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모락산, 가볍지만 무거운 길

갈미한글공원과 모락산을 둘러보며


현재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콘텐츠는 세계 최정상에 올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음악, 영화, 게임,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으며 이는 어쩌다 ‘얻어걸린 것’이 아니라 긴 세월 쌓은 공든 탑의 결과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했던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소감처럼, 세계 대중문화 흐름의 선두에 선 우리나라 콘텐츠는 모두 한국적인 것들이다. 그룹 BTS도, 영화 <기생충>도, 캐릭터 아기상어도 기존의 외국 콘텐츠에는 없던 것이었다. 주목받기 위해선 결국 ‘1등’이 아니라 ‘유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백운호숫가의 무민이 아쉽고 의왕의 도깨비가 좀더 살아났으면 하는 마음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모락산 등산로 입구. 사진=의왕시



문화강대국이 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내가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말, 우리글이다. ‘K-콘텐츠’ 덕분에 우리말과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만족할 수 없다. 인구도 줄어드는 마당에 국적이 달라도 한국어, 한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아름다운 말과 문자가 유구하게 전승되길 바란다.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은 의왕시 포일동 출신이다. 1896년생인 그가 태어나 자랐을 때는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였다. 이희승 선생은 그가 쓴 수필 <딸깍발이>가 교과서에 실려 전국민에게 알려져 있고 선생 또한 검소하고 지조 있는 모습으로 생전에 딸깍발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딸깍발이에 가려진 그의 업적은 우리말, 우리글을 지키는 데 평생을 바쳤다는 것이다. 이희승 선생은 조선어학회 회원 중 한 사람으로 조선의 말과 글을 말살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의 탄압 아래 우리말큰사전 발간을 목표로 끊임없이 우리말 연구에 골몰했다. 그는 다른 회원들과 함께 문화적 독립운동을 죄목으로 3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해방 후 가까스로 우리말사전 원고를 되찾아 마침내 1957년 사전을 발간했다.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했던 일제강점기를 상상하면 비통하다. 그래서 우리말을 말하고 읽고 쓸 수 있는 현재가 당연하지 않고 이를 지켜준 이들께 무한히 감사하다. 이 감사함은 곧 이희승 선생과 같은 분들에게 보내는 존경이기도 하다.



갈마한글공원 전경. 사진=의왕시


이희승 선생을 기리는 갈미한글공원은 의왕시 정중앙에 있는 모락산 아래 있다. 기념관은 따로 없고 한글 자음과 모음을 이용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 작은 휴게 공원이다. 지난 2022년 12월부터 2023년 11월까지 의왕향토사료관에서 ‘일석 이희승과 한글’이라는 주제로 이희승 선생과 그의 업적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렸는데 기획전으로 끝나 아쉬웠다. 공원에 작은 기념관이 있어 상설전으로 선보인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락산 6.25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 사진=의왕시


갈미한글공원에서 길을 건너면 곧바로 모락산을 오르는 등산로다. 모락산은 해발 385m의 야트막한 산으로 가볍게 오를만한 산이다. 낮은 산이지만 6.25전쟁 당시 정상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군은 1951년 1월 30일부터 사흘간 싸워 승전했고 서울 재수복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수리산과 마찬가지로 유해발굴작업이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작은 산도 아픔의 골이 깊다. 패하지 않았다는 기록의 전승기념비는 영광스럽지 않고 다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신 분들을 추모한다. 전승기념비 근처에는 모락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남쪽으로는 마한,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모락산의 가을 전경. 사진=의왕시


모락산 동쪽 기슭에는 조선시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묘가 있고 묘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사당이 있다. 그래서 모락산에는 임영대군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져오기도 한다. 임영대군이 모락산에 올라 단종과 대궐을 그리워하며 망궐례를 올렸다고도 하고 지금은 터만 남은 모락산 경일암을 창건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임영대군이 ‘서울을 그리워한 곳’이라는 의미로 모락산慕洛山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이희승 선생의 한글공원에서 6.25전쟁의 전장, 백제의 산성, 임영대군에 이르기까지 아담한 산 곳곳에 참 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다. 산 하나도 이러한데 도시 전체는 오죽할까. 첫째와 셋째 사이에 끼인 둘째 같은 의왕은 말없이 겸손하지만 내가 모르는 의왕이 기찻길, 호숫길, 골목길 곳곳에 있을 테다. 정작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실은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들이다. 언젠가 그것들이 온전히 의왕만의 것으로 드러나 빛나기를, 머리 위로 태극기가 펄럭이고 발아래로 의왕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모락산 정상에서 소망했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너머의 도시들 - 경기 중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의왕시 : 기찻길 옆 호숫가>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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