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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발견] ⑨ 두물머리 농사꾼, 최요왕의 농업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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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가 좋아 농사를 짓는다는 최요왕. 두물머리 땅이 좋아 두물머리에 산다는 최요왕. 천상 두물머리 농부로 살 팔자인가보다. 탄탄하게 생긴 비닐하우스 세 동을 나란히 앞세우고 있는 그의 농경지. 그에게 농사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땅도 좋아야 하지만 사람이 더 좋아야 농부로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그의 농업 인문학에 자세를 바로 하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가 만든 비닐하우스에서는 어떤 것들이 자라고 있는지 보기 위해 그의 농막을 찾았다.




Q. 양수리에 오게 된 계기가 뭘까요?



최요왕 : 원래 태생은 전라도 순천입니다. 거기서 자랐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2004년에 귀농을 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기 두물머리에서 농사짓고 있지요. 대학 졸업 후부터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10여 년 정도 되었을 때 그 생각들이 점점 익어가 결행의 시기가 됐어요. 어디로 귀농을 할까 전국적으로 알아봤는데 마침 이쪽을 소개받아서 왔어요. 고향 쪽이나 지방으로 가면 집사람하고 따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데 집사람이 허락을 안 해줬어요. 같이 살 수 있는 지역을 찾았는데 두물머리는 집사람 출퇴근이 어렵지만 할 수 있어서 오게 됐죠.


20년 전, 처음에 여기 올 때만 해도 농사짓기 좋았죠. 특히 귀농할 때만 해도 전국적으로 이름 있는 유기농 채소 생산 단체인 팔당생명살림 영농조합에 회원으로 가입했어요. 그 영농조합은 남양주 식구들, 양평 식구들, 경기도 광주 해서 한 60농가 정도 있었고, 매출도 40억 됐었어요. 그 시기에 영농조합에서 만든 팔당생협이 생겼고요. 팔당생협은 내가 왔을 때는 한참 이야기가 진행이 되다가 막 만들어진 참이었어요. 도시 생활하다가 귀농하면 적응하기가 되게 어려운데 저는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서는 아주 편하게 연착륙한 거고 적응도 잘했어요. 제가 잘했다는 게 아니고 영농조합의 여건이 좋아서, 당시 귀농한 사람들을 많이 넉넉하게 받아주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정말 쉽게 귀농한 편이에요.




Q. 원래 친환경이나 생태 농업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최요왕 : 처음 유기농업이 시작됐을 때 유기농업을 시작했던 단체들이 몇 개가 있어요. 그중에 나름 제일로 역사 깊고 유명한 단체로 정농회라고 있습니다. 정농회가 아마 1970년대,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시작됐을 거예요. 정농회 회원이었던 외가 쪽 형님이 계셨는데 그 양반이 해남에 살았어요. 순천 우리 집에 가끔 놀러 오면 유기농법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고 우리 엄니한테도 유기농을 권장했는데 말대로 하기는 힘들다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제초제만은 치지 마십시오.” 맨날 그랬었어요. 그게 머리에 남아 있었지요. 그래서 농사를 하면 그렇게 하는 게 맞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귀농하려고 했을 때 그 형님한테 가서 농사를 배우려고 했었죠. 그 형님이 농사 제안도 했었는데 실은 결혼하느라고 해남으로 못 갔어요. 두물머리에 와서 영농조합 회원으로 자연스럽게 유기농 농사하고 내 농사도 지은 거지요.



Q. 현재 두물머리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고, 하고 계세요?


최요왕 : 저는 그냥 농사 계속 짓고 있는 거예요. 그냥 뭐 특별히 활동하고 그런 건 아닌데 여기저기 행사 있으면 쫓아다니면서 같이 거들고 그랬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4대강 싸움하면서 그 당사자가 되고 보니까 이러저러하게 사람들 눈에 많이 띄었던 것 같아요. 내 자의는 아니고 여건이 그렇게 돼버렸어요.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는데, 제 익명성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것 때문에 막 숨이 막힌다 그런 건 아니나, 저야 뭐 크게 상관은 없어서 개의치 않고 살 수는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을 막 찾아가고 그런 건 아니고 어쨌든 살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됐고 그건 뭐 그렇다고 피할 것도 아니라 그렇게 돼버렸죠.


