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나를 보다 당신을 보다

화성_안재홍 작가의 작업실




중앙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한 안재홍 작가는 2002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나를 본다’라는 주제를 큰 줄기로 해마다 유수의 미술관에서 다수의 개인전 및 단체전을 가져왔다.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미술관 등의 기관이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지난 6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2017 서울국제조각페스타》에서는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였다.




〈나를 본다〉, 170×70×215(h)㎝, 동파이프 무수축 그라우트, 2017



“나에게 있어 작업은 ‘나를 본다.’에서 출발한다. 존재론적인 나의 삶, 현실 속에서 자의나 타의로의 속박, 그 속에서 꿈꾸고 있는 나 자신을 작품화한다.”

– 작가 노트 중에서



지난 6월에 열린 《2017 서울국제조각페스타》(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영예의 대상은 안재홍 작가에게 돌아갔다. 이어 수원에 자리한 혜움미술관에서는 안재홍, 김은주 작가의 2인전이 열렸다.(《선과 매체의 조응》전) 9월 18일 MBC 문화사색 프로그램에서도 우리는 안재홍 작가의 작품과 작업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방송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어느 해보다 안재홍 작가의 작품들이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깊고 넉넉한 존재감에 있는 듯하다. 물론 그 존재감은 아주 오랜 인고의 시간을 거쳐 작품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안재홍 작가의 조각은 감상자를 사색의 시간으로 데려간다. 그러고는 나를 보라, 당신을 보라, 자연을 보라 한다.


안재홍 작가는 다양한 굵기의 구리, 철 등 금속의 선을 구부리거나 압축하고 거기에 나무, 돌 등을 결합하여 인간의 다양한 형상을 재현해 왔다.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화두는 자연 속에서 ‘성찰하는 인간(人間)’이다. 작가가 조각한 인간의 형상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세월을 인내하며 자라듯, 자기를 향해 찬찬히 고개 숙여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를 보며, 자란다.’ 작가의 주요 오브제인 버려진 동(銅)선 다발은 성찰하는 자아의 몸이 되어 감상자로 하여금 본다는 것, 자란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나를 걷게 하고, 삶의 무게를 견디며, 내면을 응시하는 겸허한 행위. 그 소중함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동이라는 재료는 인간의 혈관처럼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힘의 수단이자 원천이다.



〈나를 본다〉, 200×200×15㎝, 동파이프, 구리선, 2009



조용히 천천히 안에서 바깥으로


시골에서 자란 안재홍 작가는 중고등학교가 같은 운동장을 쓰는 아주 작은 학교에 다녔다. 그리 부유하지 않은 집안이어서 화실을 다닐 여건이 되지 않았고, 심지어 고등학교에는 미술 선생님도 따로 계시지 않았다. 고3 때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미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던 조용한 아이는 어느 날 교감 선생님을 찾아간다. 그분이 대학 때 조각을 전공했다는 걸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작품을 만들어 보여 드릴 테니 이른 아침이나 방과 후에 틈틈이 살펴봐 달라는 당돌한(?) 요청을 드린다. 선생님은 흔쾌히 승낙하시고 이후 작업을 지켜봐 주시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노력 끝에 조각과에 들어간 안재홍 작가는 평면보다 조각이 본인의 성격과 잘 맞았다고 한다. 그렇게 조각과 함께하는 시간이 시작되어 오늘까지 한결 같은 세월을 함께했다.


