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빈 골목, 채우는 노력 끝 기묘한 공생

동두천 문화관광특구 캠프 보산을 둘러보며


동두천 문화관광특구 캠프 보산(Camp Bosan). 보산역 1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이와 같은 문구가 큼지막하게 박힌 건물과 마주했다. 동두천 커뮤니티센터로 캠프 보산의 메인 플랫폼과 같은 곳이다. 캠프 보산이라, 동두천에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미군기지가 있던가.


캠프 보산은 동두천시가 보산동 일대를 관광특구로 지정해 개발하면서 미군기지처럼 새로 붙인 이름이다. 동두천에는 총 5개의 미군기지와 1개의 훈련장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다. 그중 동두천시 보산동에 자리한 기지가 캠프 케이시와 캠프 모빌이다. 경기 북부의 많은 미군기지들이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로 옮겨가면서 이들 기지의 부대도 상당수 철수했고 현재는 일부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완전 철수는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때 3만 명이 넘었던 동두천의 미군은 현재 4천여 명으로 줄었다. 동두천시는 대규모 미군기지가 있는 보산동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발전했다. 이 말의 뜻은 곧 미군기지가 축소되면 도심 발전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다. 한때 작은 시카고라 불릴 정도로 미군과 그의 가족들로 붐볐던 보산동 거리는 차츰 비어갔고 이라크 파병과 부대들의 평택 기지 이전 등이 진행되면서 2000년대에 이르러 폐점 가게들이 크게 늘었다. 2006년 연장 개통된 수도권 1호선의 동두천역, 보산역은 유동인구를 늘릴 수 있는 활로로 기대를 모았지만 외부에서 유입되는 인구보다 보산동에서 서울로 빠져나가는 인구만 더 늘었다.




이런 보산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동두천시와 경기문화재단, 기타 여러 예술단체들이 손을 모아 그래피티 거리, 디자인아트빌리지, 월드푸드스트리트 등의 테마 거리를 조성하고 두드림뮤직센터와 커뮤니티센터 등을 설립했다. 조성 직후에는 주말마다 사람들이 꽤 모여드는 듯했으나 부흥도 잠시였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리는 대체적으로 한산했다. 외국인이 많이 드나들어 이국적인 분위기인 거리는 이미 이태원이 굳건했고 그래피티 거리나 멕시칸 음식, 동남아 음식을 파는 거리 혹은 음식점은 보산동이 아니더라도 여느 도심에나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2020년 덮친 코로나19로 방문객은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보산역에서 관광특구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맞춤 양복점들과 문신 시술 가게, 미용실, 마사지숍 등 평택 신장동이나 이태원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미군부대 주변 번화가의 전형적인 풍경이 펼쳐졌지만 휴점이거나 폐점인 가게들이 반 이상이었다. 보산동의 메인 스테이지라 할 수 있는 크라운클럽을 중심으로 펍과 클럽들이 모여 있는 거리는 휑하다 못해 우범지대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윤금이 씨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장소 일대이기도 하다. 관광특구 사업의 일환으로 업소들 사이사이로는 예술가들의 공방과 공예품 및 기념품 판매점이 자리했는데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의 기묘한 공생처럼 보였다.




전철이 지나가는 고가선로 밑 그래피티 거리와 여러 개의 점포가 가판대 형태로 일렬로 늘어선 월드푸드스트리트는 그나마 탁 트인 광장에 있어 ‘건강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월드푸드스트리트 또한 내가 방문한 날은 절반 이상의 점포가 영업을 하지 않았다. 딱 한 테이블만 군복을 입은 미군 여성 두 사람이 버거를 먹고 있었다.




이 부근의 중심이 되는 건물은 두드림뮤직센터다. 매끄럽고 깔끔한 흰색의 폴리카보네이트 외관은 해가 지면 오디오 볼륨 화면을 연상케 하는 LED조명이 화려하게 켜진다. 이곳은 실내공연장, 음악 교육실 등으로 이루어진, 음악에 관한 여러 가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두드림은 악기나 문을 두드린다는 의미와 꿈을 꾼다(Do Dream)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이름으로 동두천시의 홍보 캐치프레이즈 역시 ‘두드림 동두천’이다. 나는 바로 이곳을 동두천 관광의 희망, 나아가 동두천시 전체의 미래라고 본다. 다만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다소 우울한 이야기 몇 가지를 더 짚고 가야겠다.