이 지역 유기농업의 역사는 제가 여기 귀농하기 한참 전부터 싹이 터서 몇몇 리더들이 나서서 유기농업을 시작했고 어렵게 어렵게 시작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기반을 딱 잡아놨고 그래가지고 그 기반을 잡은 유기농업을 하는 우리 영농조합의 황금기 시절에 제가 귀농을 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4대강 싸움이 터졌고 그때부터 우리 영농조합하고 이 지역의 유기농업이 꺾이기 시작했죠.



Q. 농사, 특히 유기농업이 어려운데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최요왕 : 저야 개인적으로 이를테면, 긴 건 기고, 아닌 건 아니니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왔던 것일 뿐이에요. 제가 뭐 강한 의지가 있고 그런 것보다는 가족들의 뒷받침, 지지 뭐 그런 것들이 계속 여기 있게 해준 힘이 됐어요. 고향 가족들이 특히 그랬어요. 순천에 있는 가족들, 우리 형제들, 우리 어머님이 그 지방 기질들이 있어서 명절이나 그럴 때 고향에 가면 저는 거의 영웅 대접을 받았죠. 고향 성당에서도 신부님이랑 동네 분들이 “오, 야, 요왕이 고생이 많다며?” 그런 고향분들과 우리 형제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게 어쨌든 나를 받쳐주는 큰 기반이 되었어요. 집사람 역시 마찬가지고. “당신이 맘먹었으면 끝까지 해봐.” 그러면서 경제는 집사람이 다 책임지니까. 저는 빙산의 일각이에요. 제 밑에는 가족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사람이 힘을 쓰려고 그래도, 다리에 힘을 주려면 딛고 있는 땅이 탄탄해야 돼요. 모래 바닥에서는 힘쓰기가 힘들어요. 빠지거나 무너지지 않는 바닥에서 힘을 써야지 힘을 제대로 쓰는 거 아니겠어요?



Q. 두물머리에서 농사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일까요?


최요왕 : 여기가 제가 사는 터, 터전이 됐어요. 다른 데로 옮기고 뭐 그런 생각을 거의 하기 힘들게 됐죠. 그래서 내 터전의 불안 요소들을 어떻게 해결할 건가 그런 데에 주로 나의 관심이 있는 거죠. 땅. 농지. 이게 4대강 사업 끝나고 김문수 경기도지사 때 무슨 자금인지, 일정 정도 쓸 수 있는 예산이 있었나 봐요. 그걸 우리한테 농지 구입 자금으로 융자를 해줬어요. 그러니까 우리식 표현으로 100% 외상으로 산 거예요. 근데 이제 외상값을 갚아야 돼요. 농부로서 농사지어서 갚기는 어렵고 땅 일부를 떼어서 팔든가 해야 돼요. 그러려고 준비하고 있죠.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4대강 싸움 때, 크게 이쪽 두물머리 농사꾼들이 있었고, 그다음에 송촌리 농사꾼들이 있었는데, 송촌리 농사꾼들 싸움은 2011년에 끝났어요. 먼저 끝나가지고 두물머리밖에 안 남았어요. 그런데 두물머리에 열한 집인가 있었는데, 정부 입장에서는 두물머리만 깨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두물머리를 깨기 위한 당근으로 뭘 제시했냐면 방금 말했던 농지 구입 자금 100%를 융자해주는데 융자 조건이 이율은 1.5%에 3년 거치, 17년 분할 상환. 겉보기에는 겁나게 좋은 조건이에요. 1.5%라는 이율도 쌀 뿐더러, 20년에 걸쳐서 갚는데 3년 동안 이자만 내다가 4년째부터 원금을 갚기 시작한다는 식이라 되게 입에 달달했죠.


