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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조(정의)
본 가이드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지지씨’는 경기도 소재 문화예술기관의 생산자료 등록과 확산을 위해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온라인 아카이브 플랫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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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경기문화재단은 본 가이드의 내용을 ‘회원’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지지씨 플랫폼의 기관회원 등록 안내 페이지에 게시하여, 자유롭게 내려받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합니다.
② 본 가이드는 경기문화재단의 온라인 플랫폼 운영 정책 및 저작권 등 관련 법규에 따라 개정될 수 있으며, 가이드를 개정, 적용하고자 할 때는 30일 이전에 약관 개정 내용, 사유 등을 '회원'에 전자우편으로 발송, 공지합니다. 단, 법령의 개정 등으로 긴급하게 가이드를 변경할 경우, 효력 발생일 직전에 동일한 방법으로 알려 드립니다.
1. 본 가이드의 개정과 관련하여 이의가 있는 ‘회원’은 탈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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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조(회원자격 및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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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회원’ 계정은 신청인이 속한 기관명/부서명/사업명 등의 한글로 부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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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왜 경기천년인가?
『문화정책』은 경기문화재단이 국내외 문화정책의 동향을 파악하고,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추진하는 다양한 문화정책의 방향과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 2017년 여름부터 발행하고 있는 계간지입니다. 본문은 『문화정책』 4권 논단 내용입니다. |
김성환 경기문화재단 정책실장
동아시아에서 황제국 체제, 경기제(京畿制)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경기제(京畿制)를 운영했던 국가는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일본·베트남이 있다. 경기는 천자(天子)가 직접 통치하는 직할영역으로, 왕기(王畿)라고도 한다. 중국의 경우 그 원리와 이념은 주나라의 봉건제에서 찾을 수 있다. 경기는 천하의 근본 지역(根本之地)이었다. 진(秦)나라나 한(漢)나라를 거쳐 당나라 때 ‘경기제’로서 모습을 갖추었다. 결국 이 제도는 황제 또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관(세계관) 실현의 한 방식이었다. 당나라는 경도(京都)가 다스리는 곳을 경현(京縣, 혹은 赤縣), 도성 밖 주변지역을 기현(畿縣)으로 구분하여 이들을 경조부[西都]·하남부[東都]·태원부[北都] 등 3경(京)에 각각 두고 특별지역으로 통치했다. 따라서 경(京)-기(畿)-기외(畿外)의 구분은 자연 예제적(禮制的, Etiquette)이고, 계서적(階序的, Grade)인 질서를 가지기 마련이었다.
일본의 경우 중국의 경기제를 수용했다. 하지만, 기내(畿內)는 일본 고대인 8세기 야마토(大和) 왕권의 발상지를 가리키는 특수한 지역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천황(왕)의 직할지라는 특별구역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었다. 경(京)과 기(畿)와 도(道)는 각각 중앙과 지방의 별개 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이고, 좌우의 경(京)과 5기(畿), 그리고 7도(道)를 의미하는 전국을 총칭하는 명칭으로서만 사용되었다. 즉 특별행정구역으로서 경기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월대 용두, 『고려궁궐 개성 만월대』 - 남북역사학자협의회 82쪽
고려의 건국과 일통삼한(一統三韓)
918년 6월 병진일. 태조 왕건(王建)이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했다. 황제를 칭하며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고려의 건국이다. 황제의 나라, 고려의 475년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천수’는 “천명(天命)을 받았다”는 뜻으로, 918년은 고려 태조 천수 1년이었다. 태조는 즉위를 알리는 황제의 조서(詔書)에서 “낡은 풍속을 고쳐 모든 것을 다함께 새롭게 만들 것, 법도와 규범을 혁신할 것, 온 천하에서 태평시대의 경사(慶事)를 함께 누릴 것”을 밝혔다. 전각(건물)의 이름인 ‘포정(布政)’이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다”는 뜻이다. 즉위 조서의 내용을 실현하리란 포부를 담았다. 2018년 7월 27일, 바로 그 천백년이 되는 날이다.
919년 정월. 고려 태조는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후의 개경)으로 옮겼다. 901년 후고려(後高麗)를 건국했던 궁예가 처음 도읍을 한 곳은 원래 송악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왕건 집안의 세력 기반이 있는 곳이었다. 애초부터 궁예가 이상(理想)을 펼치기 어려웠다. 얼마 후 궁예는 나라 이름을 후고려에서 태봉으로 바꾸며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하지만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고 왕건에게 권좌를 넘겨야만 했다. 그는 왕건의 건국 사실을 듣고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도망하다가 강원도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새로운 왕조, 고려를 세운 왕건이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송악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 건국이념은 ‘일통삼한(一統三韓)’, 셋으로 갈라져 있던 후삼국(三韓)의 통합이었다. 더 깊숙한 곳에는 조선(朝鮮, 고조선)·숙신(肅愼, 여진)·변한(卞韓)을 대상으로 보다 넓은 영토와 문화를 아우르는 국가를 만들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고려 건국의 일차적인 목적이자 5백여년 국시(國是)였던 ‘일통삼한’을 위해 왕건은 일차적으로 신라·후백제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또 각 곳에서 독자적으로 군사력과 행정권 등을 유지하고 있던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겸손한 태도로 화해의 뜻을 나타냈다. 북방 세력의 견제를 위해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운영하며, 북방의 말갈부족 등을 포섭하는데도 공을 들였다.
