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우물에 던지는 마음의 두레박

궁예와 억새밭, 명성산을 돌아보며


산정호수를 감싼 명성산은 왕건을 피해 도망친 궁예가 몸을 숨겼던 곳이다. 배가 고파 참을 수 없었던 그는 마을로 내려와 보리이삭을 잘라 먹었고 그러던 중 병사들에게 붙잡혀 최후를 맞이했다. 울음산이라고도 불리는 명성산(鳴聲山)은 그 지명이 자신의 최후를 앞둔 궁예의 울음소리가 산에 울려 퍼져 붙여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 명예롭지 못한 죽음을 맞이한 궁예라서 팻말의 사자성어조차 궁예분골인데 그 옆에는 다소 생뚱맞게도 궁예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사에 남아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비범한 인물, 궁예다.



명성산 억새바람길 전경. 사진=포천시


산정호수에서 궁예의 마지막 은신처, 명성산을 바로 오를 수 있다. 상동주차장에서 이어진 명성산 등산로를 따라 1시간 30분을 오르면 그 유명한 명성산 억새군락지다.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하얗게 피어 바람에 물결치는 억새 장관을 볼 수 있다. 이때가 명성산의 성수기다. 정상부에 가까운 지점에 나무 대신 억새가 자란 이유는 이곳이 6‧25전쟁 때 격전지여서 나무가 다 불탔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군사 훈련지로 이용되면서 나무를 심지 않았다. 명성산 주변에 군부대가 있어 현재도 산에서 군사 훈련이 진행되곤 하는데 그때마다 산 정상부 출입이 통제된다. 그러니까 명성산 억새군락지는 휴전국의 삼엄한 군사훈련과 선진국의 국민 여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장소인 것이다.



억새밭 한쪽의 궁예약수. 사진=포천시


억새밭 한 쪽에는 졸졸졸 흐르는 냇물을 받는 작은 물확이 있다. ‘궁예약수’란 팻말이 꽂혀있고 ‘궁예의 한을 달래주듯 눈물처럼 샘솟아 마른 적이 없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아쉽게도 음용할 수 없는 물이라 ‘궁예의 눈물’을 맛볼 수는 없다. 큰 우물 산정에서 들떴던 마음이 이 작은 샘물 앞에서 가라앉는다.



10~11월 하얗게 피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명성산 . 사진=포천시


자신을 따르던 충신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모든 지지 기반이 무너진 권력자의 마음으로 억새밭을 바라보면 인생은 무상하고 권력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회한이 밀려온다. 비단옷 대신 누더기옷을 걸치고 침소 대신 억새밭에 누워 무심하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궁예. 지나온 삶에 허무만 가득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생존 본능으로 마을로 내려와 허기를 달래다 결국 죽임을 당했다. 그의 비참한 말로를 안타까워해야 할까, 혹은 역사에 새긴 명징하게 새긴 이름에 찬탄을 보내야 할까.

궁예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가공의 인물로 만든대도 이만한 캐릭터가 또 없을 것이다. ‘지금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와 같은 드라마 속 궁예의 대사는 수년 째 밈이라 일컫는 인터넷 유행어로 사용된다. 드라마 <태조 왕건>은 2000년에 방영되어 궁예가 대중에 크게 알려지는 데 기여했는데 방영 20년이 지나도록 극중 궁예의 이미지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는 신라 말 백성들에게 널리 퍼졌던 미륵 신앙을 이용해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했다. 해서 누구든 마음까지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자신한 기인(奇人)이다. 민심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힘이 그를 태봉의 군주로 추대했을 것이다.



명성산 억새밭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포천시


억새군락지부터 명성산 정상(922m)까지는 2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정상은 궁예의 나라, 태봉국의 수도 철원성이었던 철원에 속한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의 팔각정에서 산정호수가 한눈에 보인다. 손 하나로도 가려지는 호수는 두레박 하나 내리고 싶은 작고 고요한 우물과 같다. 호수에 붓을 콕 찍어 하늘에 덧칠해보고도 싶다. 산정호수도 명성산도 내게는 동화(童話)와 같은데 궁예와 6‧25전쟁 참전군인들에게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사지(死地)였으리라. 그편에 서서 생각하면 풍경에 반해 지었던 미소가 그만 겸연쩍다.


글 여행작가 유승혜

사진 포천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50만 살의 청춘 -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포천시 : 자연 속의 인간, 인간 손의 자연>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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