그리고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그 열한 집 중에 일곱 집이 먼저 나가요. 네 집만 남은 거예요. 꼴통들 넷만 남아서 1년 이상을 더, 2012년까지 싸운 거예요. 결국에는 그때 융자를 받아서 땅을 새로 구입했어요. 딴 데로 이주해서 농사를 짓는 사람 중에도 그 땅값을 온전히 다 갚고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자기 농사로 땅값을 갚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없어요. 도중에 농사 그만둔 사람도 있고, 농지를 그냥 팔고 딴 데로 아예 가려고 그러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최근에는 아직도 땅값 갚는데 허덕허덕, 아주 죽을 지경인 사람도 있고요.


요즘은 농어촌공사에서 농지들을 매입해서 그것을 원래 땅 주인한테 10년 임대를 해줘요. 정확하게 그 사업 이름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농어촌공사에 땅을 팔고 그러면 그걸로 빚을 갚는 거예요. 그러면 빚은 없지요. 그런데 자기 소유 농지는 없고 임대농이 되는 거예요. 어쨌든 국가 소유의 땅을 임대하는 거라서 좀 안정적이죠. 땅 도지도 아주 그렇게 크게 부담스러운 건 아니고 일종의 토지 용역비라고 할 만한 수준이고요. 부모한테서 물려받지 않는 이상, 이미 농지는 산업, 생산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에 비용은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농산물의 절대 가치가 워낙에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땅의 비용에 농산물 가격이 걸맞아야 하는데 그거와 상관없이 물가에 맞춰서 농업 생산비는 올라가 버리고, 그 차이가 점점 커질수록 힘들어지는 거죠.



Q. 두물머리 지역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최요왕 : 내 농사가 좀 안정적으로 되려면 땅이 먼저 해결되는 게 급선무예요. 그래서 내년 안에, 더 길게는 내후년까지는 어떤 승부를 봐야 돼요.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게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이 지역에서 같이 농사짓고 있는, 특히나 새로 이 지역에 와서 농사를 벗 삼아 살고 있는 무리들이랑 기존에 있는 농사꾼들이 좀 그럭저럭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기존 세대들이 계속 농사짓고, 새로운 세대들이 와서 또 그걸 이어받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건 너무나 큰 욕심이죠.


국가적으로 어떤 농업에 대한 근본적인 정책 전환이 없으면 어렵죠. 뭐 농업이야 국가 단위에서 어떻게든 끌고 가겠죠. 그런데 그게 옳은지 그른지 요즘은 그것도 혼란스럽긴 한데 그러니까 뭐랄까 농촌과 농민, 지역과 농업 그런 것들이 같이 문화적으로 농촌도 살고 농업도 살고 하는 그런 정책들을 고민하고 있지는 않은 걸로 보여요. 고민하는 척은 엄청 하는데 근데 국가 단위에서 정책적으로 그런 안이 나오고 그 안을 바탕으로 세부적인 정책들이 나오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 같고요. 이 흐름대로 가면 결국은 농업 생산을 기업에 맡기지 않겠어요? 모르겠어요. 정말로 자급에 대한 어떤 최소한의 작전이라도 있는지 어쩐지 생각들조차 없는 것 같아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생각이 있다면 지금의 조건으로 계산해서 어떤 목표치 그런 것도 설정을 해놓고 해야죠. 이를테면 사람이 세 끼를 먹고 사는데 어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세 끼 중에 두 끼를 먹으면서도 버틸 수 있잖아요. 그리고 한 끼는 어떻게 여기저기 알아보고 며칠 만에 한 번씩 세 끼 먹고 그러다가 더 상황이 나빠지면 최소한 하루에 한 끼는 먹고, 나머지 두 끼를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더라도 끼니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어요. 지금이 딱 세 끼 중에 한 끼 겨우 먹을 정도의 상황이 아닌가 싶은데요.


