 진입로에 세워진 황금빛 경주마 동상 


렛츠런파크 서울에 입장하자 황금빛 경주마 동상과 함께 6층 높이의 길고 큰 건물이 보이는데 그 건물이 바로 경기장 관람대다. 내가 입장한 관중석 구역은 ‘놀라운지’라 불리는 2040 전용 관람석이었다. 안내대에서 신분증으로 나이를 확인한 후 놀라운지 입장권인 종이 팔찌를 채워줬다. 미성년자는 부모 동반 시 입장할 수 있고 50대부터는 입장할 수 없는 구역이라고 했다. 나는 아까 함께 입장했던 노인 물결을 떠올리며 그들은 지금 어디에 앉아 관전하는지, 이곳 2040 전용석이 50대 이상의 연령대에 대한 차별은 아닌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놀라운지에 들어서니 넓은 테이블석이 실내외에 쾌적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그 앞으로 말들이 뛰는 경기장과 초대형 스크린이 보였다. 관중석은 무대를 앞에 둔 공연장처럼 일자로 배치되어 있었다. 입장 직후 마주한 6층의 대형 건물 후면이 모두 관중석이다. 놀라운지의 테이블 좌석은 테이블이 4인 식탁처럼 넓어서 편했는데, 도시락을 싸 오거나 건물 내 식당과 편의점에서 사 온 음식을 늘어놓고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2040 전용석인 놀라운지 


부모님을 따라온 아이들의 색칠공부, 공작놀이 테이블이 되기도 했다. 건물 안팎으로 놀이동산처럼 다양한 음식을 파는 요식업체들이 경기가 열리는 주말에만 운영되고 있었다. 2040 전용석의 관람객들은 베팅하러 온 사람들이기보다는 야구장처럼 경기도 보고 음식도 즐기는 가족, 연인의 나들이 장소 같았다. 또 2040 실내 관람석 내 별도의 공간에서는 초보경마교실이 시간마다 열려 경마 규칙, 마권 사는 방법 등을 마사회 직원이 나와 설명했고 다른 한 편에는 도박중독예방센터가 운영되고 있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관람석 분위기는 재잘거리는 어린아이들과 김밥을 나누어 먹는 연인들로 한껏 경쾌했다. 나는 난생처음 눈으로 직접 기수와 말이 뛰는 모습을 보았다. 하루 10~11회 정도 열리는 경기는 1,000~1,400m 경주였는데 과장 없이 눈 두 번쯤 깜빡할 사이에 말들의 달리기가 끝났다.

이들의 평균 시속은 70km.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보다 느린데도 직접 관전한 경주마는 무섭도록 빨랐다. 먼 과거 이들이 인간의 발이 되어주고 전차가 되어준 까닭이 이해되었다. 그러다 동물원에 가지 않는 나와 경마장에 가는 나는 서로 모순적이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들어 스스로 민망해졌다. 경주마 정보지를 훑어보니 부상 없고 고질병 없는 말은 찾기 어려웠다.




결승점을 300m 정도 남긴 지점을 말들이 지나갈 때 관중의 동요는 극에 달했다. 그 지점은 관중석의 바로 정면이기도 하다. 환호, 비난, 탄식, 응원이 한데 어우러진 소음이 수 초간 짧고 강력하게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새내기 관중인 나는 결승점에 어떤 말이 선두로 들어왔는지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맨눈으로 구분이 어려울 만큼 동시에 들어온 말들은 정밀 카메라에 찍힌 영상으로 순위를 판가름했다. 결승선에 어떤 말의 코가 결승선에 먼저 닿았는지는 초대형 스크린을 통해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전자카드’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매 경기의 마권을 샀다. 나 역시 내려받은 앱으로 생애 첫 경마 베팅에 참여했다. 어떤 말에 승리를 점칠지, 단승, 연승, 복연승, 삼쌍승 등 어떤 승식으로 베팅할지, 얼마를 걸지는 순전히 내 판단과 결정이었다. 아까 샀던 경마 정보지를 펼쳐 각 경기에 출마하는 말과 기수의 전적, 프로필, 간단한 조교평을 살피고 경마전문가라는 이들의 쪽집게평(?)을 읽으며 베팅할 말들을 추렸다. 선택할 수 있는 승식이 많아서 좀 헷갈렸으나 몇 번 하다 보니 금방 익숙해졌다. 




 그래도 단 한 게임이지만 내가 돈을 건 말들이 순위권으로 들어올 때는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도파민이 분출되는 듯 짜릿했다. 돈을 따고 나니 2천 원을 걸었던 게임에 2만 원을 걸었다면 더 큰 돈을 벌었을 텐데, 아쉽기까지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인생 첫 경마를 재밌게 즐겼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2040 지정석을 벗어나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아침에 보았던 노인들이 있었다. 3층, 4층도 마찬가지였다. 경쾌한 분위기는 없었고 아침에 경마장을 향하던 노인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피크닉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터미널 대합실에서 단체로 경기를 관람하는, 서로 모르는 노인 무리 같았다. 그들은 경마 정보지를 보는 데 열중했고 나름의 분석을 적었으며 대부분 종이 구매권을 산 후 OMR카드(구매표)에 승식과 마번을 표기해 마권을 받았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는 이들도 있지만 구매표를 수십 장씩 옆에 쌓아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일련의 과정은 재미가 아니라 열과 성을 다하는 노동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웃는 사람이 없었다. 실내 금연이었지만 야외석에서 담배를 피우는 노인들이 있었고 전 담배 냄새는 어딜 가도 풍겼다. 경기가 진행 중일 때 그들 사이에선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기도 했다. 나는 렛츠런파크에 왜 2040 전용석이 생겼는지를 대번에 이해했다.



렛츠런파크에는 말박물관이 있어 상설전, 기획전이 열린다. 


건물 5,6층은 회원 전용 관람석이고 일부는 마주를 비롯한 VIP 전용실이라고 했다. 이 건물은 물리적 층위뿐만 아니라 나이별, 자산별 층위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두터운 층위는 어림잡아도 평균연령 70대 남성임이 분명했다. 평균 1분 10초 만에 끝나는 한 경기에 베팅 된 총액은 10억 원 이상을 호가했다. 20, 30억 원도 쉽게 모인다는데 돈을 딴 사람은 당연한 말이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흘러가고 저 많은 노인의 희망과 열정은 다 어디서 나오는 걸까.




경마장 가는 길,  ‘그래, 노인들의 테마파크도 하나쯤 있어야지’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노인 인구는 급증할 테고 길어진 수명에 노인들의 여가와 취미의 선택 폭도 넓어질 터. 무릎 관절이 시원찮을지언정 저 시원하게 달리는 경주마들을 보며 소소한 쾌감이라도 얻으면 좋겠다고 염원했지만 그것은 아직 덜 늙은 자의 소망일 뿐이었다. 경마장을 나서는 길, ‘한탕’에 실패한 노인들은 다시 담배를 물고 지하철역 안으로 빨려들 듯 들어갔다. 아무래도 30~40년 후 ‘늙은 나’는 과천에 와서 꼬마일 적, 청년일 적 추억을 곱씹고 화양연화를 그리워할 것 같다. 가만···. 그런데 나, 15년만 지나도 2040 지정석엔 입장하지 못한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너머의 도시들- 경기 중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과천시 : 대공원 화양연화>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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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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