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역사문화유산원

고려시대 강화의 유적과 공간 ①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고려시대 강화의 유적과 공간


이희인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차|

  Ⅰ. 머리말

  Ⅱ. 강화의 위상과 유적

  Ⅲ. 도읍의 공간

  Ⅳ. 군현의 공간

  Ⅴ. 맺음말


Ⅰ. 머리말


919년(태조 2) 태조 왕건은 송악산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開州로 삼았다.1* 내년이면 천백주년이 되는 고려의 開京 定都는 새 왕조의 수도가 정해진 것 뿐 아니라 한반도의 정치·사회· 경제의 중심이 동남부에서 중부 지역으로 이동한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 왕조의 교체에 따라 도읍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한 차례 옮겨졌지만 1,000년 이상 국가의 중앙이 한반도 중부에 자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개경 주변에 왕도의 배후지로서 특별 구역을 설정한 京畿制가 시행되었다. 周代 봉건제의 王畿에서 비롯되어 唐代에 체계화된 경기제의 개념은 삼국시대에 수용되었으나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적용되면서 京畿는 고려 중앙의 공간 범위가 되었다.2* 1018년(현종 9) 정식으로 경기라 불리기 시작한 지역은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동에 따라 영역과 위상은 변화하였지만 수도 개경의 畿輔地域으로 역할을 이행하였고 이후 조선왕조 국토 운영의 밑바탕이 되었다.3* 이러한 맥락에서 고려 건국과 개경 정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국토 운영에 있어 중대한 분기점이라 볼 수 있다.


여타의 지방과 구분되는 차별적인 영역으로 개경과 경기는 400여 년 간 유지되었지만 13세기 몽골의 침입에 따른 강화 천도로 변화를 맞이한다. 강화는 유일하게 개경을 공식적으로 대체한 도읍이었다. 강도시기 경기제의 운영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강화는 개경에 대한 출입과 연구가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중세 도성”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4* 그러면서 강화는 고려의 국토 운영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강화에 대한 관심은 강도시기에 집중되어 있지만 강화는 일개 지방 군현에서 일약 도읍이 되었고, 경기에 포함되기도 하였던 지역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강화는 지방과 도읍, 경기로 이어지는 중앙과 지방의 위상을 모두 지녔던 이중적인 공간이며, 그래서 고려의 도읍과 지방 군현의 공간 구조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문헌에 나타나는 강화의 위상 변화와 공간 그리고 강도시기를 포함하여 최근까지 지표·발굴 조사된 유적의 분포를 통해 강도시기와 전후의 강화의 공간에 대한 초보적인 검토를 시도 해보고자 한다.



1. 『高麗史』 卷56, 志 10, 地理 1, 王京開城府.

2. 정학수, 2006, 「고려 개경의 범위와 공간구조」,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4∼51쪽 참조.

3. 신안식, 2003,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과 역할」, 『인문과학연구논총』25, 명지대인문과학연구소

4. 윤용혁, 2017, 「강도사 연구의 쟁점」, 『강화고려도성 기초학술연구』 1,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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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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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역사문화유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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