지금 두 끼는 수입해서 먹고, 수입하는 데 드는 돈은 수출을 통해서 벌어들이고, 수출 국가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가지고 그렇게 설명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기반을 갖추려면, 절반, 한 끼 반 정도까지는 늘려나가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까지 늘려갈 것인가. 최후의 마지노선이 어디라는 설정이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그런 설정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방법을 찾아야 하고요. 그런데 구체적인 어떤 설정 자체가 없는 것 같아요, 설정 자체가.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건 “아, 우리가 설정해 놓은 게 없구나. 어떻게 하지? 설정해야 되는데!”라는 안타까움마저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역에 내려가면 모든 것들이 다 지속 가능하지가 못해요. 뭐 하나 작전을 짜고 해보려고 해도 금방 무용지물 돼버리는 것들이 많아요. 지속 가능한 것이 중요해요. 아랫세대들을 위하는 것이 실은 기성세대를 위한 거고 그래야 계속 이어지는 거죠. 아랫세대들을 위한 것이 뭘까 생각하면 없어요.


저의 이런 고민이 다 기본적으로 농업적인 고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어쨌든 간에 농지 문제부터 좀 해결을 해야 될 것 같은데, 이를테면, 저는 지금 팔당생명살이 영농조합 회원이기도 하지만, 가톨릭농민회의 이 지역에 있는 분회 조직 회원이기도 한데 우리 회원 중에 젊은 친구들이 많아요. 그 친구들은 저 같은 전업농은 몇 명 안 되고 농사 반, 자기 일 반, 그런 경우가 많아요. 농민은 유목민이 아니잖아요? 농민은 땅이 안정돼 있어야 되는데 그 친구들에게 안정된 땅을 구해줄 수가 없어요. 나 역시도 아직도 취약한 상태고요. 농업을 기반으로 이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안 돼요. 만들어질 수가 없어요. 임대를 하더라도 공적인 어떤 걸 바탕으로 임대가 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런 제도는 있죠. 우리나라에 농지은행도 있기는 한데, 주로 산업농 쪽, 스마트팜이니 하는 쪽으로만 정책적으로 돼 있어요. 농민 수당이니 뭐니 하는 농업 보조 지원 정책들도 다 땅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요. 농지를 기반으로 농지 규모가 일정 규모 이상이면 농업인이고 농업인 경영체 등록을 해야 되고, 자기 땅이 아니면 임대를 해야 되는데 임대는 임대 계약서가 있어야 되고 임대 계약서를 쓰면 땅 주인은 나중에 팔 때 세금을 왕창 두드려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안 써주고…. “농사 그만하고 땅 팔 거야, 내놔.” 전혀 안정적이지가 않아요. 20년 동안 실은 그런 상황이에요.


나야 처음 쫓겨났던 땅이 국가 땅인 하천부지라서 국가에서 임대해서 쓰고 있었던 건데 그때는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어요. 그걸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 번에 아작을 내버리니까 난리가 난 거였어요. 우리나라 농산물 가격은 딴 나라 이야기예요. 일반적인 물가 인상률이 쭉 있어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인상률인데 농산물 인상은 그것에 미치지 못해요. 그래서 그 간극이 갈수록 커지고요. 토지, 땅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데, 농산물은 한참 바닥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공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 농어촌공사에서 땅을 매입해서 임대해 주는 게 있긴 하나 그 제도도 매우 제한적이고 이 지역에는 잘 안 맞아요.


