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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조(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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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지씨’는 경기도 소재 문화예술기관의 생산자료 등록과 확산을 위해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온라인 아카이브 플랫폼입니다.
② ‘회원’이란 소정의 가입 승인 절차를 거쳐 지지씨 글쓰기 계정(ID)을 부여받고, 지지씨에 자료 등록 권한을 부여받은 경기도 소재 문화예술기관 및 유관기관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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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경기문화재단은 본 가이드의 내용을 ‘회원’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지지씨 플랫폼의 기관회원 등록 안내 페이지에 게시하여, 자유롭게 내려받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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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가이드의 개정과 관련하여 이의가 있는 ‘회원’은 탈퇴할 수 있습니다.
2. 경기문화재단의 고지가 있고 난 뒤 효력 발생일까지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을 경우, 개정된 가이드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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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지지씨’의 가입 신청은 지지씨 누리집에서 가능합니다. 회원가입을 원하는 기관은 계정 신청서를 작성, 가입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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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분류 | 외부기관 | 경기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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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분류 | 뮤지엄(박물관,미술관)/협회/문화예술공공기관/시군청 담당부서 등 | 본부/기관 |
아이디 | 사업부서명/사업명 | 사업부서명/사업명 |
글쓴이 노출 | 아이디와 동일(한글) | 아이디와 동일(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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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몰라보게 변해버린 화성시의 변화, 그 이야기 속으로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몰라보게 변해버린 화성시의 변화, 그 이야기 속으로 >
-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화성시 장안면 노진리의 토박이, 두렁바위 식당에서 진행된 고광준 선생님과의 인터뷰
흔히 향토(鄕土)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데, 향토는 크게 자신이 태어나거나 오랫동안 생활한 지역을 뜻하는 말로, 범위를 보면 좁게는 마을에서 크게는 시 단위로 규정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향토라는 말에는 저마다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역마다 향토사를 연구하는 단체가 있고, “나 어디 지역 출신이야”라는 공동체적 특징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한편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 말이 있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여기가 그 장소가 맞나 싶을 정도로 변해버린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지금처럼 도시화가 되어가는 사회에서 그 변화의 속도는 더욱 가파르고, 옛 모습은 사진이나 박물관에서 찾아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이러한 변화 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두 눈으로 본 토박이의 이야기는 중요하다. 여기서 토박이에 대한 범주는 해당 지역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해당 지역에서 거주한다는 의미다. 지역의 변화 과정을 목격했던 토박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도시화에 사라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에 “경기도 토박이에 대한 구술사”라는 제목의 첫 사례로 화성시의 토박이인 고광준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주목해보자!
노진2리 마을의 민속신앙과 마을의 변화
고광준 선생님의 인터뷰를 위해 약속한 장소로 이동했다. 인터뷰 장소는 화성시의 대표적인 3.1운동 유적지인 제암리에 위치한 두렁바위 식당이다. 특히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로, 제암리는 화성시 근대사의 아픈 상처이자 잊지 말아야할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식당의 야외 테라스에서 제암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고광준 선생님이 멀리서 걸어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자리에 앉아 두렁바위로 장소를 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 내가 있는 노진리와 김 선생이 사는 호매실이 가운데 지역이라 정했어”라고 말해주었다. 물론 위치상으로 보면 인터뷰 장소가 가운데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어떻게 보면 화성시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지역에서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것은 나름 인상적이었다.
