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실학의 형성과 전개, 천문과 지리 - 2. 실학의 전개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실학은 학파로 발전했다. 18세기 전반기의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2)을 종장宗匠으로 하는 중농학파(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 18세기 후반기의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1737∼1805)을 중심으로 하는 중상학파(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 19세기 전반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주축으로 하는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가 바로 그것이다. 중농학파(경세치용파)는 국가체제의 개혁을 위한 제도개혁을, 중상학파(이용후생파)는 상업의 진흥 및 기술개발을, 그리고 실사구시파는 학문 방법에서 옛날 기록이나 비석 등의 유물을 증거로 내세우는 실증을 각각 중요시하였다. 실학의 주요 학파는 조선 사회의 개혁을 지향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목표는 현실 생활과 밀접한 학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서 종래 중국 중심의 학풍을 버리고 조선에 대한 연구의 학풍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조선의 언어·역사·지리·산업 등을 연구하는 조선학朝鮮學이다. 비슷한 때에 중국에서는 고증학考證學이, 일본에서는 고학古學이라는 학문이 발전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실학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학문으로, 동아시아가 서양 세력에게 개항된 이후 모두 서구 문화를 수용하는 주체가 되었다.


성호집 星湖集

조선 최고의 경세가經世家로 평가되는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2)의 시문을 실은 저술이다. 조카인 이병휴李秉休(1710~1776)가 정리하였다. 그의 학문 태도는 근면과 엄격한 규율을 중시하였으며, 정치의 기본은 민생의 안전과 백성의 보호[保民]에 있다고 파악하고 이를 위한 다양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성호 이익은 조선후기 실학의 비조鼻祖이면서 동시에 경세치용파의 종주宗主였다. 그는, 18세기 전반기 근기지방인 안산安山에서 활동하였는데, 서울을 통하여 들어오는 서양의 문물을 왕성하게 흡수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당시 집권층의 이념적 도구로 타락한 성리학 및 예학 중심의 주자학과 대립하면서 현실적으로 국가경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역사, 지리, 정치, 경제, 군사 및 학교 등의 현실생활에 쓸모 있는 학문에 관하여 널리 연구하였다.


성호집星湖集 은 부賦‧시‧악부樂府, 서書, 잡서雜著, 기記, 발跋, 논論‧명銘‧잠箴‧찬贊‧송頌, 축문 祝文‧제문祭文, 비碑‧묘표墓表‧묘갈‧묘지명, 행장‧행록‧유사遺事, 전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성호의 악부樂府 와 학문토론의 마당이 된 편지글인 서와 잡서雜著가 주목된다. 유가儒家 경전, 성리설, 예설, 역사, 폐정 개혁 등에 대한 논변들이 다양한 양식으로 실려있다.


그의 학문태도는 근면과 규율을 중시하였으며, 정치의 기본은 민생안정과 백성보호[保民]에 두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경세치용학의 종주인 이익의 생활, 문장, 학문, 사상의 전반적 내용이 담겨 있는 가장 종합적인 문헌이다.



목민심서 牧民心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저술한 ‘정법삼집政法三集’ 중의 하나이다. 수령의 행정지침서로서 현행법을 전제로 행정의 개선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임관정요臨官政要』, 『목민대방牧民大方』 및 『치군요결治郡要訣』과 같은 목민서牧民書 중의 하나이나, 『목민심서』가 일반의 목민서와 다른 점은 전자가 수령칠사守令七事 즉 수령이 수행해야 할 중요업무를 중심으로 간단히 서술되어있는데 대하여, 『목민심서』는 육관六官 체제를 중심으로 부임에서 해임에 이르기까지 수령이 수행해야 할 일을 체계적으로 서술한데 있다. 동아시아의 목민서牧民書로서는 최고봉이 아닌가 한다.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集大成한 학자이다. 16세 때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저술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23세 때에는 이벽李蘗을 통해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28세 이후 관직에 나아가서는 국왕 정조正祖를 도와 실학의 이념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저술한 '정법삼집 政法三集'중의 하나이다. 다산이 강진 유배 18년 째인 1818년에 이 책을 완성하면서, '심서心書'라고 한 뜻은 "목민할 마음은 있었지만 실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목민에 대한 그의 구상과 계획은 15년 동안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가 견문을 넓히고, 스스로 암행어사‧찰방‧부사를 지낸 지방행정의 산체험을 바탕으로 평생동안 생각해온 문제였다. 그래서 이 책은 다산사상의 성격을 그대로 지녔으니, 관官의 입장이 아닌 민民의 편에 서서 관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고발‧탄핵‧경계하였다.


