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존재의 곁

화성_디황 작가의 작업실







서울에서 태어나 뉴욕 파슨스 스쿨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디황 작가는 회화, 조각, 사진 뿐 아니라 커스텀 모터사이클 빌드와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전방위적인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1995년 뉴욕 플리아디스 갤러리에서의 그룹전을 시작으로 2002년 헬로아트 갤러리, 2008년 동경 유코보 아트스페이스, 2011년 독일 뒤셀도르프 본프라운버그 아트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2008년 독일 쾰른 아트페어 21, 2009년 서울 KOSID 디자인 페어 등 아트페어에도 꾸준히 참가하였다. 디황 작가의 작품은 영동제약, 프리마 호텔, 한국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어떤 대상의 옆이나 공간적, 심리적으로 가까운 데를 뜻하는 ‘곁’은 나와 타인에 대해 동시에 이야기할 수 있는 단어다. 예를 들어 ‘곁’이란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 표현 중에는 ‘곁을 내어 주다.’와 ‘곁을 떠나다.’가 있다. 이 두 예문은 서로 상반되는 상황을 보여 주지만, 이 안에 자신의 이야기와 상대의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기도 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 줌으로써 나는 누군가를 얻고, 그 누군가는 나를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나의 곁을 떠남으로써 누군가는 (적어도 현생에서의) 나와의 대면을 이어 갈 수 없고, 나 또한 그렇게 된다.


예술의 길에 이 곁이란 개념은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예술이라는 대상 자체를 탐색하는 과정에 곁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까닭이다. 하나 예술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만들어 간 예술의 여정에 곁이 분명히 있었다고 말한다. 그 곁에는 내가 아닌 사람, 나의 말이 아닌 말과 나의 삶이 아닌 삶이 존재했고, 그 때문에 혹은 그 덕분에 자신의 예술과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었노라 고백한다. 이렇게 곁은 외부를 향해 열려 있는 공간이자 그와 연결된 선상에서 내부를 채워 나가는 힘이 된다.


디황 작가는 누구보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끈질기게 제기해 왔다.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의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며, 그 존재의 이유를 어떻게 찾아갈 수 있는지 묻고 또 묻는다. 작업을 통해 이에 접근하는 디황 작가는 마치 존재에의 물음이 단순한 사춘기의 열병으로 끝나거나 생의 중요한 순간에 의해 한꺼번에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새로운 것을 향해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21세기에 우리의 곁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건지, 디황 작가의 작품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디황 작가의 작업실 2층에는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어

뉴욕 활동 당시의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확인할 수 있다.



방사형(放射形)의 시간


정통을 고수하는 작가들 또한 끊임없는 실험과 파격으로 자신을 깨부수고 정통을 무시하고 점프해 버린 자들의 방법을 습득하고 연구하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모든 것에 있어 전방위로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자가 진짜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다.


– 작가 노트 중에서




디황 작가는 90년대 초반 군 복무를 하며 당시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폭력성을 경험한다. 폭력이 가지는 야만성과 후진성으로부터,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한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는 1년간의 유학 준비 끝에 뉴욕행을 감행한다.


1993년의 뉴욕은 꿈틀거리는 욕망 그 자체였다. 거대한 자본과 그를 자양분으로 삼은 취향공동체는 풍요로움의 끝을 보여 주는 듯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만의 내일을 꿈꾸던 당시의 뉴욕은 하이퍼(hyper) 한 기운을 끝없이 뿜어내며 한국에서 온 젊은 예술학도를 언제든 영웅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도시의 화려함을 한 꺼풀 거둬 내고 나니 자본주의의 추악한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보다는 돈이 앞섰고, 고요함의 자리는 분주함이 대신했다. 뉴욕의 중심부를 누비던 작가는 이내 뉴저지로 터를 옮겼다. 포악하고 후진적인 것으로부터 도망쳐 온 곳이었지만,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파라다이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나름의 추악함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도피하는 것을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디황 작가가 걸어온 시간은 방사형이다. 곧게 난 외길이라기보다 거미줄처럼 퍼진 각각의 길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방사형의 시간 안에는 부침의 능선이 자리 잡고 있다. 작가를 그만두기로 한 몇 번의 시기가 있었고, 미술 작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극단적인 회의감에 사로잡힌 것도 여러 번이었다.


“미국에서 귀국할 때, 더 이상 미술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만들었던 작품도 거의 다 불태우거나 버렸고요. 미술 자체가 재미없었던 것도 있고,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미술이 나오지 못하고 모두가 그저 헤매는 것으로만 보였거든요. 회화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시각을 지배했던 게 사실이지만 사진이 등장하고 난 이후에 설 자리를 잃었다고 생각해요. 만약 다빈치가 살았던 시대에도 영화라는 매체가 있었다면 그도 당연히 회화 대신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현대 미술이 갈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즈음 디황 작가는 자신 또한 미술을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 우연찮은 기회에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그룹전을, 헬로 아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달아 열게 되었다. 미국에서 가지고 온 작품이 거의 없던 터라 전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새로 작업해야 했다. 개인전을 위해 목탄으로 그렸던 작품들을 컬렉터가 모두 사들이는 등 반응도 상당히 좋았다. 그렇게 작업을 재개하는 듯했으나 이내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다시 작가 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은둔 생활을 이어가던 중에 오토바이 사업을 하는 한편,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사업을 하면서 만들었던 커스텀 바이크는 국내외에 마니아층을 형성할 정도로 상당히 인정받았다. 그래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던 것일까? 디황 작가는 2007년 다시 미술계로 돌아왔다. 작업 활동을 재개한 후 평단과 미술 시장 모두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작품 판매도 꾸준했고, 그를 정기적으로 찾는 컬렉터들도 상당수였다. 미술 시장의 적극적인 러브콜 덕분에 작품 활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지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컬렉터들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자본의 논리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대로 간다면 작업의 영속성도 개성도 모두 없어질 것만 같았다. 다시 자신을 찾는 게 중요했다.



