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실학박물관

특별기획전_다산가의 여인들

묘지명으로 그녀들을 위로할지니

다산가의 여인들

묘지명으로 그녀들을 위로할지니



요절한 며느리 심씨

다산 정약용이 쓴 묘지명 중에 여성을 대상으로 쓴 묘지명은 ‘효부 심씨 묘지명’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 ‘서모 김씨 묘지명’ ‘절부 최씨 묘지명’ 등 총 4편이다. 4편의 주인공은 모두 나주 정씨가에 시집 온 여성들이다.

57세 초로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젊은 나이에 죽은 며느리 심씨의 무덤을 찾아 가는 것이었다. 심씨는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의 부인이다. 그녀는 정약용의 벗인 심오의 딸로 1800년 봄, 열 네 살의 나이로 마현(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으로 시집왔다. 시집 온 해 여름 정조가 승하했고, 그 다음해에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816년 8월, 늘 병약했던 심씨가 서른 살의 나이로 죽었다. 정약용이 고향 집에 돌아 온 것은 심씨가 죽고 3년이 흐른 1818년 가을이었다.

어느 날 정약용은 부인 홍씨와 함께 며느리 심씨의 무덤을 찾았다. 그녀의 무덤은 마현 서쪽 갈래 간좌艮坐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간좌는 풍수에서 서남향으로 햇볕이 가장 오래 드는 자리이다. 현재 그녀의 무덤이 어디쯤인지 찾을 길은 없다.

여름이 막 지난 초가을 무렵이라 심씨의 무덤가에는 풀이 무성했다. 정약용과 홍씨 부인은 정성껏 무덤가의 풀을 뽑았다. 불쌍한 며느리 생각에 홍씨 부인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며느리에 대한 그녀의 추억은 너무도 애달픈 것이었다.



“며느리는 성품이 유순하고 참 침착했다. 시어머니를 어머니처럼 섬기고 사랑하여, 같은 이불에 잠자고 옆에서 항상 먹을 것을 권하고 자신은 먹다 남은 것을 먹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병이 많아 겨울밤에 설사를 10여 차례나 하였는데, 며느리 심씨는 그때마다 일어나 시어머니의 측간에 가는 일을 돕고 그 신음하는 것을 근심하였으며 눈보라가 치는 매서운 추위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산시문집』, <효부 심씨 묘지명>




심씨는 병약했지만 홀로된 시어머니를 항상 곁에서 모셨다. 정약용은 “시어머니의 성품이 까다로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적었는데, 그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칭찬하니, 분명 효부라 할만하다” 했다. 가련하게 죽은 며느리를 위해 ‘심씨묘지명’을 짓고 그녀를 위로하는 시를 지었다.



시아버지 섬기기 일 년뿐이라 / 爲汝舅裁一年

나는 그 어짊을 알지 못하나 / 吾不知其賢

시어머니 섬기기 19년이라 / 爲汝姑十九年

시어머닌 너를 두고 가련하다 하네 / 姑曰汝可憐


꽃을 채 피우지도 못하고 자식 없이 죽은 며느리가 몹시도 가여웠을 것이다. 시아버지로서 아껴주지도 잘해주지도 못한 정약용은 묘지명을 짓는 것 외에 며느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림) 문인화가 윤용이 그린 『협롱채춘(狹籠採春 : 나물 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다) (간송미술관 소장). 윤용은 정약용의 외증조부 윤두서의 손자이다.




너그러운 맏형수 경주 이씨

나주 정씨 집안에 시집 와서 애처롭게 살다간 여성은 심씨 외에 정약용의 맏형수인 경주 이씨가 있다. 경주 이씨와 얽힌 어릴 적 즐거운 기억 하나가 그녀의 묘지명에 전한다. 부친 정재원이 연천현감으로 있을 때이다. 어머니가 술 담그고 장 달이는 여가에 정약용은 큰형수 경주 이씨와 함께 저포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곤 했다. 3이야 6이야 하며 저포놀이를 했다 하니 큰 형수와는 흉허물 없이 지낸 사이였던 모양이다.

