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성남에서 발견한 대한민국의 국격과 국뽕

한국국제협력단(KOICA)를 돌아보며


2000년대 이후 성남시는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 지표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해 왔다. 그러니까 성남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부자도시’이다. 91만 명의 인구에 과학기술 서비스 및 정보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고 정보통신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문화콘텐츠기술(CT), 초정밀기술(NT)을 아우르는 사업체들이 판교테크노밸리에 모여 있다. 정자동과 서현동 일대는 문화산업진흥지구로, 판교는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며 도시너머 국가 발전의 핵심 역량을 갖추고 있다. 분당구에 비하면 개발이 늦은 듯했던 수정구 창곡동과 복정동은 서울시 송파구, 하남시 일부와 묶여 위례신도시로 개발되었다.


성남시는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다. 전쟁 후 황무지를 팔도에서 모인 전역 군인이 단합해 개척하고 시장, 우체국, 농장을 만들어 도시 기반을 다졌다. 서울에서 쫓겨나 허허벌판에 선 판자촌 주민들은 정부를 향해 생존권을 부르짖은 끝에 ‘성남시’라는 그들의 리그를 얻었다.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과 원활한 교통망 덕분에 1,2기 신도시가 차례로 들어섰고 한 곳은 우리나라 신도시의 상징이, 다른 한 곳은 IT산업의 메카가 되었다. 판자촌에서 아파트로, 황무지에서 빌딩숲으로, 쟁기와 삽에서 첨단 기술로 근 50년 만에 이룩한 대한민국의 성장은 유례없이 빠르고 화려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 한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하기에는 이르고 중진국쯤 된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생이 되고 해외 배낭여행을 다니면서, 국내총생산(GDP)과 같은 수치와 별개로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 반열에 합류했음을 체감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할 때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하 코이카)에서 발행하는 홍보지의 편집 업무를 한 적이 있다. 코이카의 캐치프레이즈는 언제나 ‘도움받는 나라에서 도움 주는 나라로’이다. 처음 코이카 홍보지를 만들 때는 그 문구를 자주 접해서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언젠가 정부가 초청한 미국 평화봉사단(The Peace Corps)의 방한 소식을 접하고 익숙했던 수식이 새삼 뭉클했다. 고백하건대 내가 영상을 보며 소위 ‘국뽕’에 취할 때는 BTS의 퍼포먼스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볼 때가 아니다. 미국 평화봉사단원이 우리나라에 40년 만에 방문해 발전된 도시 풍경에 놀라고 오래전에 교육했던 학생과 재회해 그들의 성장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영상을 볼 때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또 문화강국으로 세계의 인정을 받지만, 불과 40년 전만 해도 해외에서 원조받는 개발도상국이었다. 미국 평화봉사단은 1961년 창설돼 현재까지 약 24만 명의 봉사단원을 143개국에 파견해 온 미국 대표 봉사활동기구이다. 내년 5,000명 가까운 봉사단원이 해외 각국에서 물자 및 기술 지원, 긴급구호, 대외협력 등 다양한 원조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미국 평화봉사단의 원조를 받는 국가였다. 1967년부터 1981년까지 1,700여 명의 평화봉사단원이 대한민국에 방문해 영어 교육, 보건, 농촌 개발 프로그램 등을 진행했다. 그 이후에는 빠른 경제발전으로 기술원조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결정해 철수했다.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매년 평화봉사단원을 초청하고 있다. 청년일 때 대한민국에 왔다가 노년이 되어 다시 방문한 단원들은 대부분 눈물짓는다. 자신이 돕던 나라의 성장과 변화에 감동하기도 하고 자신이 살던 동네와 인연을 맺었던 한국인들의 집이 사라져 슬퍼하기도 한다. 영어를 가르쳤던 학생들이 중년이 되어 요직을 맡아 일하는 모습에 감회가 새롭고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가 반갑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쉬워한다. 그들은 또 코이카 본부를 찾아 대한민국 봉사단원이 해외 개발도상국에서 벌이는 다양한 원조 활동을 안내받는다. “도움받던 나라가 도움 주는 나라가 되다니!” 미국 평화봉사단의 이 말은 의례적인 감탄이 아니라 지난 경험에서 비롯한 솔직한 감탄이다. 그들의 모습을 영상이나 글로 만날 때마다 코끝이 찡하다. 코이카는 미국 평화봉사단이 철수한 지 10년 만인 1991년에 창단되었다. 코이카 본부가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에 있다.




코이카 소속 봉사단원이 아니고서야 굳이 코이카 본사를 방문하는 일반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 있다. 온라인으로 방문 예약만 하면 코이카 부지에서 가장 안쪽 언덕에는 KOICA 개발협력전시관을 관람할 수 있다. 주로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단체로 방문하는 경우가 많지만 판교 근처에 왔다면 산책 삼아 한 번쯤 들러 볼만하다. 코이카 본부는 행정구역상으로 수정구 시흥동에 자리하지만 판교테크노벨리와 붙어 있고 동판교IC에서 가까워 흔히 판교에 있는 코이카라고 한다. 말쑥하고 세련된 건물들이 늘어선 판교테크노벨리 사이를 지나면 곧 코이카와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 이정표가 보인다. 코이카, 국가기록원, 세종연구소가 한 부지 안에 자리한다.


