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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분류 | 뮤지엄(박물관,미술관)/협회/문화예술공공기관/시군청 담당부서 등 | 본부/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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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역사문화유산원
고려시대 강화의 유적과 공간 ②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
고려시대 강화의 유적과 공간
이희인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차|
Ⅰ. 머리말
Ⅱ. 강화의 위상과 유적
Ⅲ. 도읍의 공간
Ⅳ. 군현의 공간
Ⅴ. 맺음말
Ⅱ. 강화의 위상과 유적
1. 시기별 위상
삼국시대 穴口(郡), 통일신라시대 海口(郡)로 불렸던 江華(縣)의1* 천도 이전 사정을 보여주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고려사』 高麗世系의 기록을2* 토대로 강화가 일찍부터 왕건 세력의 배후지였다고 인식하기도 하지만3* 고려 건국세력과 연관이 있다는 정황은 잘 보이지 않는다.
844년(문성왕 6) 8월 강화에 신라 하대의 군진 가운데 하나인 穴口鎭이 설치된다.4*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강화는 적어도 9세기 중엽까지는 신라 중앙 정부의 영향권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게다가 왕건 세력이 귀부한 이후 궁예가 孔巖(양천), 黔浦(김포)와 함께 穴口(강화)를 격파한 사실을 감안하면5* 강화가 송악 지방을 근거지로 하였던 왕건 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932년(태조 15) 후백제 견훤이 예성강 일대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인근 염주와 백주, 정주와 다르게 강화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6* 당시 군사적으로도 강화의 중요성은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 군현 개편 과정에서 군에서 현으로 강등된 사실도 고려 중앙의 강화에 대한 인식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7*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천도 이전 강화의 위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강화를 물류의 집산지로 이해하지만8* 적어도 천도 이전 강화는 물류의 혜택을 입지 못한 지역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개경의 길목에 있지만 천도 이전까지 강화 韋氏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유력 성씨도 배출하지 못하는 사실은 강화가 경제적으로 실제로는 소외된 통과 도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9* 천도 이전 강화가 박술희와 왕규, 무신집권기 왕숙(강종)과 희종 등 정치적 인물의 유배지로 기록에 주로 등장하는 것은10* 강화의 정치·경제·군사적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다는 반증이라 하겠다.
다만 1018년(현종 9) 강화현에 지방관이 파견되는 점이 주목된다.11* 당시 군현 개편 과정에서는 태조∼성종 대에 이미 지방관이 파견된 곳을 포함해 모두 47개 군현이 主縣이 되었는데 이 가운데 강화가 포함된 것이다. 현령이 파견됨으로서 강화현은 鎭江·河陰·喬桐 등 3개의 속현을 거느리는 고려의 강화 지역 통치의 거점이 된다. 고려 초에 위상이 높지 않았던 강화가 현종 9년 주현이 된 것은 지방 통치에서의 중요성이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12*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정치·군사적 의미보다는 지방제도의 성격이 행정을 기준으로 바뀌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13* 강화의 위상이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후 강화는 『고려사』 兵志에 의하면 인종 대 경기에 포함되는 등14* 위상의 변화가 일부 보이나 천도 이전까지 전략적·물류적 측면에서 주목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강화가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39년간 고려의 도읍이 자리하면서다. 1232년(고종 19) 7월 도읍을 옮긴 뒤 강화는 江都라 불렸고, 강화현은 군으로 승격되었다.15* 송악군의 영역에 개경이 자리하면서 개주라 칭한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16* 천도 이후 강도는 본궐과 별궁, 관아 등 통치 공간과 외성과 중성 등 성곽 그리고 능묘와 사원, 태묘와 같은 이념 공간이 개경을 모방해 건설되었다. 다만 강도시기에 경기제가 운영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배후 지역에 대한 정비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17* 어쨌든 강화는 강도시기 정치·군사적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운의 집결지가 되면서18* 경제적으로도 이전과 다른 차별적인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1270년 강화는 다시 지방이 되었다. 몽골과의 강화 직후 내성과 외성이 헐리고19*, 환도 이후에는 元의 頭輦哥[튀렝게]가 민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하면서20* 많은 시설이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원이 지속적으로 강화의 사정을 살피면서 복구의 여지는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21* 환도 후 20년이 경과한 1290년(충렬왕 16) 哈丹賊의 침입으로 강화로 피신한 충렬왕이 머문 곳이 궁궐이 아니라 선원사였다는 것은22* 강도의 주요 시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강화가 다시 왕실의 피난처가 되었다는 사실은 강도시기 이후 강화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고려 중앙의 인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도 직후 강화군의 읍격이 유지 혹은 환원 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공민왕 재위시기에 강화는 府로 승격 되는데23* 이는 고려 말 극성을 부린 왜구의 침입에 따라 개경 방어의 요충지로서 강화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 강화와 교동은 조운의 일시적 집결지이자24* 개경의 관문으로 전국 군현 가운데 왜구의 침입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다.25* 그 결과 공민왕∼우왕 대 왜구의 출몰로부터 개경을 방어하기 위한 수군 중심의 방어체계에서 강화는 핵심적인 거점이 되었다. 한편 1390년(공양왕 2) 강화는 경기 右道에 포함되면서26* 畿內에 속하게 되었다.
