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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조(정의)
본 가이드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지지씨’는 경기도 소재 문화예술기관의 생산자료 등록과 확산을 위해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온라인 아카이브 플랫폼입니다.
② ‘회원’이란 소정의 가입 승인 절차를 거쳐 지지씨 글쓰기 계정(ID)을 부여받고, 지지씨에 자료 등록 권한을 부여받은 경기도 소재 문화예술기관 및 유관기관을 의미합니다.
‘생산자료(=콘텐츠)’란 ‘회원’이 지지씨 플랫폼 상에 게재한 부호, 문자, 음성, 음향, 그림, 사진, 동영상, 링크 등으로 구성된 각종 콘텐츠 자체 또는 파일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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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경기문화재단은 본 가이드의 내용을 ‘회원’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지지씨 플랫폼의 기관회원 등록 안내 페이지에 게시하여, 자유롭게 내려받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합니다.
② 본 가이드는 경기문화재단의 온라인 플랫폼 운영 정책 및 저작권 등 관련 법규에 따라 개정될 수 있으며, 가이드를 개정, 적용하고자 할 때는 30일 이전에 약관 개정 내용, 사유 등을 '회원'에 전자우편으로 발송, 공지합니다. 단, 법령의 개정 등으로 긴급하게 가이드를 변경할 경우, 효력 발생일 직전에 동일한 방법으로 알려 드립니다.
1. 본 가이드의 개정과 관련하여 이의가 있는 ‘회원’은 탈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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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분류 | 외부기관 | 경기문화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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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디 | 사업부서명/사업명 | 사업부서명/사업명 |
| 글쓴이 노출 | 아이디와 동일(한글) | 아이디와 동일(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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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
[모종의 발견] ⑩ 살며 살리며 사랑하며, <가톨릭농민회 두물머리분회> 그리고 <뒷골밭작목반>
2025 실학박물관 지역활동가 아카이브
농사를 농업이라고 하면, 여러 산업 중 한 부문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농사를 생명을 키우고 흙을 살리고 사람을 먹이는 일이라고 하면 경제 논리만으로는 충분히 규정할 수 없는 영역이 된다. 농사를 농업으로 이해하는, 세상에서 농사를 생명이 사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농사짓는 농부들이 있다. 자기 땅 한 조각이 없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도 흙을 돌보고 생명을 키우고 사람들이 함께하는 삶을 예찬하고 감사하며 행복하다는 이들이 있다. 고단한 현실에서 다른 삶을 엿보고 싶다면 여기 가톨릭농민회 두물머리분회의 문을 살며시 열어보기를 권한다.

Q. 가톨릭농민회 두물머리분회의 회원으로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정국 : 두물머리분회의 박정국입니다. 우리 분회가 만들어진 것이 2014년인데 처음부터 함께했습니다. 그동안 농산물 물류와 회계 처리 등을 담당하다가 2024년에 넘겨주었습니다.
알록 : 저는 뒷골밭 작목반에서 농사짓고 있습니다. 2020년부터 작목반 친구들하고 부용리 뒷골밭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본래 뒷골밭은 방춘배라는 농부님이 8년 정도 먼저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같이 하자고 제안해 주셔서 작목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여기 계신 마르티노(박정국) 님하고 데레사(김현숙) 님께서 기쁘게 분회 가입을 제안해 주셔서 작목반 친구들과 우르르 가입했습니다. 이제 6년 되었습니다.
김현숙 : 저는 김현숙 농부입니다. 올해로 11년차 되었고 딱 11번 농사지었습니다. 제가 가입했을 때, 두물머리분회는 이미 활동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창립총회할 때는 같이 있었지만요. 한 1년 정도 늦게 합류했어요. 부용리 일대 여기저기 빈 땅을 경작하는 다품종 소량 생산 농부입니다. 저는 원래 여기에서 거리가 좀 있는 용문에 살고 있었어요. 처음에 분회에서 여러 가지 작물을 서울우리농에 공급하는데, ‘깻잎’ 농사를 짓는 생산자가 없었어요. 그때는 여기 두물머리분회가 생산 공급 중심의 분회였거든요. 그래서 저에게 ‘깻잎’을 지어주면 좋겠다고 콕 집어서 제안하기에 받아들였어요. 분회원들이 초대해 준 덕분에 취직을 한 셈이죠.