북방의 안정으로 자신감을 얻은 왕건은 역시 통일의 대업을 꿈꾸었던 후백제 견훤과 본격적인 맞대결을 펼치고, 귀부를 권하던 신라 경순왕을 후백제의 공격에서 적극 구원했다. ‘일통삼한’의 위업에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그런 가운데 거란에게 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로 들어왔고, 934년 7월에는 발해세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명을 데리고 망명했다. 고려의 수년간 노력이 서서히 성과를 맺어가는 순간이었다. 935년 여름엔 아들 신검과 틈이 벌어진 견훤의 투항이 있었다. 겨울엔 신라 경순왕의 귀부(歸附)가 있었다. 그렇다고 삼한일통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936년 9월. 후백제 신검과의 마지막 결전이 남아 있었다.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이런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신라·후백제·고려의 후삼국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북방의 발해를 아우르는 보다 확대된 통합이었다.
건국 후 18년 동안 후삼국은 물론, 북방의 발해까지를 포함한 왕건의 통합 정책은 대내외적으로 ‘중폐비사(重弊卑辭)’, 겸양한 태도로 많은 호의를 베푸는 친화적인 리더십이었다. 때론 강력한 군사적 전략이 불가피했지만, 그 대세는 해동천하(海東天下)를 껴안으려는 아량이었다. 건국 과정에서 왕건이 추대된 이유로 유교적인 관점에서의 유덕(有德)을 강조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고려의 경기제(京畿制) 실현
삼한일통을 이룩한 지 5년이 지난 940년(태조 23), 고려는 통치체제의 재편을 도모했다. 전국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지역 명칭을 고쳤다. 후삼국 각 국의 지방통치체제를 고려 중심으로 바꾸는 조치였다. 이 조치로 도읍을 중심으로 하는 왕기(王畿)에 대한 이해는 확인되지만, 고려의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 형성되기에는 일렀다.
고려의 경기제(京畿制) 실현을 위한 설계는 995년(성종 14)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도읍인 개주(開州)를 개성부(開城府)로 바꾸고, 왕경(王京)에 가까운 송악·개성·정주·덕수·송림·임진 6개의 현을 적현(赤縣, 京縣)으로 삼았다. 적현보다 좀 떨어져 주변을 이루는 강음·장단·토산·임강·적성·파평·마전 7개의 현은 기현(畿縣)으로 삼았다. 왕도(王都)의 기반지로서 ‘왕경 개성부’를 설치하여 왕경에 거주하는 지방인들을 특별구역인 적기(赤畿)를 통해 관리·통제하면서 물적 기반을 담당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를 다듬어 1018년(현종 9) 2월에 경기제(京畿制)가 탄생하였다. 아쉽게도 구체적인 날짜는 전해지지 않는다. 왕경 개성부를 없애는 대신에 개성현(開城縣)을 두어 그 현령이 정주·덕수·강음 3개 현을 관할하게 하고, 장단현의 현령이 송림·임진·토산·임강·적성·파평·마전 7개 현을 관할하게 하여 ‘경기(京畿)’라고 하였다. 이들은 고려의 최고 부서인 상서도성(尙書都省)의 관리에 있었다. 고려가 건국한지 백년이 지난 후였다.
경기제는 황제국의 통치체제를 실현하려는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고려는 동아시아에서 어느 특정의 천하[中華]가 아닌 여러 개의 천하를 인정하는 다원적인 천하관(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후삼국 통합에 협조한 호족들을 제후로 간주하는 천자국 체제를 운영했다. 대외적으로 제후국 체제를 유지하면서 대내적으로 천자국 체제를 갖춘 사실[外侯內帝]은 고려사회의 특징적인 요인이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 사실은 도읍 개경 이외에 서경(西京, 평양), 동경(東京, 경주), 남경(南京, 한양)의 운영이다. 고려가 중국과 같이 엄격하게 3경제(三京制)를 운영했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도읍 개경 이외에 서경을 함께 운영했다던가, 남경을 운영했던 사실, 또는 문종·숙종의 개경·서경·남경의 경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경제(多京制)의 실현으로 황제국의 면모를 갖추려 했다. 개경 중심의 경기제와 별개로 서경과 남경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몇 개의 군현으로 서경기제(西京畿制)와 남경기제(南京畿制)가 운영되었던 것이다.
경기제와 경기문화(京畿文化)
삼국시대의 문화 중심은 당연히 그 도읍의 소재에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 평안도 평양, 백제의 경우 충남 공주·부여, 신라의 경우 경상도 경주이다. 또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후 부분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흡수했지만, 그 중심은 여전히 경주에 있었다.