▲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고광준 선생님
인터뷰 시작에 앞서 고광준 선생님의 살아온 생애를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지난 1945년 8월 21일 장안면 노진리에서 태어나셨다. 해방이 되던 날이 1945년 8월 15일이니, 해방둥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로도 노진리를 떠나지 않았고, 인근의 장안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군 입대(1967.12~1970.10) 뒤 검정고시를 거쳐, 1973년 9급 공개채용시험의 합격과 함께 지방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다. 1974년부터 9급 서기보를 시작으로, 지난 2000년 5급인 면장에 이르기까지 공직생활을 했다. 이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해 법학과와 농학과를 졸업하고, 노인 대학의 학장과 화성지역학연구소 등 여전히 지역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으며, 화성지역의 변화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봤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에 관한 기억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해방이 되던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당시의 기억에 대해서는 생각이 나는 것이 없다는 말을 했지만, 한국전쟁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기억을 이야기했다. 우선 전쟁 이후 선생님의 가족은 피난을 가지 않았는데, 반면 서울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왔고, 이 때문에 당시 주거와 식생활이 주요 문제였다고 했다. 식생활과 관련해“ 염장식품, 짠지나 무 같은 것의 국물을 얻어다가 물에 타서 먹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을 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한국전쟁 때는 너무 어렸을 때라 많은 기억은 하지는 못한다고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마을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을의 민속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에 당 할머니를 모시는 사당(=노진 2리)이 있었어, 사당도 지금 있어, 이웃한 노진 5리에 할아버지당이 있는데, 당시 제법 큰 엄나무가 있었지”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엄나무는 땅주인에 의해 베어져 지금은 흔적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나무를 베어낸 뒤 땅주인에게 불길한 일이 닥쳤다는 이야기와 함께 “ 당집 주변의 나무는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고 했다. 또한 당시의 당제는 제법 큰 규모로 이루어졌는데, 출향했던 사람들에게도 연락이 갔을 만큼 마을의 큰 축제였다. 물론 지금은 노진 2리나 노진 5리의 당제(=당굿)는 모두 중단이 된 상태라고 하는데, 이유는 더 이상 당제를 진행할 젊은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마을의 주민 구성이 변한 것인지, 마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렸는데, 이에 1973년 건설된 인근의 남양호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본래 선생님이 살던 노진 2리는 바다가 있었던 전형적인 어촌마을로, 바다를 통해 자급자족을 했던 풍요로운 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양호가 들어서면서 간척지가 되었고, 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졸지에 일을 잃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제법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직업을 찾아 출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선생님의 집 가족들 역시 직업을 찾아 주거지를 옮긴 경우였다.
반면 외지인들의 유입 역시 많이 늘었는데,
역설적이게도 노진리 인근에 위치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이 들어서면서라고 증언한다. 기아자동차와 관련 협력업체가 들어서면서 인근 마을주민들의 취업과 함께 외지인이 유입되면서
마을주민의 구성이 변했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말을 듣다보니 남양호의 건설과 기아자동차 공장의 설치가 우정, 장안지역의 변화를 이끌어
낸 중요한 지점인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 1973년 남양호가 들어서면서 노진리를 비롯한 주변의 모습은
크게 바뀌었다.
교육과 관련한 이야기와 새마을운동 시기의 화성
학교에 다니실 때의 기억이나 주변 교육 여건에 대해 이야기 해줄 것을 부탁드렸는데, 이에 대해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학급의 풍경이다. 선생님이 이야기해주신 학교의 풍경은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선생님의 말을 들어 보자!
“학교(=장안초등학교)까지 7km정도 떨어져 있는데, 걸어 다녔어. 당시에는 모두가 이렇게 다녔거든, 또 같은 학년에서도 나이 차이가 심하게 났어, 심지어 5~6살까지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었어”
특히 여자들의 경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집가는 경우가 있어 전체적으로 학교 다닐 여건이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이러다 보니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단다.
“한번은 인근 마을에 잔치가 있어 방문했는데, 학교 친구가 있는 거야, 만나서 반갑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니, 이 친구가 나를 불러내더라, 그러면서 나이를 이야기하면서 내 동생이 너하고 같은 나이잖아, 체면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않냐며 이야기하더라고”
그럼에도 교육열만큼은 높았다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야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을회관에서 중학교에 못간 아이들을 모아, 강습소처럼 야학을 열었다고 한다. 또한 경인 교대에서 농활을 나오곤 했는데, 주로 마을회관에 머무르면서 낮에는 농사를 밤에는 교육을 진행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주로 활동했던 시기는 공교롭게 새마을 운동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이와 관련해 선생님의 공직생활과 새마을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부탁했다. 우선 새마을 운동과 관련해 마을의 정비와 녹색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당시만 해도 마을의 집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초가집에 대한 개량사업으로 슬레이트로 바꾸기 위해 직원과 함께 지도를 나가 해당 주민들에게 설득하고, 융자나 지원 등에 대해 알려주며 바꿀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새마을 운동의 정비는 주로 도로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에 따라 길이 정비된 곳 중 사유지가 일부 포함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 살았지만, 정(情) 같은 것이 있었다고, 오히려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공익보다 사익을 더 우선하는 모습에 씁쓸하기도 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 수원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팔달벼, 수원벼, 통일벼
한편 당시 녹색혁명이 화두였는데, 지금과 달리 당시는 쌀밥을 먹기가 어려웠던 시절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농업은 조선시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해서 국력의 근본으로 삼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자체의 쌀을 조달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고, 역설적으로 이에 따라 조성된 것이 바로 철로, 인천과 군산, 목포 등지에 만들어진 철도는 역으로 쌀의 수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에 쌀밥에 대한 추억은 남다를 수밖에 없는데, 당시만 해도 혼합밥이나 보리밥을 먹었다고 한다.