안재홍 작가는 지금까지 9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 작가의 작품에서 인물의 형상은 조금 음울한, 눌려 있고 엉거주춤하며 억압된 포즈가 주되었다. 당시에는 가느다란 구리선으로 깊이감 있는 인체를 제작했는데, 사용하는 구리선이 가느다랗고 용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상을 잡기 위해 뭉치고, 고정시키기 위해 결박하는 작업을 취했다. 이러한 표현의 방식은 나 자신이 어딘가에 결박되어 있다는 인상을 전달하는 데에는 적절했다. 당시에도 형과 부피를 지닌 인체를 조각하긴 했지만 가는 선을 사용했고, 작가는 그 선으로 드로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살려내고 싶었다. 이후 작가는 보다 굵은 구리선을 사용하고 용접 기법을 사용하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형(形)과 시선이다. 처음 작가의 조각에서 보이는 나는 고개 숙이고 안으로 몸을 웅크린 채 내 안으로 침잠하는 나, 사색하는 나, 나를 바라보는 나의 형상을 보였다. 그러다 그 형상이 조용히 천천히 변하기 시작한다. 안으로 향하던 형상이 허리를 펴고 우뚝 서거나 걷고, 바깥을 향해 나아가더니, 이윽고 새가 보이고, 시시로 누군가가 곁으로 와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을 보인다. 작가는 선적인 요소로 나무를 형상화하고 머리는 언제나처럼 생략하였다. 작가의 시선은 이렇듯 안에서 바깥으로, 자연으로, 타인으로 옮겨 가며 여전히 성찰하며, 세상을 향해 자라며, 나아갔다.



〈나를 본다-자라다〉, 구리선, 2005



조각은 ‘나’라는 존재를 사유하는 나무


작가는 보통 약 2미터의 크기로 작품을 제작하는데, 그전에 작은 모형을 만들어 대강의 구상을 진행한다. 그러고 난 뒤 여러 번의 반복 작업을 통해 구리선을 용접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이어 그 동선 자체가 인위적 조작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스로 부식되기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이어지면 부식이 진행된 구리선에서 나무가 자라고 새가 날아올 것이다. 안재홍 작가는 이제껏 일관되게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 왔다. 그래서 작가가 만드는 모든 형상은 그 자신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규정되지 않은 어떠한 것을 잡아내기 위해 작가는 작업실 안을 늘 서성거린다.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의 지금 상황은 어떠한지를 살피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가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이제는 그것을 풀어내 만들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작업을 시작한다. 그래서 작가는 작업실에 있어야 언제나 마음이 편안하다. 이곳에서 오랜 동안 시간을 보내며 그는 날마다 날마다 작업한다.


 

안재홍 작가의 작업실 내부 전경.



안재홍 작가의 작업실로 가는 길목의 풍경.


안재홍 작가의 작업에서 중심을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은 자연이다. 작가가 구상해 내는 인체에는 나무의 형상이 자주 들어온다. 어찌 보면 나무인 인체의 형상이다. 때로 그 나무가 나인지 내가 나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형상도 볼 수 있는데, 이 합일의 모습은 최근 작업에서 자주 살필 수 있다. 나무라는 모티프가 작업에 들어오게 된 어떤 계기가 있을까. 아이를 낳고 기르던 시기에 안재홍 작가는 작업을 하지 못했다. 그 공백의 시기는 엄마로서는 행복한 경험이지만 작가로서는 아마도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재우려 집 안을 서성이던 어느 날, 창밖에 보이는 느티나무가 비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나무가 작가에게는 마치 ‘나 여기 있다.’고 아우성치는 듯했다고 한다. 그 경험 이후 내가 가슴에 품은 이야기에 나무의 강인한 에너지가 더해져 작품에서 서로 만났다. 그래서 안재홍 작가의 작품에서 자연은 언제나 위안과 힘을 주는 이미지로 드러나며 사람들과 조화롭다.