구도자적 성찰


나는 철저히 자신에 대한 고찰로부터 작업을 진행하는데 이에 대한 표현 방식으로 다양한 장르를 차용하고 또 이를 서로 ‘믹스’한다. 가장 우선은 나 자신의 현재 상태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다. 그리고 정해지면 거기에 맞는 기법을 사용한다.


– 작가 노트 중에서



〈Dead Flower〉, 130×161.5㎝, Oil on Canvas, 2014



디황 작가를 설명하는 것은 여러모로 도전적이다. 그가 일련의 작업에서 가졌던 주제 의식의 스펙트럼이 넓을 뿐 아니라, 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 또한 자유롭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작가는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작가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 다져진 작가의 시각이 쉽사리 설명될 수 없기에 난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가 누군가를,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비로소 존재의 겉면에라도 당도하는 것이라 위안을 삼아 본다.



〈Ivory black_2〉, 130×161.5㎝, Oil on Canvas, 2014



디황 작가는 순수미술을 전공했지만 2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회화, 사진,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작업해 왔다. 추상 시리즈인 〈ABSTRACT 37-1〉, 사실주의 화풍의 〈REALISM 37-1〉과 같은 회화 작업에서부터 산업과 순수예술의 접점을 탐구하며 ‘산업 표현주의’라 명명한 〈GARAT〉 시리즈, 그리고 최근에 이루어진 영상 작업인 〈프리드리히의 방〉과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완성한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적합한 작업 방식을 매치하는 데 탁월함을 보여 주었다.


“작업은 그때그때 여건이 되는 것으로 선택해요. 내가 보려 하는 게 확실하기 때문에 매체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올가을에 끝낸 자화상 작업도 3개월 이상 매달렸는데요. 서서히 늙어 가는 나의 외형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극사실적인 표현이 맞다고 봤죠. 앞으로 10년 주기마다 나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 어떨까 계획하고 있어요. 40년, 50년을 산 사람의 거죽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표현하는 기회가 되었어요. 어차피 자화상 안에는 내가 없다고 봐요. 그냥 나라는 사람의 거죽이 있을 뿐이잖아요.”

이 같은 작가의 복합적인 사고와 유연성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저만치 떨어져 관조함으로써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디황 작가의 삶에서 사색과 성찰은 때때로 작업 자체보다 더 넓고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작가 또한 스스로 미술보다는 철학이 더 맞는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Old Man in Hospital Bed〉, 162×130㎝, Oil on Canvas, 2016



“젊은 시절에는 책을 많이 읽었어요. 사색도 많이 했고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책과 지식, 철학과 자연스레 이별을 하게 됐어요. 그때 그것을 주제로 한 작업도 남겼고요. 내가 작업하는 데 있어 책과 지식은 좋은 영감을 주었고 또 좋은 스승이었지만 그 관계도 ‘여기’까지였음을 말하는 시점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요새는 예전만큼 책을 읽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하게 되는 생각들을 곰곰이 되짚어 봐요. 과거에 예민하고 촘촘했던 사고에서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 할까. 그렇게 보면 철학의 끝 또한 단순해지는 게 아닐까 해요. 생의 맨 마지막에서는 단순한 단계, 말하자면 순수의 경지에 오르는 단계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날 예술가가 된다고 하는 건 구도자가 된다는 것과 비슷할 거라 생각해요.”






현대의 예술/가


디황 작가가 천착했던 작업의 주제들은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맞닿아 일종의 대칭을 이룬다. 모든 예술가의 작업이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토록 깊고 투명한 상태로 삶이 작업에, 또 거꾸로 작업이 삶에 투영된 경우는 드물다. 이 같은 입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철저한 자기 성찰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미술계, 나아가 세상을 관통하는 시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오늘날은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는 시대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미술이 오히려 자기 모습을 상실한 걸 수도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미술이 과연 일반 대중에게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해요. 요새 내가 주장하는 바는 미술이 원시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거예요. 왜 미술이 자기 본연의 성질을 잃고 자꾸 다른 것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해요. 개인적으로 미술이 스스로를 놓치는 게 작가들이 자기를 기만하거나 게으름을 그럴싸하게 위장하기 때문이라고 보는데요.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재능과 테크닉이 있어야 하고, 더불어 세상을 통찰하고 그것을 관조할 수 있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근 작업에서 사실적인 묘사에 공을 들였던 것도 일종의 전통에 대한 오마주였고요.”




매체를 넘나들며 당대의 미술이 전달해야 할 메시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디황 작가의 시도는 현대성 그 자체를 구현하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지금 발 디디고 있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우리와 대화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귀띔한다. 자못 도전적인 그의 작업 세계를 통해 현대미술이 내포한 가능성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글_강보라(영상학 박사, 독립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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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창작공간이자 때로는 도전적이고 개방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끊임없이 진화해 온 창조적인 장소, ‘예술가의 작업실’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옆집에 사는 예술가》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자산인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예술가의 일상을 공유하는 대중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해 온 경기지역 예술가들을 만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