Q. 가톨릭농민회 분회인데, 가톨릭 신자여야 가입할 수 있는 것인가요?

박정국 : 그렇지만은 않아요. 우리 분회의 초창기 농민은 거의 가톨릭 신자였어요. 나중에 조금 열어둔 거예요. 신자 아닌 분들도 가톨릭농민회에 조직이 되니까요. 2013년에 두물머리 농지보존투쟁이 끝났어요. 당시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본부장이던 조해붕 요셉 신부님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농’을 맡고 있으셨던 거고요. ‘가톨릭농민회’가 생산자 단체라면 ‘우리농’은 소비자 단체라고 보면 돼요.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역할이에요. ‘가톨릭농민회가 생산한 건강한 생명 농산물을 우리가 소비하자.’ 더 쉽게 말하면 가톨릭 생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에 속한 네 명 농부도 처음에는 최요왕이 빼고는 다 신자가 아니었어요. 조해붕 신부님께서 세례를 약식으로 주셨어요. 원래 세례 받으려면 공부도 6개월 이상 해야 하고 여러 가지 해야 하는데 쉽게 받았어요. 덕분에 프란치스코, 욥, 이시돌 이렇게 셋이 다 세례를 받았어요. 시작할 때는 최용석 프란치스코하고 그 와이프 박은경 데레사, 그리고 효정이도 있고 모두 세례를 받았죠. 중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어차피 가톨릭농민회도 꼭 신자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도 자동적으로 이 지역에서 우리와 같은 뜻을 갖고 유기농 농사를 짓고자 한다면 다 같이 하자고 정했어요.
Q. 다른 농민회와 다른 점이 있을까요?

현숙 : 여기는 다 유기농업을 하니까 농사 방식이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다른 지역은 ‘전농’ 소속이 많은데, 전농 소속 농민들은 생명농업에 매이지는 않아요. 일단 생계가 되어야 하니까요. 물론 엄청난 양의 농약을 써서 농사를 짓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유기농법을 좋아하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거죠. 무엇보다 그분들은 단일 작물을 대규모로 짓는 단작이고 가능하면 유통체계에 태워서 작물을 판매하는 방법을 선택하죠. 우리처럼 각자가 판로를 뚫어야 하는 상태는 아니에요.
정국 : 제일 큰 차이는 대규모와 소규모, 규모에 있어요. 그 다음이 어떤 가치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런데, 규모는 생각보다 큰 일이에요. 먹고 사는 방법이 농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농사가 완전한 직업이 아닌 거예요. 우리가 갖고 있는 규모로는 농사만을 전업으로 해서는 살기 어려워요. 우리 중에서 농사 소득이 제일 나은 분들이 최요왕과 여기 데레사(현숙) 님인데, 요왕이는 맞벌이라 버틸 수 있는 거고, 데레사 님도 제일 큰 게 장에 참여하는 걸 거예요. 수익에 반 이상이 될 걸요.
현숙 : 나도 지원을 받으니까 가능하죠. 일단 아이가 없고, 엄마는 동생들이 다 보살펴 드리고 나 혼자 먹고 사는 거니까요. 농한기를 위해서 적금도 들고 대비를 하지만 온전히 농사 수입만 가지고 산다고 일반화하기는 어려워요. 농산물은 ‘우리농’에 태우는 게 안정적이고 가장 좋기는 한데, 약간 불안한 면이 있죠. 그래도 나는 와서 구매해가는 요리사도 많고 잘만 생산하면 판매가 안 되거나 작물이 남지는 않으니까 다행이기는 하죠.
정국 : 다른 데하고 다른 점이 우리는 버리는 농산물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소규모니까 가능한 거죠. 우리가 생산한 것은 모두 출하를 할 수 있어요. 달리 말하면 출하를 할 수 있는 만큼, 그러니까 많이 심지도 않는 거예요. 이미 판매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우리 매장이나 나가는 곳에서 얼마큼 소비되는지 딱 아니까 더 이상 늘리지도 않고요.