박지원은 조선후기의 이용후생파 실학자이자 한문단편 작가이다. 그는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이용후생파를 주도하면서 당시에 팽배해 있던 북벌론北伐論 및 양반의식 등의 사회적 허위의식을 극복하고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쓸모 있는 학문을 지향 하려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선진적인 문화를 수용하여 조선의 문화를 부흥시키자는 북학론北學論 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용후생학과 북학론이야 말로 당시의 개혁‧개방사상이었던 것이다.


1780년의 연행燕行 경험을 정리해 놓은『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같은 개혁‧개방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하일기』에는 청나라의 문물제도와 사회경제 체제 등이 사행로使行路를 따라서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 중국의 성제城制 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 관련 사항뿐만 아니라,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등도 소개되었다. 아울러 당시 세계정세를 거론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두기도 하였다.


연암집 (열하일기 熱河日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1780년에 청나라에 다녀온 뒤 남긴 저술이다. 청나라의 문물제도와 사회경제 체제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그곳의 문인․명사들과의 교유하여 그 소감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는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거두로 선진 외국 문화‚ 제도의 도입을 적극 주장하였다.



박지원은 조선후기의 이용후생파 실학자이자 한문단편 작가이다. 그는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이용후생파를 주도하면서 당시에 팽배해 있던 북벌론北伐論 및 양반의식 등의 사회적 허위의식을 극복하고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쓸모 있는 학문을 지향 하려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선진적인 문화를 수용하여 조선의 문화를 부흥시키자는 북학론北學論 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용후생학과 북학론이야 말로 당시의 개혁‧개방사상이었던 것이다.



연암집 燕巖集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지은 농서農書이다. 복거卜居, 섭생, 치농治農, 치포治圃 등 농업활동에 필요한 지식은 물론 농촌생활에 필요한 모든 관련 지식을 총 정리하였다. 필사본만 전한다. 박물지博物志 성격의 저술로, 농가農家를 위한 경제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유중림柳重臨, 서유구徐有矩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실학은 본래 관념적인 학문을 지양하고 인민들의 실實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지향하였기 때문에, 실학의 전개는 자연히 조선의 역사, 지리, 언어, 정치, 경제 및 문화 등에 관한 연구 즉 조선학으로 발전하였다. 조선학의 전개는 지금까지 중국중심의 학문에 매몰되어 있던 학문을 조선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으로 크게 전환시켰다.


조선학에 관한 연구는 농서연구에서 특히 활발하였다.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는 박세당의 『색경穡經]』, 우하영의 『천일록千一錄』 및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등과 함께 조선농서 시대를 활짝 열었다. 조선후기에 이르게 되면 곡물 경작법 뿐만 아니라 목면木棉 재배법을 포함하여 채소, 식목植木등의 재배법도 정리한 종합농서들이 등장하였다. 종합농서로서의 면모는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가 편찬되면서 확연히 나타난다. 『산림경제』의 등장이후 조선후기 농서들은 이 책을 저본으로 삼고 이를 증보하는 방식으로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최한기준호구 崔漢綺準戶口

1852년 한성부漢城府에서 조사한 최한기崔漢綺(1803∼1877)의 호구와 관련한 기록이다. 당시 그는 50세로 한성부의 서부西部인 양생방養生坊 송현계松峴契에서 살고 있었으며, 아들인 유학 병대炳大 내외와 약간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실학자, 과학사상가인 최한기崔漢綺 의 호구와 관련된 기록이다. 최한기는 유교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은 기氣철학을 바탕으로 서양의 자연과학을 받아 들여 운화기運化氣라는 독자적인 이론을 정립하였으며, 서양의 학문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책을 저술하였다. 실학의 어느 계파에도 닿지 않으면서 저술로 과학적 문명사회를 지향한 최한기는 우리 역사 전환기에 '실학과 개화사상의 가교자'로 평가받는다.


