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역사문화유산원

2. 태조 왕건과 고려 건국 이야기


이 글은 경인일보에 실린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 시리즈 입니다.


  태조 왕건(王建)은 918년에 고려를 건국, 후삼국으로 분열된 혼돈 속의 천하를 통일하고 새로운 시대 질서의 방향을 제시했으며, 황제국체제와 ‘해동천하(海東天下)’(후술)의 형성에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왕건이 활동한 시대는 신라 각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 무정부 상태의 약탈과 살육이 광범위한 지역을 휩쓸던 난세(亂世)였다.



● 농민반란 '민생파탄' 수습, 호족세력 설득으로 윈윈 통합


  당시 시대적 당면과제는 신라의 지배력 붕괴를 초래한 두 가지 사안의 해결이었다. 하나는 신라 사회를 순식간에 붕괴시키고 농민반란의 원인이 된 ‘민생파탄’을 수습하고 수취체제의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각지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층인 호족세력들을 통합하고 그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형성하는 것이다. 두 현안의 해결 방향을 찾지 못하면, 견훤과 궁예처럼 사회적·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기 어렵고, 분란과 패망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왕건은 현안에 대한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그것과 밀착된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는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각된 각 지역의 호족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세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설득과 타협에 노력하였다.


  그 타협은 중앙정부와 호족 양쪽이 윈윈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러기 위해 새로운 사회 질서로 나아갈 정책 실행의 기준 및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었다.



● 동아시아 선진정치 중심 '유교이념' 정책 실행 기준


  그 기준과 방향 설정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당시 동아시아 선진정치문화의 중심요소인 ‘유교정치이념’이었다.


  왕건은 즉위 초부터 학사(學士)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것이 기록에 나타나며, 새로운 성격의 관부인 내의성(內議省)을 설치하였다. 내의성은 왕에게 정치적 고문 역할을 하고, 간쟁(諫諍)을 담당하는 유교정치이념을 실현하는 기구였다.


  왕건의 후삼국통일은 단지 통일신라의 회복에만 그치지 않았다. 왕건은 즉위한지 네 달 만에 황폐해져 방치됐던 평양을 대도호부로 삼았다가 곧 서경(西京)으로 격상시켰다.


  남방의 백성들을 사민(徙民)시켜 충실하게 하고, 성을 쌓아, 당제(堂弟) 왕식렴(王式廉)에게 지키게 하였다. 왕건은 서경에 자주 순행했으며,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이곳에 도읍(都邑)을 정하려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북변의 진성(鎭城)을 설치하며 개척해 나갔다.



● 태조 왕건 동상, 고구려 신앙양식 제작 연관성 입증



착의형으로 제작된 태조 왕건 동상 / 노명호 교수 제공


  왕건의 적극적인 북방 경영의식은 고구려 계승의식과도 연관됐다. 그것은 그가 자라난 지역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둔 것이다.  송악군이 포함된 한반도 서북부 옛 고구려지역에는 동명신앙(東明信仰) 등 고구려계의 토속문화가 민간에 뿌리박고 고려말기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동명신상 등 고구려계통의 신상은 옷을 입히는 나체상 양식으로, 동아시아일대에서 제례용 신상으로는 특이한 것이었다. 광종대에 제작된 태조 왕건동상이 고구려신상양식으로 제작된 것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다.



● 황제제도·발해유민 규합 북방경영 제도적 틀 마련


  태조 왕건은 즉위한 첫 날,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황제제도에 따라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으며, 즉위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그가 황제제도를 시행한 주요 동기는 무엇보다도 고려가 중심이 된 천하를 결집시켜 거란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고, 북방경영의 제도적 틀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발해가 망한 후 동만주 일대에는 거란에 항거하며 자치 상태에 들어간 발해유민이나 생여진(生女眞) 집단들이 많이 존재했다. 생여진 집단 등은 고려에 찾아와 방물을 바치는 형태의 교역을 하기도 하고, 그 수장은 고려의 관작을 받기도 했다. 이 고려를 중심으로 한 생여진・발해유민 집단의 규합은 군사적 대거란 동맹의 성격을 띠었다.


 『송사』나 『요사』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거란의 고려 침입 전쟁이 일어났을 때, 거란군의 움직임에 대한 사전 첩보를 알려 오기도 했고, 거란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거란도 이러한 대거란동맹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고려는 그 여진 집단 등을 제후의 강역이라는 의미의 “번(蕃)”으로 불렀다. 『제왕운기』에서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며, “요하(遼河) 이동에 별도의 천지(즉 천하)가 있다”는 것은 고려와 그러한 주변 번을 아우르는 천하의 관념을 서술한 것이다.  / ◎ 노명호(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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