현숙 : 그리고 두물머리분회의 장점 중 하나가 마르티노(정국)님이나 요왕님이나 몇몇 농부들이 이미 굉장히 지명도가 높다는 거예요. 두물머리 농부들이 어떤 정신으로 농사를 짓는지, 그 농작물이 어떤지 아는 거죠. 그래서 ‘우리농’에 우리 두물머리 물건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사는 사람도 있어요.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그렇게 기반을 다져준 덕분에 저 같은 경우는 훨씬 수월했어요. 정말 고맙고 정말 큰 장점이에요. 이웃 할머니들은 약을 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처음부터 ‘약이 뭐예요?’하는 분위기에서 시작했으니까요. (웃음) 그런 거는 잘 배웠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 합류한 농부들은 너무 귀한 작물을 생산하지만 저만큼의 생산량은 안 되다 보니 판매도 더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Q. 농사를 시작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알록 : 저는 최요왕 농부님 농막에서 열린 퍼머컬쳐 캠프에 참여하면서 인연이 생겼어요. 처음부터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퍼머컬쳐를 통해서 자연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요.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어떤 디자인을 통해서 그 공존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캠프에서 그런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그 자체가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그 이후에 캠프를 열었던 친구들이 협동조합 일자리를 제안해 주었어요. 이웃들이 다 농부들이었는데, 농사지은 걸 먹으라고 갖다 주시기도 하고, 또 이웃들을 만나서 직접 농사를 지어보는 것도 자연스러웠고요. 농부님들의 농사가 나에게도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농사가 일상에 계속 들어오는 것은 너무너무 좋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계속 농사를 짓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거예요.
현숙 : 막연하지만 농사에 대한 생각은 예전에 단체에서 활동할 때부터 있었어요. 피상적으로, 자연스럽고 꾸미지 않아도 되는 삶이 아닐까 생각했던 거죠. 단체에서 활동할 때는 사람들의 말을 진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정무적인 표현으로 간주하고 본의를 가늠하며 접근해야 할 때가 많았어요. 바꿔야 하는데 바뀌지 않는 것들에 치이면서 결국 번아웃 상태가 되었고요. 그래서 약간의 변화가 시작되었을 때, 도피 비슷하게, 내가 농부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농촌에 묻히면 내가 좀더 평화롭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거예요.
엄마가 300평 남짓 텃밭농사를 지었는데, 거들기는 했지만 내가 농부가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어요. 4대강 싸움 끝나고 제주도에도 가고 여기저기 지내다 와서 용문 주변에서 알바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선뜻 분회에서 왔으면 좋겠다고 초대를 해주니까, 갑자기 길이 생긴 느낌이었어요. 게다가 오고 나니까 오지랖 넓게 막 땅 천 평 구해주고 그 어마어마한 데를 다 기계로 갈아서 거름을 5톤이나 부어주고요. 자잘한 건 병인 형님이 다 챙겨주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할 때는 또 방춘배 국장이 엄청 섬세하게 아침저녁으로 와서 보살펴주고요. 사실 거의 공동 농사였죠. 그래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규모였고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주변 친구들을 불러서 조금씩 떼어주었던 거죠. 사람들을 계속 오라고 하고요. 그런 와중에 또 다른 분회원들이 또 다른 땅을 계속 제공하는 바람에 감당 못하는 데도 땅은 더 많아졌어요. 분회원들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농부가 되었을까 싶어요.
정국 : 2010년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개설한 천주교 농부학교라는 데 들어갔어요. 제가 5기예요. 그러니까 주보에서 5년 동안 보다가 들어간 거죠. 제가 40대 중반 무렵이었는데 좀 어려웠을 때라서 서울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죠. 아내하고 얘기하고 그 농부학교에 들어갔어요. 천주교 농부학교에서는 이론만 가르쳐요. 그것도 환경, 자연이 중심이고 농사 얘기는 한 10분의 1 정도예요. 그런 입문 교육이 정말 중요해요. 왜 농사를 지어야 하고 왜 농부가 중요하냐, 농부의 자세는 무엇이냐 같은 정신적인 것에 집중하니까요. 다른 농부학교와는 다르죠. 그리고 농활처럼 가을에 농부들 도와주러 가고요. 가서 도우면서 체험 비슷하게 농부들이 사는 모습을 실제 접해보는 거죠.
몇 개월 과정이 끝난 것이 11월이에요. 우리 교장 선생님인 조해붕 신부님이 두물머리 상황을 알려주시고 이듬해, 2011년이죠. 3월부터 농사를 시작하니까 거기 가서 배우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5기가 미사터 바로 옆에 100평 정도를 경작하기 시작했어요. 두물머리 와서 투쟁 겸 교육장을 시작한 거죠. 제가 5기의 기장이어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일했는데, 6월, 7월, 날이 더워지니까 다 없어졌어요. 덥고 힘드니까 아무도 안 와요. 그냥 저와 우리 가족이 했죠. 여러 농부들 도움도 받았고요. 농지보존 투쟁이 길어지면서 6기, 7기도 다 거기서 실습했어요. 6기 때는 200평, 7기 때는 400평, 실습하는 땅도 늘어났고요.