전술했듯 동두천의 면적 42%는 주한미군 공여지로 6‧25전쟁 이후 동두천 시민들은 주한미군과 공생해왔다. 부대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었고 주한미군이 쓰는 돈이 곧 시민들의 수입원이었다. 외부에서 볼 때는 기지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한국인들이 오히려 객(客)이 되는 듯한 거리감이 있었으나 동두천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삶이었다. 미군 위안부 문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못한 데에는 정부의 책임이 컸지만 주요 손님인 미군 눈치를 봐야하는 시민들의 입장도 한몫 했다. 윤금이 씨 살해사건이 일어난 지 꼭 10년 만인 2002년, 양주에서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났다. 2002 한일월드컵으로 온 국민이 축구에 열광할 시기였음에도 전국적으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주한미군 철수 시위가 일어날 정도로 파급력이 컸던 사고였다. 바로 ‘미군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고’다. 사안이 컸던 만큼 우리나라 법무부는 미군에 재판권포기 요청을 했으나 미군은 공무 중 일어난 사고이며 이제껏 재판권을 포기한 사례가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사고차량의 미군 병사들은 모두 무죄를 판결 받았다. 이전의 주한미군의 살인, 폭력 사건과 마찬가지로 SOFA 협정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자국민이 피해를 입는 상황에도 직접 조사하고 처벌을 할 수 없었다.


한편 동두천 보산동 사람들은 이때 캠프 케이시 앞에서 사고 진상 규명과 반미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일부 상인들은 격양되어 시위대에게 똥물을 끼얹기도 있다. 주한미군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가 달린 문제였다. 그들의 미군부대 앞 생계는 어느덧 2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미군이 동두천에 주둔하기 시작한 때가 1951년이니 그 역사가 70년을 넘었다. 부대가 차지한 면적이 워낙 넓고 곳곳이 개발제한구역이어서 동두천 시민들에게는 미군과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지역 대비 적었다. 돈의 흐름 또한 부대 근처가 제일 활발하니 먹고 살려면 부대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안보뿐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전 부분에 있어 주한미군에 의지했다. 미국 또한 자국의 이득이 있기에 군사적 지원을 해왔지만, 전쟁으로 사회 전반이 무너진 대한민국에게 미국은 동맹 그 이상의 존재였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눈부신 발전을 이뤄내 선진국으로 거듭났지만 북한과의 휴전 상태는 주한미군이 지속적으로 존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그 결과 동두천을 비롯해 파주, 양주, 의정부, 포천, 평택 등 미군 공여지가 된 지역의 주민들은 국가 안보를 위해 ‘희생’하는 부분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미군부대가 더 이상 활용하지 않는 공여지에 대해선 반환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동두천시의 경우 예정된 공여지 반환이 수년째 지연되고 있다. 반환된 땅마저도 대부분이 산지라서 개발이 까다로운 상황이다. 동두천시 시민들은 70년을 미군에 의해 제한된 환경 속에 맞춰 살아왔는데 정작 양국 정부는 시민들의 생계를 모르쇠로 일관한다며 읍소하고 있다.




동두천시는 앞으로 어떻게 자립해 발전해나가야 할까. 일단 공여지 반환과 개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테고 그 다음은 동두천이 가진 ‘자산’을 활용해 동두천만의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속 없는 말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여행자의 시각에서 동두천의 미래는 도시의 문화적 자산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 점에서 두드림뮤직센터와 동두천락페스티벌은 동두천을 세계적인 ‘음악의 도시’로 발돋움하게 할 시발점이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33권 『50만 살의 청춘 -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동두천시 : 걷고 노래하고 꿈꾸라>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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