소모 素謨

최한기崔漢綺의 초기작인 '소모素謨'이다. '소모素謨'는 "일정한 직위가 없는 소인素人의 처지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세상을 경영하는 방안을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경전經典과 사적史籍을 토대로 역대 치란治亂 을 살펴보고 시의時宜를 파악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방안을 정리하고 있다.


혜강잡고 惠崗雜稿

혜강잡고惠崗雜稿 는 최한기의 문집 초고에 해당하는 저술이다. 다산 정약용 등 실학자들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개화사상에 연결시키는 교량적 역할을 했던 그의 생활과 정황을 담아둔 것으로, 최한기 연구에 기초자료중 하나이다. 서序, 기記, 설說, 제문祭文 등이 잡박한 형태로 실려있다..



상고도회문의례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1807∼1877)의 초기 사상과 학문을 집대성한 저술이다. 평소 박규수가 숭모崇慕하여 벗 삼고 싶어 한 역대 중국의 뛰어난 인물들에 관한 글을 폭 넓게 발췌하고, 그에 의거하여 벗들과 함께 놀이 삼아 의고문擬古文을 짓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한 저술이다.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 박규수는 박지원朴趾源 의 손자로서, 북학北學사상을 계승하여 개화기開化期에 앞서 개국통상론開國通商論을 펼쳤던 인물이다. 그는 박지원이 세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풍을 계승하여 개항開港을 통해 우리나라를 근대국가로 전환시키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약용, 서유구 등 실학의 선배들을 사숙한 그의 학문은, 문인 김윤식이 지적한 바와 같이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 고고考古, 의기儀器, 잡복雜服 등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여 정확하고 실사구시하지 않은 바가 없고, 규모가 광대하고 논리가 미세 정밀한 실학파의 학풍"이었다. '실학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의 전환'이 그의 역사적 위상이다.


상고도회문의례는 박규수의 초기 사상과 학문을 집성한 저술이다. 평소 박규수가 숭모崇慕하여 벗삼고 싶어한 역대 중국의 뛰어난 인물들에 관한 글을 폭 넓게 발췌하고, 그에 의거하여 벗들과 함께 놀이 삼아 의고문擬古文 을 지어보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박규수간찰 朴珪壽墓誌銘盒

1872년(고종 6)에 박규수朴珪壽(1807∼1877)가 진하사進賀使의 정사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과 함께 연행燕行을 준비하면서 연재淵齋(성명 미상)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는 두 번째 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사행으로 박규수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목격하고, 개국과 개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편지는 1872년(고종6년)에 박규수가 진하사進賀使의 정사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 과 함께 연행燕行을 준비하면서 연재淵齋 윤종의尹宗儀 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는 두 번째 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사행으로 박규수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과 개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박규수간찰 朴珪壽簡札

박규수朴珪壽(1807∼1877)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듬해에 용강현령으로 재직하고 있던 1849년(헌종 15)에 형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청나라 사신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에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는 시국에 대한 일과 서양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용강현의 위치를 서울과 비교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에 따르면, 용강龍岡은 한양과 비교하여 위도가 2도가 높은 39도로 여름과 겨울의 길이가 차이가 있고, 또 연경燕京과 비교하여서는 경도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서양과학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규수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듬해에 용강龍岡현령으로 재직하고 있던 1849년(헌종15)에 형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청나라 사신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에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는 시국에 대한 일과 서양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용강현의 위치를 서울과 비교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에 따르면, 용강龍岡은 한양과 비교하여 위도가 2도 높은 39도로 여름과 겨울의 길이가 차이가 있고, 또 연경燕京과 비교하여서는 경도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서양과학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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