그러면서 조 신부님하고 저하고 실습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8기부터는 화정에서 의정부교구 땅 한 500평을 실습장으로 삼아서 2년 진행했어요. 그런데 그 땅이 교구에 수용되어서 다시 부용리로 왔죠. 그 전에 나하고 방국장하고 인환이하고 셋이 공동농사 짓던 땅을 농부학교 실습장 겸 교육장으로 삼아서 5년 정도 진행했으니까 부용리 밭에서 15기까지 한 거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두물머리분회가 시작되었어요. 농부학교에서 투쟁에 들어가서 농부들하고 맨날 막걸리 마시고 지냈죠. 그러다 보니까 “아, 여기서 살아야겠다.”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부용리에 다 쓰러져가는 집을 구해서 한 10년 살면서 농사도 배우고 다양한 일을 했어요. 분회원들하고 농사도 짓지만 특이한 게 저는 유치원, 어린이집 텃밭 선생님으로 아이들 가르치는 게 수입원의 반은 됐어요. 지금도 옥천 어린이집은 계속하고 있고 우리농 배달도 해요. 우리농 매장이 처음에는 6곳이었던 것이 많을 때는 11곳으로 늘었어요. 지금은 광주 물류센터가 생겨서 거기에 갖다주는 시스템으로 바뀌었고요.
어쨌든 농부학교가 인연이 되고 두물머리 농민운동이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온 거죠. 실제 집안 살림은 아내가 감당하니까 벌이가 부족해도 마음은 편했고 지금은 아내도 내려와서 둘이 사니까 농부로서 만족도는 높아요.
Q. 실학박물관을 아세요? 실학박물관에서 어떤 것을 해보고 싶으세요?
현숙 : 실학을 아는 건 아니지만 실학박물관이 가깝고 아주 좋은 공원이기도 하죠. 평해길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해요. 거기에 천주교 마제성지도 있어요. 박물관으로 멋지게 꾸며놓은 다음에 두어 번 가봤어요.
정국 : 많이 가보지는 못했어요. 실학박물관 지나서 청량리 가던 167번 버스가 없어져 버려서 교통이 좋지 않아요. 자전거 타고 가기는 좋지요.
알록 : 듣기는 했지만 저는 가본 적은 없어요. 실학박물관을 두고 해보고 싶은 것을 말한다면 오래된 농사책 읽기를 해보고 싶어요. <임원경제> 스터디가 늘 하고 싶었는데, 책을 구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워요. 아직도 번역이 진행 중이라고 하니까요. 농사 고서에 관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관심이 생기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현숙 : 맞아요. 거기 나오는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보면 어떨까요? 실학박물관이 정약용 것은 아니지만 정약용은 농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고 농사와 밀접하잖아요. 정국 : 나도 대충 들은 거지만 당시 농사법이 굉장히 과학적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을 재현해 보면 참 좋겠어요.
알록 : 배다리 앞에 있는 온실도 유리로 된 온실보다 먼저 발명된 온실이라고 알고 있어요. 엄청 과학적이에요.
현숙 : 맞아요. 창호지로만 만든 건데도 무척 과학적이래요.
정국 : 가만히 보면 옛날 농사짓는 그림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생활하는 모습은 많아도 소를 끌고 가는 정도밖에 못 본 것 같아요. 그런 그림을 모아서 스터디를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또 옛날 농기구가 사용하기 좋은데, 농기구도 연구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옛날에도 농기구 자체가 굉장히 과학적으로 만들어졌어요. 호미는 언제부터 사용된 걸까요? 옛날 사람들은 농사를 거의 호미로 지었거든요. 여성들은 다른 기구를 거의 안 써요.
현숙 : 맞아요. 호미 연구하는 사람이 나한테 왔었어요. ‘호미’ 그러면 나라고 하면서.
알록 : 호미 하나로 밭을 다 매고 그러시니까요.