어머니 해남 윤씨는 정약용이 불과 9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잃고 난 뒤로 큰 형수가 어머니처럼 돌보아주었다. 머리에 이가 득실거리는 어린 시동생의 머리를 빗질해주고 세수 대야를 들고 따라다니며 씻겨 준 여성이 경주 이씨였다.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 이벽李蘗(1754~1785)은 그녀의 친정 동생이다. 이벽은 청년시절 정약용에게 학문적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정약용 형제를 천주교 신앙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 장본인이다.

정약용은 형수인 경주 이씨를 여자지만 우뚝하기가 장부와 같았다고 추억했다. 시어머니 해남 윤씨가 죽고 시아버지 정재원 또한 관직에서 물러나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경주 이씨 혼자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갔다. 패물을 팔아 살림에 보탰고 심지어 솜이 없는 홑바지로 추운 겨울을 지냈다. 그럼에도 내색 한번 하지 않아 집안 식구 누구도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경주 이씨는 15세에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에게 시집와 1780년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나이 불과 31살이었다. 이를 두고 정약용은 “이제 막 형편이 조금 피어 끼니는 이어나갈 만한데 형수가 미처 누리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며 묘지명을 짓고 그녀의 너그러운 덕을 기리는 시를 지었다.



시어머니 섬기기 쉽지 않거니 / 事姑未易

계모인 시어머니는 더욱 어렵네 / 姑而繼母則難

시아버지 섬기기 쉽지 않거니 / 事舅未易

아내 없는 시아버지는 더욱 어렵네 / 舅而無妻則難

시숙 대우하기 쉽지 않거니 / 遇叔未易

어미 없는 시숙은 더욱 어렵네 / 叔而無母則難

여기에서 유감없이 잘 하였으니 / 能於是無憾

이것이 형수의 너그러움일세 / 是惟丘嫂之寬



외롭게 살다간 서모 김씨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정약용을 돌봐 준 또 한명의 여성이 서모 김씨이다. 정약용과 달리 부친인 정재원은 한명의 부인과 백년해로하지 못했다. 일찍이 의령 남씨와 혼인하여 장남인 정약현을 낳았으나, 일찍 죽어 해남 윤씨와 재혼하였다. 약전·약종·약용 3형제가 해남 윤씨가 낳은 아들들이다. 해남 윤씨마저도 1770년에 죽자 정재원은 이듬해 철원 금화현에 사는 황씨 여성을 측실로 맞았는데 이 여성도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이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일은 드물었다. 오늘날과 달리 부인 자리가 필요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부친 정재원은 정약용이 열 두 살 되던 1773년에 서울 출신의 스무 살 처녀 김씨를 측실로 맞았다. 뒷날 정약용은 이때를 돌아보며 “머리에 서캐와 이가 많고 또 부스럼이 자주 생겨났었는데 서모가 손수 빗질해주고 또 고름과 피를 씻어주었다”고 회상했다.

서모 김씨가 시집올 무렵 부친 정재원은 벼슬 없이 집안에서 놀고 있었다. 때문에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다가 3년 뒤인 1776년에 호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3년간 화순현감과 예천군수를 지내다 또 물러났다. 1780년부터는 무려 7년간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놀며 지냈다. 1787년에 다행히 울산도호부사로 나갔다가 1790년 진주목사를 지냈지만, 2년 뒤에 진주 임지에서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서모 김씨는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17년간 정재원을 따라다니며 그의 수발을 들었다. 정약용은 그런 서모 김씨의 공을 잊지 않았다.

서모 김씨는 오십 평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불행을 겪었다. 정재원과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낳았지만, 정실이 아닌 측실인 까닭에 자녀들은 서자와 서녀 신분이었다. 첫째 딸은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과 결혼했지만,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과부가 되었고, 둘째 딸도 일찍 과부가 되었다. 막내딸은 요절했고 아들인 약횡 또한 오래 살지 못했다. 세 명의 며느리 또한 줄줄이 요사했고 손자마저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서모 김씨는 자식처럼 의지했던 정약용이 유배가자 강진 쪽을 바라보며 매일 눈물을 흘렸다. 결국 1813년에 “내가 이제 다시 영감(정약용을 지칭)을 보지 못하는 구나”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강진에서 서모 김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약용은 마치 생모의 죽음처럼 슬퍼했다.

