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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향수에 숨어 있는 정지용의 다짐

문학-현대-운문 분야 『정지용전집1 - 시』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지용 전집 1 - 시』

정지용 지음, 권영민 엮음, 민음사, 2016








향수에 숨어 있는 정지용의 다짐


김응교 -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






정지용 시인에게는 세 가지 아픈 상실이 있었다. 하나는 민족의 상실이고, 둘째는 아이의 상실이고, 셋째는 고향 상실이다. 세 가지 상실을 극복하려는 아름다운 절제의 의지가 『정지용 전집』에 담겨 있다. 정지용은 아름다운 우리말로, 때로는 가톨릭 신앙으로 때로는 자연시로 그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려 했다.


초기시 「향수」를 잘 분석하면 그가 아파했던 상실이 무엇인지 보인다. 이 시를 1927년에 발표했지만, 창작은 1923년에 했다고 작품 말미에 써 있다. 1, 3, 4연은 고향 전경, 2, 5연은 방안 풍경이다. 계절은 추수가 끝나고 겨울로 가는 시기다. 등장인물은 늙으신 아버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맨발로 다니는 아내, 세 사람이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은 유서 깊은 역사를 마을 공동체에 끌어들이는 문장이다. “얼룩배기 황소”는 우리 전통 칡소일 것이다.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에서 “해설피”라는 단어에 여러 주장이 있는데, 대체로 느리게 서글피 우는 소리라고 한다.


2연은 아버지와 함께하던 겨울밤을 회고하는 대목이다. 질화로와 짚벼개는 전형적인 농가의 방에 있는 사물이다. 문틈으로 찬 바람 소리가 들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던 방이 영상처럼 지나간다. 3연은 어릴 때 회상이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은 얼마나 소박한가. 화살놀이 하다가 쏜 화살을 풀섶에서 찾는 아이 모습이 떠오른다. 4연에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이 무척 정답다. “사철 발 벗”고 아무데나 맨발로 걸으며 일하던 아내는 정지용이 12살에 조혼했던 나이 많은 아내가 아닐까. 5연에는 다시 단란한 농가의 정경이 펼쳐진다. “서리 까마귀”는 가을 까마귀다. “서리 까마귀 우지짖”는 황량한 밖의 풍경은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방 안 모습과 대조된다.


이 시를 대부분 주정적(主情的)이라니 순수 서정시의 모범이라고 해설한다. 그런 해석에는 그가 시에 가끔 숨겼다 꺼내놓는 역사의식을 아예 배제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활약했던 작가의 작품을 무조건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데는 반대하지만, 정지용의 경우는 조심스럽다. 그는 자기 시집 『백록담』에 실린 여행 시까지도 식민지 조선인의 애환에 비추어 설명한다. 정지용이 낸 시집 전체와 산문집을 읽어보면 그의 작품에서 역사를 배제할 수 없다.


「향수」에는 밝은 빛이 없다. “흐릿한” 풍경이며 어딘가 그늘져 있다. “늙으신” 아버지도 “엷은”, “겨운”으로 고독하고 쇠잔한 모습이다. “얼룩백이 황소”는 사라져가는 조선의 칡소다. “식은” 질화로이며, “비인” 밭이다.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노동하는 모습이며, “서리 까마귀”라는 썰렁한 풍경이라든지, “초라한 지붕”이란 표현들이 단순한 고향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지용 시인을 단순히 참신한 언어로 한국 현대시를 발전시켰다는 평은 그의 시업을 축소시키는 평가다.


이 시를 정지용은 〈조선지광〉에 1927년 3월에 발표했으나, 작품 끝에 1923년 3월에 창작했다고 썼다. 도시샤대학 예과에 입학한 것이 1923년 5월이니, 이 시는 휘문고보를 마치고 도시샤대학에 유학 가기 바로 전에 쓴 작품이다. 휘문고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1918년 서울 휘문고보에 입학한 뒤 이듬해 1919년 3·1운동 당시 정지용은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휘문고보 시절 역사의식이 있는 이태준, 박팔양과 친구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중요한 점은 이 시를 썼던 1923년과 발표했던 1927년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그가 유학 가자마자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사건이 터진다. 지진이 나고 유언비어로 3일 동안 6천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된 것이다. 이 사건은 신문에 보도되어 널리 알려졌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일본에서 「향수」를 〈조선지광〉에 보낸 정지용의 마음은 그냥 고향을 그리워 하는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카페 프란스」)라며 나라 잃은 젊은 디아스포라의 설움을 슬쩍 써놓았다. 윤동주가 좋아하던 정지용의 「말.1」에 등장하는 말은 부모와 고향과 떨어져 사는 난민을 은유한 것이다. 정지용 시에는 설움과 슬픔이 비밀처럼 여기저기 숨겨 있다.


「향수」에서 그의 고향 충북 옥천(沃川)의 풍경은 풍요롭거나 화사하지 않다. 조선의 칡소가 느리게 우는 들녘에 토지사업으로 수탈당한 농민들의 가난한 모습이 실루엣처럼 담겨 있다. 교토에서 귀국한 정지용은 좀 더 직설적으로 상실된 고향을 토로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고향」) 정지용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안다면, 이제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후렴은 단순한 추임새로 들리지 않는다. 이 반복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삶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리얼리티가 아닐까.


「유리창.1」은 정지용이 딸을 잃은 슬픔을 쓴 1연 10행의 시다. 추운 겨울밤, 시인은 유리창을 마주하고 있다. 1연에서 3연까지는 창 안의 풍경이다. 유리창 앞에 서서 입김을 부니, 유리창에 그려진 입김 자국이 마치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리는 새처럼 보인다. 파닥거리는 아이는 고통을 참으려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을 것이다. 4연에서 5연은 창밖의 풍경이다. 슬픔을 지우고 또 지워도 삶은 온총 새까만 밤이다. 그리워 그 별을 다시 보고 싶어 유리창을 닦아내 본다. 그 별은 그의 막내이자 첫 딸아이인 ‘구원’이라고 한다. 이제 시 제목이 왜 유리창인지 깨닫는다. 유리창 저편에 죽은 딸이 있다. 유리창 너머에 있는 딸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죽음과 삶의 사이에 유리창 하나가 있는지 모른다. 6연에서 7연은 시인의 내면 풍경이다.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딸은 실제로 폐렴으로 죽었다. 딸은 나뭇가지에 앉은 산새처럼 잠시 지상에 머물었었다. 지금까지 냉정하게 자제했던 아버지는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 갔구나!"라며 마지막 행에서 찢어질 듯 탄식한다.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 갔구나!”


민족의 상실, 아이의 상실, 고향상실의 아픔을 올곧은 선비의식으로 정지용은 극복하려 했다. 정지용이 영향을 끼친 시인을 보면 그의 시인됨을 알 수 있다. 그는 1933년 〈가톨릭청년〉 편집고문일 때 이상을 등단시켰다. 정지용은 직접 가르친 적은 없지만, 그는 윤동주에게 시의 아버지였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을 등단시켰다. 끝까지 친일하지 않고 한글을 지켜내려고 애썼던 그는 친일하지 않은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을 추천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정지용 사전 』

최동호 지음, 고려대학교출판부, 2003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이숭원 지음, 태학사, 1999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

시나다 히로코 지음, 역락, 2002






김응교 -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집 『씨앗/통조림』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과 평론집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곁으로-문학의 공간』 『그늘-문학과 숨은 신』 『일본적 마음』 『한국시와 사회적 상상력』 『박두진의 상상력 연구』 『시인 신동엽』 『이찬과 한국근대문학』 『韓國現代詩の魅惑』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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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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