정국 : 실학이 제일 중요한 게 그거잖아요. 말 그대로 실용적이어야 해요. 그냥 소중하다는 의식만으로는 안 돼요. 실용적으로 접근해서 사람들이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줘야 해요.
Q. 이 지역에 살면서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으실까요?

알록 : 첫 번째는 자기 땅이 없어서 농부가 떠나야 하는 거겠죠.
현숙 : 그건 진짜 심각한 문제죠. 젊어서 저축을 못해서 땅 한 평 없는 것에 자책을 하고 있지만, 만약 대출을 해준다고 해도 생애 내에는 못 갚을 거니까.
정국 : 임대로 농민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농지은행에서 농토를 빌리는 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경우가 없어요. 우리처럼 개인 땅을 임대를 받아서 농사짓는 사람은 농민을 안 만들어줘요. 그래서 법으로는 농민이 경작하게 돼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반 이상이죠. 그런데도 토지 소유자가 농민이 되어서 농민을 위한 모든 혜택을 받고 진짜 농사짓는 사람들은 아무 혜택도 받을 수가 없어요.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지만 이런 것은 개혁이 되어야 해요. 농민 자격이 법적으로 이상하게 규정되어 있으니까 토지를 임차한 농부는 농부로 인정을 못 받잖아요.
현숙 : 저저번 대선 때 고려하긴 했었어요. 토지를 달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토지개혁을 해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임대료 내고 농사짓는 사람도 농민으로 해달라는 거예요.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으면 농지를 갖지 않는 게 원칙이고 돈 있는 사람이 땅을 사고 그것을 임대하는 것을 허용하면 또 땅으로 투기를 하는 복잡한 상황까지 허락하게 되니까 정말 어려운 문제이긴 해요. 농토가 있어도 농지은행에 맡기지 않는 경우도 많고, 있어도 아주 먼 외지에요. 거기 가서 농사지으면 되지 않냐? 쉽게 말하기도 하지만 도시 접근성이 주는 장점이 있죠. 판매가 되어야 생활이 되니까요.
알록 : 저는 어쨌든 농사를 계속하고 싶어요. 소유자가 누구든, 농사를 지을수록 흙이 흙을 가꾸게 되잖아요. 흙이 좋게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아요. 도자기 흙이었던 것이 부드러워지고 정말 좋아졌어요. 저는 그렇게 계속 흙을 돌보면서 살고 싶어요.
그래서 뭔가 좀 길게 볼 수 있는 땅에서 매년 한 해, 한 해만 생각하고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진짜 10년, 20년 내다보고 농사를 한다면 얼마나 많은 것이 더 풍성하게 바뀔까 생각하게 되고 그런 것이 욕심이 나요. 이런 것이 주인의식일까요? 근데 농사뿐만 아니라 주거도 마찬가지예요. 이 마을에서 내가 10년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길 하나 내는 것에도 관심을 가질 거고, 나무 자르는 거에도 목소리를 더 낼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몰라요. 언제까지 농사를 지으며 흙을 돌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여기에 애정을 갖고 뿌리를 내리는 것이 너무 힘든 거죠. 그런 것이 아쉬워요. 더구나 농사는 땅하고 깊이 연결되어 있는 일이라 계속 고민이 돼요. 농사는 하고 싶은 일인데,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농사를 짓는 것이 다만 작물을 기른다는 의미만은 아니거든요. 매일 같이 이 공간 자체가 나를 키워준다는 생각도 들고 시간을 들일수록 진짜 관계가 계속되는 것을 느껴요. 하지만 시간이 쌓일수록 소중한 공간이 되어가지만, 앞으로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이…….
하우스 시작하면서 3년을 주선해서 관개시설도 하고 땅을 다 만들었어요. 그런데 딱 만들어놨더니 나가라고 했어요. 그게 다 애정이고 그게 다 관계를 맺은 시간인데, 그 공간에 소유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너 이제 그만해라.’ 이렇게 되니까……. 미래를 그리기가 어려워요.
Q. 농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현숙 : 내가 농부가 된 것이 너무 좋으니까 남들도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공동체로 사는 마음은 농부가 최고예요. 농부가 된 다음에 오히려 사람도 더 많고, 더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다른 분들도 그런 걸 느끼면 좋겠어요. 그래서 자꾸 초대를 하게 되나 봐요. 밭에 도와주러 오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요. 농부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함께 해야 나누기도 더 쉽고 더 넉넉해지는 것 같아요.
