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입장의 동일함, 엽서에 새기다

문학-현대-산문 분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지음, 돌베개, 2018








  입장의 동일함, 엽서에 새기다


안중찬 - 출판기획자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신학상 선생은 슬하에 오 남매를 두었다. 다섯 손가락을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겠지만 네 번째 손가락이 특별히 더 아픈 세월을 살았다. 대학교수로 촉망받던 차남이 간첩 누명을 쓰고 구속되었는데, 함께 잡혀간 사람들이 하나둘씩 총살로 죽어 나가는 동안 절망에 빠진 노부부를 위로한 것은 오히려 옥중의 아들이었다. 처음엔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던 아들은 그 슬픔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지극정성 옥바라지하는 부모형제와 함께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관계의 철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스물여덟 번째 생일에 서대문구치소로 끌려간 뒤, 남산 수도경비사령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를 거치며 1·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대법원 파기환송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안양교도소, 대전교도소, 전주교도소로 이어진 지난한 세월은 청춘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매달 한 장씩 지급되는 엽서에 희망을 담아 가족들에게 띄운 편지는 흙탕물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20년 20일이나 지속되었다. 마흔여덟 번째 생일에 특별가석방 소식을 들었을 때, 250장 가까운 엽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명저로 완성되었다.


“벽에 기대어 앉을 때 저는, 결코 벽에 기대어 앉으시는 일 없으신 아버님을 생각합니다. 간결한 대화, 절제된 감정으로 그 짧은 접견 시간마저 얼마큼씩 남기시는 아버님의 접견은 한마디라도 더 실으려고 마지막까지 매달리는 여느 사람들의 접견과는 대조적으로, 흡사 여백이 넉넉한 한 폭 산수화의 분위기입니다. 한국의 근세를 읽으면서 저는, 가혹한 식민지의 시절을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 사셨던 아버님의 고뇌와, 지금은 기억조차 불가능한, 다섯 살의 저에게 항일을 가르치던 아버님의 지우들의 고뇌까지도 함께 읽게 됩니다.”


벽에 기대어 앉을 때마다 아들은 “사람은 부모보다 그들의 시대를 닮는다”고 하셨던 선친을 생각했다. 편지마다 “아버님의 하서와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라는 되풀이 되는 문장으로 자상한 옥바라지를 그려볼 수 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어머님을 만난다는 고백 속에서도 불효자의 설움이 베어 나온다. 밥때는 물론이고 빨래를 하거나 걸레질을 할 때도 은은하게 밀려오는 사모곡이 처연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저자의 서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글씨가 기여하는 과정도 잔잔한 희망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화 「1987」에서 설경구가 열연했던 민주투사 김정남은 세상이 잊고 살았던 이름 ‘신영복’을 발견하고 처음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사상범의 정갈한 옥중 편지에서 집자한 글씨로 제호를 구상했을 뿐만 아니라 영인본 엽서를 과감하게 평화신문 창간호에 연재했다. 독자들은 예술성과 문학성, 사유의 깊이에 전율했고, 상상 이상의 뜨거운 반응은 범국민적인 구명 운동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신영복은 출소와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으며, 제목과 서문을 쓴 김정남은 한국을 대표하는 출판기획자로 명성을 얻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대정동 새 교도소로 이사한 직후에 쓴 ‘여름 징역살이’는 절망적 존재론으로부터 희망적 관계론으로 향하는 역사적인 엽서다. 없이 사는 사람들의 도덕성과 인성을 비난하는 옳지 않은 이성과 행동에 대한 성찰을 담은 명문이다. 계수님에게 보낸 부드러운 엽서라 얼핏 동생 부부를 향한 따뜻한 위로일 수도 있지만, 무심코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존재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사회적 메시지다. 철심에 먹물을 발라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또박또박 적어낸 원본 엽서의 정갈함 또한 절정의 예술이다.


발신자는 언제나 한글 이름 ‘신영복’이었고, 수신자 이름은 늘 격식 있고 깍듯한 한자였는데, 계수님에게만큼은 동생의 옆자리를 의미하는 “申榮碩 옆”으로 시절 문화의 친밀감과 유머를 빠뜨리지 않았다. 총각 시숙이 계수님께 연정을 담아 보낸 것 아니냐며 짓궂게 물어오는 사람들이 흔했을 만큼 애틋했다. 엽서 원본에 찍혀 있는 ‘검열필’ 도장을 봤더라면 연좌제로부터 형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란 것을 금방 이해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검열에서 벗어나 ‘다시 쓰고 싶은 편지’라는 속편의 기획을 공공연히 희망하곤 했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감옥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수많은 재소자들과의 관계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알몸으로 마주하는 목욕탕 같은 공간이었지만 학벌과 언어, 몸짓과 눈빛이 다른 소위 먹물이란 존재를 진심으로 받아주는 동료는 없었다. 스스로 변화가 필요했다. 배척당하지 않고 함께하려는 진솔하고 창백한 몸부림은 ‘머리→가슴→발’이라는 먼 여행을 통해 비로소 왕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자기개조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아무리 좋은 마음도 ‘입장의 동일함’ 없이 진정한 관계를 이룰 수 없다는 실천적 깨달음이었다.


내 인생의 등대는 별이 되었다. 밀양 영취산 남봉 산마루에 고즈넉한 소나무 숲에서 영원한 자유를 찾았다. 그 땅으로부터 시작된 머리로 배운 20년의 학교생활, 감옥에서 가슴으로 배운 20년의 학교생활, 강단에서 발로 뛰며 실천한 20년의 학교생활로 선생의 일생이 저물어 갔다. “감옥이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하게 하는 정치적 공간이다”라고 했던 미셸 푸코의 선언처럼 감옥이 곧 학교였고, 학교가 곧 감옥이었던 일생이 저물어 갔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한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루쉰전』

왕스징 지음, 유세종·신영복 옮김, 다섯수레, 2007


『찬 겨울 매화 향기에 마음을 씻고』

이구영 지음, 바움, 2004


『감시와 처벌』

미셀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나남출판, 2016





안중찬 - 출판기획자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대국민 공모를 통해 현재 집권여당의 당명인 ‘더불어민주당’+‘the민주’를 제안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한국인을 위한 코렐드로우』『포토샵파워』『기계 제어 프로그래밍』 등 IT 분야 11권의 저서가 있다.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로, 전자신문에 ‘안중찬의 書三讀(서삼독)’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참여자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
경기 문화예술의 모든 것, 경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