서모 김씨는 정재원의 묘가 있는 충주 하담이 아닌 용진(두물머리) 산골짜기에 묻혔다. 서모 김씨가 하담 선영에 묻히지 못한 것을 정약용은 매우 아쉬워했다. 해배 후 정약용은 서모 김씨의 무덤을 용진에서 조곡(鳥谷)으로 옮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운길산을 조곡산이라고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곡은 운길산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곡에는 서모 김씨의 세 며느리가 묻혀 있었다. 정약용은 서모 김씨의 무덤을 옮기면서 “하담 선영에 못갈 바에는 차라리 세 며느리 무덤이 있는 곳이 낫지 않겠나”며 위로했다.


(그녀의) 일생을 세부분으로 나누면 / 參分其一生中

일분이 즐겁고 영화로웠네 / 一分其樂其榮

하담 선영 기슭에 따라가지 못하였으니 / 旣不克從于荷之麓

차라리 세 며느리 무덤 있는 곳에 의지함이 낫지 않으랴 / 無寧來依乎三婦之塋



정약용은 생모 해남 윤씨를 위한 묘지명은 짓지 못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탓일 것이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어린 시절부터 깊이 정이 든 서모를 위한 묘지명은 남겨 외로이 살다간 그녀를 위로했다.



그림 ) 서모 김씨의 첫째 딸이자 정약용의 서매인 정씨 부인이 기록한 시아버지 채제공의 전기 상덕총록(相德總錄) (화성박물관          소장)





남편 따라 죽은 최씨

정약용이 묘지명을 쓴 또 한 명의 여성이 절부 최씨이다. 최씨는 정약용의 재종제(6촌)인 정상여의 부인이다. 정상여는 정약용이 유배 가던 해인 1801년에 나주 정씨 가문에 크나큰 화가 미친 것을 근심하다가 이해 11월 1일에 그만 사망하였다.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던 최씨 부인은 장례를 채 마치기도 전에 바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죽은 그녀의 품속에는 다음과 같은 유서 한통이 있었다. “조금 더 살려고 했지만 시댁의 가난함을 생각하여 두 번 장례를 치르지 않게 하려 합니다.”

너무도 애달픈 일이었다. 아들과 며느리의 장례를 한꺼번에 치른 뒤, 그녀의 시아버지는 “너를 모르는 사람은 너의 정절이 훌륭하다 말하겠지만, 너의 효행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며 안타까워했다. 최씨 부인은 시집 온지 채 1년이 안되었을 때 시할머니가 이질을 앓자 하루에도 측간을 40~50차례 부축하였고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으며 옷에 묻은 오물을 매번 닦아내곤 했다.

최씨 부인의 효행과 순절은 당대로는 열녀에 오를 만한 일이었다. 마을의 선비들이 한 목소리로 최씨 부인이 열녀문을 하사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에 정상여의 동생 정규건이 정약용에게 최씨 부인의 행적을 기리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정약용은 죽은 남편을 따라 부인이 자결하는 열녀 풍속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남편이 억울하게 죽은 것도 아닌데 병사한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살아남아 시부모를 모시고 자식들을 건사하는 것이 바른 도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주 정씨가에 남편을 따라 자결한 여성으로는 최씨 말고도 정약용의 5대조인 교리공 정언벽의 부인 목씨가 있다. 목씨 부인은 남편 정언벽이 요절하자 어린 자녀를 남겨두고 목숨을 끊었다.(필자주: 정언벽은 마현 입향조이자 다산의 6대조인 정시한의 부친이다. 부모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정시한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그녀의 죽음을 애닯게 여긴 사람들이 조정에 열녀문을 신청하자고 했다. 당시 우담 정시한(정약용의 방계조상)이 “까닭 없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바른 의리가 아니며, 이를 표창하는 것 또한 가문의 복이 될 수 없다”며 반대하여 열녀문을 하사받지 못했다.

정약용은 정시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내가 어떻게 최씨 부인에게 열녀문을 하사하라는 글을 감히 지으겠는가”하며 열녀 표창문 짓는 것을 거절하였다. 다만, 그녀의 정절과 효행을 기린 글을 지어 보내며 그녀의 관 안에 넣으라 하였다.


정절(貞節)이 이미 빛나고 / 節旣皭矣

효행 또한 드러났네 / 孝隨以章

조그마한 이 봉분은 / 此封者尺

절효부 최씨의 무덤이네 / 是唯節孝婦崔氏之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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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성희 수석학예연구사(실학박물관 학예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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