코이카 본관 앞에서 운행하는 전동차를 타고 개발협력전시관으로 갔다. 사실 600m밖에 되지 않는 거리라 전동차 없이 충분히 걸어갈 수 있다. 가는 길은 나무가 울창하고 연못과 잘 관리된 정원이 펼쳐져 있어 마치 골프장 필드를 달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자산가의 별장에 들어서는 것 같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KOICA 개발협력전시관 건물은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저로 사용하기 위해 지지어졌다는 의혹을 샀던 일해재단 소유의 영빈관이었다. 체험관 앞 테니스장과 드넓은 정원, 유난히 근사해 보이는 노송들은 처음 지어졌을 때의 흔적이다. 3홀 규모의 골프장도 있었다고 한다. 전시관이 되기 전 건물 안은 고급 샹들리에와 외제 변기, 등나무 가구가 배치돼 누가 봐도 호화로웠다고 하며 일각에서는 전 전대통령이 퇴임 후 머무를 사저로 지어져 ‘현대판 아방궁’이란 소리가 나왔다. 이곳은 1988년 청문회 과정에서 외부에 그 존재가 알려졌고 이후 폐쇄되었다가 2012년 건립 26년 만에 코이카의 전시 장소로 새롭게 단장해 대중에 공개했다. 코이카 본사는 성남으로 이전하기 전에 대학로에 있었다. 정부가 1991년 영빈관 부지를 포함한 일해재단 소유 부지 대부분을 국가에 귀속해 외교부 산하의 공공기관 코이카 본부가 옮겨졌다. 민주주의를 퇴행시킨 탐욕스러운 전 전대통령의 비밀스러운 사저와 부지가 해외원조를 주관하는 정부산하 기관의 열린 공간으로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기보다 시간이 흐르고 국가가 발전하면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변화 같다.




KOICA 개발협력전시관은 코이카의 설립목적, 역할, 역사, 성과 등을 소개하고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과제와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대부분 텍스트와 이미지, 단순한 체험 코너 등으로 꾸려져 있어 해설자와 함께 둘러보는 편이 좋다. 코이카는 개발도상국의 빈곤감소 및 삶의 질 향상, 여성, 아동, 장애인, 청소년의 인권향상, 성평등 실현, 지속가능한 발전 및 인도주의를 실현하고, 협력대상국과의 경제 협력 및 우호협력관계 증진,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됐다. 교육, 보건의료, 공공행정, 농림수산, 기술환경 에너지 등을 중점 분야로, 환경, 성평등, 인권 등을 범분야로 원조사업을 추진한다. 시혜적인 차원의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외교와 국가 경제에 직결된 원조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코이카의 핵심 키워드는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이하 ODA)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주관 아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에 만연한 빈곤문제 해결에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에서 시작되었다. ODA는 지원 형태에 따라 크게 양자간 원조, 다자간 원조로 나뉘고 원조자금의 상환 여부에 따라 무상원조와 유상원조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의 ODA 규모는 코이카 설립 이후 현재까지 꾸준하게 증가했다. 1995년 1.1억 달러에 불과했던 규모는 2023년 30억 달러를 넘겼다. 우리나라 돈으로 4조 원이 넘는 규모이다. 2009년에는 OECD 공여국 모임인 DAC(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에 가입이 결정되었고,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최빈국에서 공여국이 되었다. 그러나 ODA 규모는 29개 DAC 회원국 중 중간 수준에 그쳐 정부는 ‘국격에 걸맞은 글로벌 중추국가’를 국정 목표로 ODA 예산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그에 반해 해외봉사단 파견 인원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일 정도로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직접 해외봉사단을 파견하는 국가는 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를 포함해 미국, 독일, 룩셈부르크, 일본, 벨기에 등 5개국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들은 NGO 등 민간 봉사단을 일부 지원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파견한다. 코이카 창단 이후 현재까지 파견된 단원 수는 2만 명이 넘고 연평균 1,600명 내외의 단원들이 60여 개국, 50여 개의 다양한 직종으로 파견된다. 한 해에도 여러 차례 분야별로 봉사단을 모집하고 경쟁률도 높은 편이다. 코이카 해외봉사단의 명칭은 월드 프렌즈 코리아(WFK, World Friends Korea)이다.




‘국격’이라는 단어를 곱씹는다. 내 마음이 소란하면 주변을 챙길 여유가 없듯 국가도 내부가 팍팍하면 외부를 돌볼 여력이 없다. 나라가 국가의 품격을 말하고 그에 상응하는 예산과 자원을 마련한다. 내부 살림이 여유로우니 국경 밖 세상에도 깊이 관여한다. 국민은 ‘월드 프렌즈 코리아’라는 이름을 달고 해외에 나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이를 ‘국격이 높아졌다’고들 표현한다.


2023년, 성남시는 탄생 50주년을 맞이했다. 이 도시를 둘러보는 일은 곧 대한민국이 ‘성장’해 온 역사를 톺아보는 과정이었다. 눈부신 성장이 틀림없지만 성장통이 따랐다. 과연 성장이 맞는가 성찰하게 되는 어둡고 불편한 지점들도 존재한다. 도시가 빠르게 자랐기에 명암의 대비가 더욱 뚜렷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퇴나 답보는 없었다. 사이사이 조율과 성찰이 없지 않았기에 이만큼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전술했듯 성남시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도시’로 한껏 여유롭다. 물질 욕망으로 굴러가는 각박한 도시라지만, 단순히 생활 수준을 놓고 보면 도시가 탄생했던 5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롭다. 성남시가 대한민국을 대변하는 하나의 작은 아이콘이라면 이 도시의 품격 또한 국격에 상응하지 않을까. 나는 다만 앞으로 이 도시가 보여줄 미래가 수직과 단선으로 단조롭지 않고 다각과 복선으로 입체적이길 바란다. 성남시는 대한민국 도시의 트렌드세터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너머의 도시들 - 경기 중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성남시 : 도시의 트렌드세터>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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