원래 사람이 어디 다른 지역으로 가서 살 때, 땅을 보고 사는 게 아니고 사람을 보고 동네로 가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아요. 사람을 보고 가요, 사람을 보고. 우리 가톨릭농민회 분회 식구들은 대부분 사람만 보고 이 지역에 내려와서 이렇게 살고 있는데, 땅이 없네? 어떻게 방법이 없어요. 그게 제일로 답답해요. 그리고 저도 나이가 들다 보니까 젊은 사람들하고 새로운 생각, 철학 그런 것들이 같이 섞여서 이야기가 돼야 뭐가 좀 되지, 우리 나이든 세대들의 생각만 갖고 우리끼리만 있으면 완전히 굳어져 버려요. 그래서 지역에서 같이 다양하게 연령대별로 다 같이 어울려져서 사는 게 진짜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것 같은데, 그러려면 이 아랫세대들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기반이 있어야 하죠. 그런데 집과 땅, 주거도 불안정하고.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은 기성세대들이 아랫세대들한테 역사적으로 큰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Q. 이 불안정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최요왕 : 이를테면, 중앙정부가 땅에 대해 어떤 문제 의식과 문제 제기와 그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있지요. 그리고 지역에서, 우리는 양평군이니까, 양평군과 군의 농정과 그런 것들, 그다음에 지역의 문화적인 것들을 역시 같이 고민하고 풀어가면 좋겠어요. 런 일들은 그동안에 쭉 많이 있었어요. 근데 제가 그런 데 관심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최요왕 같이 하자.” 그러면 도와줄 수는 있는데, 제가 여기에 막 나서서 찾아보고 그러지는 않게 되더라고요. 지금 제일로 고민은 뭐냐면 우리 영농조합이 점점 축소되어 가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예요. 그 다음에 전통적으로 영농조합 단위로 지역에서 했던 유기농업이 지금은 학교 급식, 공공급식이라는 큰 판으로 풀어져 나가고 있고, 그 모임 단위가 생겨서 거기 일을 보고 있는데, 실무적인 일도 있고 큰 틀의 고민도 필요하고 계획도 해야 되고 막 그래요. 그다음에 가톨릭농민회 분회 일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요즘 올해 1년짜리 우리 자체 프로젝트로 분회원들 하나하나 인터뷰를 해서 그것을 분석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급식 쪽 출하회는 12월에 하고 그러고 나면 내년 준비를 해야 돼요. 그래가지고 우리 회원들 한번 모아서 내년 계획 잡고 또 신입회원으로 누구를 들일 것인지, 올해 1년 평가도 해야 되고 통계도 좀 내봐야 되고, 우리 영농조합도 생협이 계속 관계를 하는 게 맞는지 실무회의를 하는데 온통 그런 데만 정신이 팔려 있어요. 다 농업 관련이에요. 그러느라 문화적인 것들을 생각할 틈이 없어요. 특히나 우리 분회에 와 있는 젊은 친구들은 최근에 유명한 소설가 불러갖고는 뭐 토크도 하고 그랬는데 ‘재밌겠다’고 생각했지만, 갈 마음의 겨를 자체가 없어요. 그래도 아무튼 지역적으로 이런 걸 모색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이가 들면서 아랫세대들한테 점점 미안해지는 것들이 많이 있습디다. 한 십수 년 전부터인가 아랫세대들, 젊은 세대들이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해낸 건 냉철하게 판단해도 맞아요. 그걸 인정할수록 저한테 영양가가 더 생겨요. “그럴 수도 있겠다, 잉?” 그러면 돼요. “나는 이런 것 같은데, 어쩌냐?”고 같이 이야기하면 돼요. 이야기할 때는 같은 레벨로, 많이 접고 이야기를 해야 비슷한 수준으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이 나와요. 그런데 그건 여전히 어려워요. 그래서 여전히 잔소리꾼으로 통해요. “아, 형, 말 좀 그만해.” 그러고. “뭐 그렇지. 미안, 미안, 미안.” 그렇게 되긴 해요. 저는 후배들이 무서워요, 항상. 선배들은 안 무섭죠. 선배들한테는 뭉개면 되고 개기면 되는데 후배들이 저한테 뭉개고 개길 때도 거기에 제가 대처할 수 있어야 돼요. 그건 다른 거예요. 아랫세대들을 무서워하고 조심하는 윗세대가 많을수록 아마 영양가가 풍부해질 거라고 봐요. 그리고 어떤 계산적인 거 떠나서 젊은 친구들하고 노는 게 더 재밌지요. 저는 좀 즐겨요. 성격 자체가 그런가 봐요. 그래서 되게 다행스러워요. 내 입장에서 그 친구들한테 어떤 도움이 돼줄까 항상 고민하는데 마땅치가 않아서 그냥 이야기 들어주고 같이 수다 떨어주고 그 정도지만요. 어쨌든 저 역시 여기에 정착할 때 지역에 같이 농사짓던 형들이 와서 봐줬고 많은 도움을 받으며 정착했는데 그런 건 대물림하는 게 맞지요.






2025 실학박물관 지역활동가 아카이브 <모종의 발견>

조선 후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고민하던 학자들을 실학자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활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종의 발견>은 지역 곳곳에서 싹트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찾아 숨겨진 가능성과 가치를 세상에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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