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나가는 우리의 창남이

아동 분야 『만년샤쓰』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년샤쓰』

방정환 지음, 김세현 그림, 길벗어린이, 1999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나가는 우리의 창남이


김혜진 - 그림책독립연구자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이십 리. 그 먼 길을 걸어서 통학하는 아이가 있다. 해진 양복바지와 기워 붙인 옷을 입은 옷만 봐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란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구차한 형편임에도 언제나 얼굴은 근심 없이 해맑다. 더 좋은 옷을 입고 새 가방을 든 아이를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혹 주변에 걱정 많은 아이가 있다면 나서서 우스운 말로 분위기를 바꾸고 문제가 생길 땐 적당한 해결책도 내놓는다. 동급생이건 상급반이건 토론을 시작하면 그 아이를 이길 자가 없다. 끝까지 살아남는다. 창남이는 그런 아이다.


『만년샤쓰』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쓴 소년 소설이다. 샤쓰(셔츠), 세간(살림) 등 단어들과 대화체들이 예스러운 듯 어색할 수 있는 근대의 말투다. 그런데 그것이 이야기 속에 녹아드니 어쩐지 정겹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지금 아이들이라면 드라마나 영화, 혹은 생존하신다면 증조부모에게서나 들을 수 있으려나 싶다. 소리 내어 읽어보면 그 맛이 더 살아난다. 창남이가 만년 샤쓰 입은 사연이 슬프고 아리더라도 막상 읽는 재미는 남다르다. 일찍이 색동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낭독회를 열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일이나 직접 각본을 쓴 공연을 무대에 올리던 분이니 글맛도 제대로일 터였다. 이야기를 좀 더 읽어보자.


친구들로서는 창남이의 사정을 겉모습만으로 익히 짐작할 정도지 구체적인 상황을 알 리 없다. 매번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통에 재미난 친구로 기억할 뿐이다. 하루는 너무 늦게 교실에 나타난 창남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입이 벌어진 구두를 스스로 수선하며 오는 통에 시간이 너무 늦어졌단다. 그러고도 태평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체조도 한다. 그러다 추운 날 웃옷을 벗고 샤쓰만 입은 채 운동하라는 체조선생님 호령에 창남의 만년샤쓰가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웃옷을 벗은 창남이는 맨몸이었다.


처음엔 웃통을 벗은 채 만년샤쓰로 체조를 하겠다는 창남의 말을 선생님과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막상 만년샤쓰가 벗은 몸 자체란 말을 들은 좌중은 고요해졌고, 진심으로 창남이의 현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어 화재로 집을 잃은 데다 눈먼 어머니에 대한 묘사가 그려지면서 창남이의 절박한 현실은 끝을 보인다. 창남이와 창남이 어머니는 자신도 입을 옷이 없는 처지에서 함께 화재를 당한 이웃에게 자기 옷을 벗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또 창남이는 옷이 얇아져 추위에 떠는 어머니께 자기가 입었던 셔츠와 양말을 벗어드리고 학교에 온 것이다. 앞을 못 보는 어머니라 가능한 일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과 친구들은 말을 잃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혹여 자신의 맨몸을 만년샤쓰라 말하며 그 추운 겨울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옷을 벗은 창남의 태도를 용기와 재치라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의 마음은 나름 꽤 오랜 시간을 아프고 처절하게 견뎌왔을 것이다. 그렇게 다져진 상처는 두꺼운 더께로 남아 너무 일찍 성숙한 얼굴로 세상을 대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불쌍하게 볼 일도 아니다. 스스로 이미 넘어섰을 현실을 연민의 눈물로 용기 있다 칭찬해봤자 큰 감흥도 없다. 힐난하거나 손가락질받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김세현의 한국화 기법 그림은 방정환 선생의 글을 편안히 따라가고 있다. 그 시절의 학교, 교실, 동네 풍경이 그대로 재현되어있다. 작은 컷의 학교 종, 호루라기, 교모와 교복 등 소품의 등장도 재미있다. 글로 읽고 상상하던 창남의 얼굴이 표지 전면에 등장한다. 글 중간중간 쓸쓸하고 고단한 창남이의 정서가 스며들 듯한 컷씩 배치되어있다. 홀로 철봉 연습을 하는 창남이의 고된 시간 아래 붉은 저녁노을이 펼쳐지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힘겨운 창남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해서다. 구두를 싸매는 창남의 손과 구두 밖으로 나온 발가락을 담은 장면에선 코끝이 아리다. 서늘한 색감에 한겨울 시린 공기가 독자의 손끝 발끝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그래도 익살스레 웃는 창남의 얼굴은 변함이 없다.


만년샤쓰 이후 창남의 표정은 내내 굳어있다. 선생님 앞에 고개 숙인 채 서 있는 뒷모습은 더 이상 웃음 어린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한 연출이다. 여덟 살 이후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마친 창남은 그제야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껏 울지 않던 창남이었기에 클로즈업된 짚신 위로 떨군 눈물은 더 아프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오래전 일로 보인다. 1920년을 전후로 활동했던 방정환 선생의 글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백 년이 흐른 지금, 현재의 어린이들에게도 이 글이 유효한지에 대해선 장담하기 힘들다. 다만 창남이 가진 호쾌함, 재치, 너그러운 심성에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창남이 처한 상상하기 힘든 극빈의 처지는 당시로써는 적절한 설정일 수도 있다. 돌봐줄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앞을 못 보니 창남에게 부모는 어떤 보호막도 되어주지 못한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살다 보니 그것 자체로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아이가 홀로 헤쳐나가야 할 일은 안팎으로 험난하기만 하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방정환 선생은 부재하고 무기력한 부모 세대에게서 벗어나 굳건하게 앞으로 나아갈 소년들을 기르는 일에 무척 목말라 했을 터였다. 그래서 일제의 강압에 모든 것을 잃다시피 한 나라의 어린이로 창남이를 비유했을 것이다. 또한 창남이 가진 의연함과 건강한 태도를 나라 잃은 아이들이 잊지 않고 굳건히 독립을 위해 나아가도록 독려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야기에 담았다. 조선의 어린이들이 강제로 수탈당한 세월을 딛고 열심히 학교 공부를 하여 깨어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장차 나라를 되찾는 일을 어린이에게 맡기고 당부하고자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한 발 내딛는 인물상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백 년이 지난 지금, 더 영악해지고 자기중심적이며 관용도 포용도 없어진 듯 보이는 현재의 학교 현실 속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창남이의 성격과 의지를 칭찬하고 창남이와 같은 처지의 비슷한 상황의 친구들을 측은히 생각하자는 의미로 읽지 않기를 바란다. 교실 안에서 어떤 태도와 입장이 모두를 위해 옳은 것인지 생각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칠칠단의 비밀』

방정환 지음, 김병하 그림, 사계절, 2016


『짜장 짬뽕 탕수육』

김영주 지음, 고경숙 그림, 재미마주, 1999


『엄마 마중』

이태준 지음, 김동성 그림, 보림, 2013 





김혜진 - 그림책독립연구자


2011년부터 현재까지 월간 학교도서관저널 신간추천위원으로 그림책 신간 서평을 쓰고 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동아일보 어린이 신간 서평을 격주로 썼다. 한때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으며 그림책으로 할 수 있는 독후 활동에 관심이 많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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