전업 농부가 아니어도 자기가 먹는 거 몇 가지라도 농사를 지어보겠다는 사람이 생겨나면 좋아요. 단 한 평이라도 거드는 것과 직접 해 보는 것은 다르거든요. 직접 해보면 농작물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고요. 가능하면 집에서 스티로폼 상자 하나라도 가꿔보라고 저는 씨앗이나 모종 같은 걸 나눠줘요. 사람들에게는 경작 본능이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난감해 하죠. 그러면서도 죽이지 않고 잘 가꿔요. 좀 넓은 데다 옮겨 심고 벌레도 잡아주고, 어린왕자처럼 막 고깔도 씌워주고 이렇게 되어가는 거죠. 다들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 너무 귀하게 가져가 주세요. 대표적인 것이 우리 마하키친이에요. 우리 홍보 대사인데 마하키친 요리사님은 진딧물 범벅인 배추도 너무 귀하게 가져가요. 그러기 쉽지 않은데 너무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저하고 인연이 한 5년 됐는데 그 5년의 인연을 가지고 심지어 ‘봉금의 뜰 오마주’ 막 이래가면서 프로그램도 만들고 그래요. 농부니까 그런 것도 가능한 거겠죠?
정국 : 일단 제일 큰 것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 환경이죠. 요즘 해마다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는데, 그걸 낮출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농사예요. 지구를 위한 일을 하면서 먹고 산다는 것이 보람이죠. 그리고 농사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요. 사람이 살면서 폐만 안 끼쳐도 잘 살았다고 하잖아요. 자기만족으로 보아도 농사만한 것이 없어요. 내가 한 만큼 결과가 나와요.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다 알아서 반응을 해줘요. 그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일이죠. 날씨가 왕창 안 좋아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살아남는 애들은 살아남아요.
현숙 : 신비예요. 애들이 웃어줘요. 이승환 노래 중에 ‘너에게만 반응해’ 이런 가사가 있는데, 내가 작물을 볼 때마다 나에게만 반응해요. 얘네가 반응하는 것을 알리는 게 너무 좋아서 사람들을 계속 부르고 오게 하는 것이기도 해요. 예전에 젊어서 단체에서 일할 때는 ‘세상을 구한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오히려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들하고 더 연대한다는 느낌이에요. 사람들은 와서 농부를 지원하고 농사일을 거드는 걸로 지구를 지키고 사람끼리 의지하는 일을 해내는 거죠. 힘들어도 그것이 보람있고 사는 의미 같은 거예요. 우리 기도문 중에 ‘도시와 농촌이 하나로 이어져’라는 구절이 있어요. 여기에서 나만 평화롭게 살겠다고 이기적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그것으로 오히려 더 이타적인 존재가 된 느낌이에요.
정국 : 맞아요. 저도 말하자면 운명적으로 부용밭을 맡았는데, 농부학교를 진행하고 또 농부학교를 나온 사람이 우리 동네로 이사도 와요. 농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매 기수에 한두 명이라도 꼭 있어요. 30명 이상이 같이 텃밭 농사를 짓고 있고요. 그것만 해도 크다는 거죠.
알록 : 저 같은 경우는 농사가 생활을 지지해 주니까 그런 시간이 충분히 만족스럽죠. 뭔가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내 밥상으로 바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떤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실질적으로 나를 먹이는 것이 좋아요. 생태계 속에서 ‘내가 이걸 좋아하는구나.’를 느끼거든요. 인간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생명의 작동법을 보고 배우는 게 좋아요. 그렇게 배우면서 세계가 넓어진다고 생각하고요.
문득 왜 농사는 ‘짓다’라고 말하는지 생각한다. 밥이나 옷이나 집처럼 인간 삶에 꼭 필요한 것에 ‘짓다’라는 동사가 결합하는 점을 생각하면 ‘농사’도 과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농사로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은 주객이 바뀌었다. 농사 그 자체로 모든 생명이 살아서 다 함께 행복해지는 꿈을 제안하는 가톨릭농민회 두물머리분회의 거대한 구상이 현실이 되기를 희망한다.
2025 실학박물관 지역활동가 아카이브 <모종의 발견>
조선 후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고민하던 학자들을 실학자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활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종의 발견>은 지역 곳곳에서 싹트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찾아 숨겨진 가능성과 가치를 세상에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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