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아름답고 매운 봄의 향기

문학-고전-산문 분야 『춘향전』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춘향전』

송성욱 엮음, 민음사, 2004









아름답고 매운 봄의 향기


권순긍 -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어느 나라나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진정한 의미의 고전(古典)이라 할 수 있겠는데, 흔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는 그 고전의 목록에 맨 위를 차지하는 건 무엇일까? 중국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있다면 우리에겐 당연히 『춘향전』이 있다. 18~19세기엔 판소리 「춘향가」가 12마당 중 가장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고전 소설로도 200종이 넘는 이본을 파생시켰다. 게다가 서양의 오페라와 유사한 창극으로도 공연됐으며 1923년 최초의 한국영화로 제작된 후 무려 스무 번 이상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춘향전』은 어찌해서 이렇게 인기 있는 작품이 됐을까? 이 책은 양반과 기생이라는 신분이 다른 청춘남녀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수난의 과정을 거쳐 다시 행복한 재회에 이르기까지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틀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뿐더러 그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익숙한 ‘대중서사’를 잘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남원부사 아들인 이몽룡이 그네 뛰는 춘향이를 보았을 때, 이몽룡은 춘향을 기생의 딸이라 잠깐 즐기는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방자에게 춘향이에 관해 물어보니 “다른 무엇이 아니오라 이 골 기생 월매 딸 춘향이란 계집아이로소이다.” 하자 “들은 즉 기생의 딸이라니 급히 가 불러 오라”고 한다. 기생은 노류장화(路柳墻花)여서 누구나 꺾을 수 있는 존재였고 이몽룡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초대를 춘향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네가 지금 시사(時仕, 현직 관기)가 아닌데 왜 오라 가라 하느냐?”고 반문한다. 실상 춘향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여성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가 춘향의 본 모습이다. 결국 사또 자제 이몽룡은 “네가 너를 기생으로 앎이 아니라 들으니 네가 글을 잘 한다기로 청하노라”고 궤도를 수정해 ‘글 벗’으로 초청했고, 아름다운 두 청춘 남녀는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고 사랑하기에 이른다. 그 사랑은 상대방의 신분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상대방이 마음에 드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의 상대, 말하자면 느낌(feel)이 통하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적 장애가 가로 놓여 있고, 그 간극은 당시의 통념상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날 밤 이몽룡은 춘향의 집을 방문해 서로가 부부가 될 것을 약속하고 불망기(不忘記)까지 적어준다. 말하자면 ‘혼인서약서’인 셈인데 당시의 관습으로 그것이 사회적 구속력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양반과 기생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적어도 둘 사이에는 신분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날 밤 이루어졌던 춘향과 이몽룡의 질탕한 ‘사랑놀음’을 두고 신소설 작가였던 이해조는 『자유종(自由鐘)』에서 ‘음탕교과서’라고 규정했지만 진정한 사랑, 영혼의 만남이 있는 그들의 사랑 행위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사랑 자체가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존재로 이루어진 사랑이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의 고전에서 남녀의 만남은 흔히 성(性)을 수반하게 되는데, “옛날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랑에 적극적이었는가?”라고 의문을 품게 된다. 그것은 남녀의 만남이 원천적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규방에 갇힌 규수가 가족 외에 젊은 남성을 만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젊은 남녀의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이 되어 주저하고 머뭇거릴 시간이 없이 한 번에 모든 과정이 이루어진다. 정말 미치도록 서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춘향전』의 「사랑가」 중에 한 예를 보자. “나는 죽어 인경마치 되야 (중략) 인경 첫마디 치는 소리 그저 뎅뎅 칠 때마다 다른 사람 듣기에는 인경소리로만 알아도, 우리 속으로는 춘향뎅 도련님뎅이라 만나 보자꾸나”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랑의 자장(磁場)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그런 경지다. 그러기에 『춘향전』의 성(性)은 진정한 사랑, 영혼과 육신이 만나서 펼쳐지는 한없이 아름다운 진경(眞景)인 것이다.