즉 해방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쌀 부족은 큰 문제로, 먹고 사는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인 박정희 정부 때 잘 자라는 벼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져 탄생한 것이 통일벼였다. 바로 녹색 혁명의 중요한 사건이자 식량의 자급자족에 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 50원의 뒷면 도안, 통일벼가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통일벼가 잘 자라기는 하지만 맛이 없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농민들 사이에서는 통일벼보다 일반벼에 대한 선호도가 더 높았다고 한다. 또한 일부 농민들 사이에서는 통일벼의 비중은 낮추는 대신 일반벼의 비중을 높이는 편법을 사용했다고, 한편 당시 모심기를 할 때 일일이 손으로 심었는데, 줄모(條植:조식, 모를 심을 때 줄을 치고 심는 것)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벼가 제대로 심어지지 못해 수확량이 감소하는 사례가 있었기에 줄모를 이용해 모를 심도록 지도했다는 것이다. 당시 현장으로 농업 지도를 나가면 퇴비 생산이나 볍씨를 어떻게 담그는지, 통일벼와 일반벼의 종자 비율이 어떤지 등을 지도했다고 하는데, 지금 기준에서 보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만한 일이다.
이후 7급 민원담당을 거쳐 6급 계장으로 승진한 뒤 민방위, 교통행정, 용도계장을 거쳤다고 했는데, 이 가운데 교통행정계장으로 있을 때 오산역 앞에 택시의 승차거부가 문제된 적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경찰서의 교통계장을 앞세워 단속과 함께 광장의 형태를 변경해 역으로 들어가면 무조건 태워서 나오도록 구조를 변경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화성시 공무원이 왜 오산역으로 단속 나가나요?” 라고 물어보니, 당시만 해도 화성이나 오산이 한 지역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종로교회 뒤 후생내과, 옛 화성군청이 있던 자리로, 지금은 표석이 세워져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실제 화성시의 경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근의 수원과 오산, 평택 등을 함께 주목해야 하는데, 일제강점기만 해도 수원과 화성, 오산, 평택의 일부 등은 수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통합이 되었다. 그러다 해방이 된 뒤 수원군이 따로 떨어져나가고, 잔여 지역이 화성군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오산이 따로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화성시가 만들어졌다. 이를 보여주듯 한때 화성군청은 수원 종로거리 뒤에 있는 후생내과 쪽에 있다가 이후 오산을 거쳐 지금은 화성시 남양읍에 위치하고 있다. 즉 화성 시라는 지역의 경계 자체가 수원과 오산을 떼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 인터뷰 이후, 화성시의 옛 이야기를 들려준 고광준 선생님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화성시, 특히 서부지역의 변화 과정에 대해 알 수 있었는데, 해방 이후 화성지역의 모습과 남양호와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이 바꾸어놓은 마을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흔히 역사를 바라볼 때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의 모습을 보는 경우가 있다. 처음 마을의 민속신앙 조사차 노진 2리를 방문했을 때 그저 평범한 시골마을과 다름이 없었지만, 이곳에 바다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바라보니 그 모습을 달라져 있었다. 즉 옛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평생을 살아온 화성 지역의 토박이인 고광준 선생님의 이야기는 책으로는 볼 수 없는 현장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우리 지역의 소중한 한 장면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글 김희태 1982년에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
과를 졸업했다. 현재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
소장 및 화성지역학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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