보고 듣고 느끼는 향연


지난 9월 23일 토요일 오후, 벚꽃마을 앞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안재홍, 안택근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근사한 중절모를 쓴 안택근 작가가 마중 나와 다 같이 산책을 시작했다. 작가는 이 마을이 왜 벚꽃마을인지, 최근 개발로 인해 인근 벚꽃나무의 절반이 베어졌다는 안타까운 이야기, 주변에 알게 모르게 피어 있는 야생화들의 꽃말과 생김새, 이름 모를 벌레들 등 작업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자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생동감 있게 들려주었다. 그렇게 5분여 걸어 오르니 두 작가가 함께 쓰는 작업실 입구가 보였고, 그 앞에서 안재홍 작가가 활짝 웃으며 모두를 반겼다. 이어 작업실로 들어서자 꼬마 손님들이 1층 공간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여러 형태의 구리선들과 용접 및 절단 기자재들, 그리고 안재홍 작가님의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어서 호기심 어린 눈길이 여기저기 살피기 바빴다. 이어 2층으로 올라가 안택근 작가님의 작업실을 둘러보았는데, 그곳 역시 작업실인지 전시실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감상하고 싶은 전경들이 펼쳐졌다. 특히 안택근 작가의 작업 공간을 빙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탱자나무 가시는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작가는 지난 1년간 그 안에서 작업하게 된 사연을 들려주고, 몇몇 참여자들이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어 모두는 안택근 작가님의 설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야외 정원으로 나갔다. 저녁과 함께 이날의 하이라이트라 할 국악 공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악인이자 영화배우인 서승원님의 사회로 진행된 공연에서 가야금, 북, 대금 연주가 흥겹게 시연되었고, 북 장단에 맞추어 정지혜 국악인의 흥겨운 판소리 가락이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지며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조각과 다양한 설치 작품과 우리 국악과 자연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시간들. 참여자 한 분이 오늘의 감흥에 대해 “전부 다 좋았는데 음식마저 좋더라.”라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예술 작업을 함께하는 동료이자 부부이자 그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잘 아는 안재홍, 안택근 두 작가의 인품 덕분에 모두는 자연 속에서 넉넉하고 풍성한 가을 정취를 느끼고 돌아갈 수 있었다. 국악의 흥겨운 한 자락이 여운을 남기면서.


안재홍 작가는 화사하고 풍성한 여름, 가을의 나무보다 에너지를 응축해서 품고 있는 겨울나무를 사랑한다. 에너지를 품고 있는 겨울나무의 모습은 화려하지도 밝지도 않지만 언제나 제 모습으로 저답게 꿈을 꾸고 사유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잃지 않으며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기도 하고 때로 치유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며 느껴지는 기운. 작가 자신이 작업을 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위안을 받고 그 속에서 치유가 되었듯이, 자신의 작품을 경험하는 이들에게도 울림을 주고 싶다. 큰 울림이 아니어도 좋다. 겨울나무를 바라볼 때 마음 따듯해지듯 그 정도의 울림을 전하고 싶다.





“나의 작업은 선을 통해 흐르고, 자란다. 한 덩이의 몸에서도 한 올 한 올이 생생히 살아 있기를 바랐고, 작업이 진행되면서 선적인 요소가 더욱 큰 의미로 작용된다. 삶의 많은 시도와 시행착오로 그어진 흔적들이 무수히 많은 선으로 남아 있다. 마치 여러 갈래의 길이 오가는 발길에 의해 그어지듯 의지를 품고 자라 뻗어 나아간다. 몸의 굴곡을 따라 자라며, 줄기는 핏줄과도 같고 욕망을 키워 주는 강인한 힘줄이기도 하다. 자연과 벗한 작업 환경 속에서 시선과 온 마음을 사로잡는 나무들이 있다. 내 속엔 생각의 갈래들이 서서히 자란다. 선들의 엇갈림과 뒤엉킴 속에서 마음이 자라 나무가 된다. 나무가 되고 숲이 된다.”

– 작가 노트 중에서



글_이정화(미술비평, 독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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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창작공간이자 때로는 도전적이고 개방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끊임없이 진화해 온 창조적인 장소, ‘예술가의 작업실’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옆집에 사는 예술가》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자산인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예술가의 일상을 공유하는 대중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해 온 경기지역 예술가들을 만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