자, 이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상호 신뢰와 애정으로 감춰져 있던 신분적 갈등이 현실의 고난으로 드러난 것은 이몽룡과 이별하고 변학도가 남원부사로 내려오면서부터다. 아름다운 기생을 사이에 두고 한량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미기담(美妓談) 혹은 탐화담(探花談)은 조선 후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어는 고을에 원님으로 내려왔던 양반이 그곳의 아름다운 기생과 사랑을 나누었고, 임기가 다하여 서울로 올라갔지만 기특하게도 그 기생은 절개를 지켜 나중에 돈을 주고 기생 신분에서 빼내 첩으로 삼았다는 얘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예전에는 기생을 ‘말하는 꽃’ 혹은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의미의 해어화(解語花)로 불렀다. 해어화는 남성 사대부들이 기생을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아무나 꺾을 수 있는 수동적인 존재가 바로 기생인 것이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여성의 살아 있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정식 부인이 아닌 첩으로 삼았다는 대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물론 당시의 신분제도 속에서 부부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책에서 여성의 주체적인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춘향전』이 여느 미기담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춘향전』은 제목처럼 여성 주인공인 ‘춘향이의 얘기’인 것이다.


남원에 내려온 변학도는 만사를 제쳐놓고 ‘기생점고’부터 하고 춘향이를 찾는다. 어떤 이본에 보면 기생명부에 없으니 명부에 집어넣고 데려오라고까지 한다. 춘향이를 대하는 이몽룡과 변학도는 이렇게 태도부터 다르다.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이몽룡과 우격다짐으로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 바로 이 변별점이 춘향이가 그토록 강하게 수청을 거부한 근거다. 변학도는 춘향을 인격체가 아닌 양반의 ‘노리개’로 보고 수청을 강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춘향의 수청 거부는 이몽룡을 위해 절개를 지킨다는 의미보다도 바로 이런 무자비한 폭압에 대한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변학도가 기생이 무슨 정절이 있냐고 조롱하자 춘향은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충불사이군(忠不事二君)이요 열불경이부절(烈不更二夫節)을 본받고자 하옵는데 수차 분부 이러하니 생불여사(生不如死)이옵고 열불경이부(烈不更二夫)오니 처분대로 하옵소서. (중략) 충효열녀 상하 있소? 자세히 들으시오! 기생으로 말합시다.”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


춘향이가 강변하는 것은 봉건적 덕목인 ‘열(烈)’인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한 남성과 사랑을 위해서 수청을 거부하겠다는 말이다. 이는 이몽룡에 대한 수절이 아닌 자신의 인간적 권리를 주장한 셈이다. 이런 춘향의 항변에 대해 “지나가던 새도 웃겠다”라거나 “기생이 정절이면 우리 마누라는 기절”이라 비아냥거릴 정도로 당시 기생은 인간 대접을 못 받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실정법에 해당하는 ‘열’이라는 명분을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야 했다. 당시의 봉건적 덕목을 이용한 것이지만 춘향이 강조하는 ‘열’은 한 인격체의 권리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외피의 역할을 한다.


왜 춘향이가 죽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했을까? 사건의 진행 과정을 보면 춘향이 매를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거지꼴로 내려온 이몽룡을 보고 살아날 희망도 포기하고 사후 처리까지 부탁한다. 변학도는 이방을 보내 “네가 수청을 들면 관가의 창고 돈이 다 네 돈이 될” 것이라고 회유하기도 하지만 독하게 마음먹고 유혹을 뿌리친다. 춘향은 양반의 노리개가 되어 구차하게 사느니 당당하게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춘향이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평범한 지어미로 한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양반의 노리개가 돼야 하는 신분적 질곡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신분적 질곡에 당당히 맞섰던 여자가 바로 춘향이다. 이 때문에 춘향이는 양반 신분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것이 아니라 천민인 기생도 한 인격체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분 해방’을 실현한 것이다. 그러기에 『춘향전』은 한국판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 천민인 기생의 처절한 투쟁사로 읽혀야 한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조선풍속사 3』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2010


『연애의 시대』

권보드래 지음, 현실문화, 2003


『사랑의 인문학』

양운덕 지음, 삼인, 2015





권순긍 -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1990년 성균관대학교에서 활자본 고소설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2008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엘테 대학교에 한국학과를 창설하고 헝가리 학생들에게 한국문학과 한국문화를 가르친 바 있다. 저서로는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등이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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