요컨대 강화는 현종 9년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나 천도 이전 정치·군사·경제적인 측면에서 고려 중앙의 주목을 받았던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읍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강화에 대한 인식은 변화했다. 환도 이후 강화는 다시 지방이 되었지만 이전 시기와 달리 물류의 중간 집산지가 되었고 개경 방어의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 또, 고려 말에는 경기에 포함되는 등 시기별로 다양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1. 『三國史記』 卷35, 志4, 地理2, 漢州 海口郡.
2. 『高麗史』 高麗世系. “…白州의 유상희 등이 왕건의 조부인 作帝建을 위해 개주·정주·염주·백주 4주와 함께 강화·교동·하음 3현의
백성을 동원해 永安城을 쌓고 궁실을 지어 주었다”
3. 김갑동, 2015, 「고려건국기 강화의 동향과 토착세력」, 『신편 강화사 증보』 상권, 145쪽.
4. 『三國史記』 卷11, 新羅本紀11, 文聖王 6년 8월.
5. 『三國史記』 卷50, 列傳 10, 弓裔.
6. 『高麗史』 卷2, 世家 2, 太祖 15년 9월.
7. 엄성용, 2015, 「고려전기 강화의 기상」, 『신편 강화사 증보』 상권, 172∼181쪽 참조.
8. 정은정, 2009, 「고려시대 개경의 도시변화와 경기제의 추이」, 부산대 박사학위논문, 213쪽.
9. 김기덕, 2015, 「무인집권기 강화의 동향」, 『신편 강화사 증보』 상권, 197∼199쪽.
10. 『高麗史』 卷92, 列傳 5, 諸臣 朴述熙 : 卷127, 列傳 40 叛逆 王規 : 卷20, 世家 20, 明宗 27년 9월 : 卷21, 世家 21, 熙宗 7년 12월.
11. 『高麗史』 卷56, 志 10, 地理 1, 楊廣道 江華.
12. 박종진, 2017, 『고려 지방제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69쪽.
13. 박종진, 위의 책, 62쪽,
14. 정은정, 앞의 논문, 211∼212쪽.
15. 『高麗史』 卷56, 志 10, 地理 1, 楊廣道 江華.
16. 이희인, 2016, 『고려 강화도성』, 혜안, 209쪽.
17. 정은정, 앞의 논문, 220쪽.
18. 박종진, 2002, 「강화천도 시기 고려국가의 지방지배」, 『한국중세사연구』제13호, 72∼74쪽.
19. 『高麗史』 卷24, 世家 24, 고종 46년 6월.
20. 『高麗史』 卷26, 世家 26, 元宗 11년 7월.
21. 『高麗史』 卷26, 世家 26, 元宗 11년 9월 ; 卷27, 世家 27, 元宗 13년 9월.
22. 『高麗史』 卷30, 世家 30, 忠烈王 16년 11월.
23. 『고려사』에는 1377년(우왕 3) 강화부가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지만 강화부사에 대한 기록이 공민왕 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승격 시기는 우왕 이전으로 추정된다.(박종진, 2015, 「개경 환도이후의 강화」, 『신편 강화사 증보』, 364쪽)
24. 1352년(공민왕 1) 교동 甲山倉에 왜구가 침입했고, 1360년(공민왕 9)에는 강화에 침입해 4만석의 미곡을 탈취했다는 기록은 교
동을 포함한 강화에 조운미를 비축할 수 있는 시설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박종기, 2006, 「고려 말 왜구와 지방사회」, 『한
국중세사연구』24호, 한국중세사학회, 181쪽)
25. 박종진, 앞의 글, 378쪽.
26. 『高麗史』 卷56, 志 10, 地理 1, 王京開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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