고려가 건국하고 도읍을 개성으로 정하면서 문화의 축은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서 중서부 지역으로 대이동했다. 개성을 중심으로 고려만의 정체성을 가진 문화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고구려·백제·신라의 것을 계승하여 고려 전국의 양상을 포용한 것이었고, 동아시아를 넘어 아라비아의 것까지 수용한 다양한 것이었다. 또 이들을 종합하여 새로운 것을 다듬어내려면 개방적이어야 했고, 역동적이어야 했다. 그것이 고려의 경기문화(京畿文化)였다. 현재의 경기문화 원류는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대한민국의 문화, 한류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여러 가지 고려의 정체성을 아우르는 틀로서 다원사회(多元社會, A plural society)가 지적되고 있다. 고려에서는 왕조에 필요한 인재의 국적과 종족을 가리지 않고 관료로 등용했다. 외국인으로 재상이 된 경우가 여러 명이었다. 하층민의 신분상승과 정치진출도 활발했다. 역동적인 사회에서 개방의 힘과 효과를 믿었다. 때문에 코리아(Corea, Korea)를 중앙아시아까지 알릴 수 있었다. 고려는 토풍(土風)을 아우른 국가적인 축제였던 팔관회(八關會)가 매년 개경과 서경에서 펼쳐졌다. 이를 통해 불교·유교·도교·풍수지리 등 다양한 사상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었다. 다양성이 지닌 개별성과 분산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개경의 벽란도를 통해 송나라·거란·여진뿐만 아니라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와서 교역하고 축제 참여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들을 소통했다. 강한 문화적 자존의식(自尊意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자체가 경기문화였다.
경기천년의 의미
2018년. 고려시대 경기제(京畿制)가 시행된 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또 우리 역사에서 실질적으로 처음 통일을 이룬 고려가 건국한 지 천백년이 되는 해여서 더욱 뜻이 깊다. 이를 모멘텀으로 새천년을 맞이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바쁘다. 전라도 역시 천년이고, 나주·홍성 등도 천년이다. 경기도에도 양주·광주·수원 등 천년의 도시가 여러 곳 있다. 경기천년을 두고 ‘경기 정명 천년(京畿定名千年)’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고, 경기도라는 지방제도와 관련하여 해석하려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든 천년을 맞는 것이어서 그 차이가 별반 없을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경기 정명 천년’은 ‘경기’라는 명칭에 한정된 아주 소극적인 이해이다. 또 지방제도와 관련한 시각은 역사적인 사실에서 벗어나 있다. 고려 말 일시적으로 경기 좌도(左道)와 우도(右道)가 있었지만, 지방행정제도적인 측면에서 경기도의 출발은 1896년의 13도제 실시에 따라 시작되었다. 고작 120여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셈이다. 이를 가지고 천년을 말할 수 없다.
1414년(태조 14) 조선의 지방제도 개편과 함께 도읍인 한성(漢城)을 에워싼 넓은 지역을 경기(京畿)라 하여 조선시대의 경기제를 실시하였다. 그렇다고 경기가 단지 도읍 한성의 지배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도 경기는 충청도ㆍ경상도ㆍ평안도 등 다른 7개의 도(道)와 달랐다. 한성의 메트로폴리탄도 아니고, 지방제도에도 편입되지 않은 그런 위치가 경기의 자리였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비칠 수 있고, 그러니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고유성도 부족하고 차별성도 적어 언뜻 정체성을 가지기도 어렵다고 이해될 수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피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전국을 상대한 사통팔달(四通八達)에 대한 이해 부족이기 때문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경제·사회·문화·산업 등 모든 분야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공간적인 장소가 사회이며, 그곳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망에서 정치가 일어나고, 물산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경제와 산업이 만들어지며, 이들의 소통망을 유지하고 진전시키는 유무형의 결과가 문화이다. 문화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경기천년은 정명 기념이 아니라 경기문화의 탄생 천년에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방 분권의 사회 구조, 지역문화의 고유한 다양성의 북돋움, 분열된 지역과 민심을 통합하려는 타협 공존의 포용정책 등이 천년 경기문화의 출발이었던 고려에 있었다. 그것은 서울(京)을 제외한 주변지역(畿)이 아닌, 서울을 포함한 경기(京畿)의 온전한 모습이었다. 경기천년을 맞는 이유는 천년의 경기문화를 총체적으로 정리해보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천년의 문화를 끌어가기 위한 저력을 만들어야하는데 있다. 그 시작이 2018년, 내년이다. 팔관회와 같은 흐드러진 축제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향후 우리가 진행해야만 할 남북의 문화교류와 통일, 다원사회로의 지향에 거울(龜鑑)이 될 것이다. 고려는 918년 건국 이후 통일까지 18년이 필요했다. 해동천하 고려의 경기문화를 이루어내는 데는 백년이 걸렸음을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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