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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대표적 무형문화재, 도당굿

경기학광장Vol.1 _ Information & news

< 경기도의 대표적 무형문화재, 도당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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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경기도 도당굿

경기도 지역에서 대표적인 민속을 하나 꼽으라면 도당굿이 아닐까 싶다. 도당굿은 경기도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마을굿을 말한다. 이 도당굿은 수원을 비롯한 경기 남부, 부천을 비롯한 경기 서부, 연천․파주를 비롯한 경기 북부, 구리를 비롯한 경기 동부 등 경기 전역에 퍼져 있었으며 인천․강화까지도 그 영향권 안에 있다. 이 정도면 서울을 제외하고 빙 둘러서 경기도 도당굿 문화권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경기도의 민속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도당굿은 199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98호로 지정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경기도에서는 도당굿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구리시 갈매동의 도당굿을 1995년에 시도문화재(15호)로 지정하였다. 최근 2018년에는 도당굿의 대표적 춤사위인 시나위춤도 시도 문화재(64호)로 지정되었다.

구리시 갈매동 도당굿 유가돌기(1996년)

전국 어디든지 마을에서는 공동으로 행하는 의례들이 있다. 이 중에 무당들을 중심으로 의례가 행해지면 ‘○○굿’이라고 하고 유교식으로 행해지면 ‘○○제’라는 명칭이 붙는다. 경기도의 도당굿 이나 동해안이나 남해안 지역에서 행하는 별신굿이 바로 무당들이 중심이 되는 마을 의례들이다. 호남 지역에서는 무당들이 아닌, 주민들로 구성된 풍물패가 중심이 되지만 이를 당산굿이라고 한다.

각각의 특징이 있지만 경기도의 도당굿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도당굿을 할 때는 무녀도 중요하지만 화랭이라는 남무(男巫)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이 화랭이들은 대대로 무업을 세습하면서 악기뿐만 아니라 무가와 재담을 배우고 익히어 그 예술적 경지가 높다. 다음으로, 도당굿을 하기 전에 마을 전체를 돌면서 집집마다 기원을 해 주는 것을 돌돌이 혹은 유가돌기라고 하는데 이러한 풍습이 특징적이다. 물론 다른 마을굿에서도 이렇게 마을을 돌면서 기원을 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도당굿의 경우는 그 규모나 행렬이 성대하여 다른 것들과 구별된다.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대잡이와 무녀가 무리를 이끌고 집집마다 다니게 된다. 이때는 거의 모든 집 마당에 상을 차려 이들을 맞아들이고 무당들은 한바탕 춤과 노래로 기원을 해준다. 이렇게 마을 집들을 모두 돌다가 보며 몇날 며칠이 걸린다. 이 기간은 온 마을이 축제판이다. 마지막으로 도당굿의 음악과 춤이 무척 성대하고 격식이 있다. 도당굿을 오랫동안 지켜봤던 주민들은 제대로 된 도당굿이라면 반드시 ‘삼현육각’을 갖춰야 된다고 말한다. 원래의 뜻은 3개의 현악기와 6개의 피리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민속악에서는 향피리 2인, 젓대(대금), 해금, 장구, 북(혹은 징)을 말한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등장하는 이러한 악기 편성은 도당굿에서도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니만큼 격식과 규모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도당굿에서 추어지는 춤도 다양하여 터벌림춤이나 도살풀이춤 등은 유명하다. 이 모든 춤을 묶어서 도당굿 시나위춤이라 하여 2018년에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삼현육각(김홍도의 풍속화)

도당굿의 역사와 유래

도당굿의 어원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다. 도당굿은 도당신을 모시는 굿이니 도당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도당(都堂)이란 고려와 조선시대 행정의 최고 기관인 도평의사사나 의정부를 일컫는 말이었다. 과거 도청이나 도당이 행정적인 의미 외에 제사 기능을 지녔던 유래가 후대까지 남아 마을의 중요한 의례 공간이면서 제사 대상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도당이란 도시, 도사공, 도편수 등과 같이 으뜸 혹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도와 당이 합쳐져 마을의 으뜸신을 모신 곳을 도당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도당이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곳이라는 의미는 분명하다. 이 도당신은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로 불린다.
이러한 도당굿은 그 유래가 무척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기원을 고대 나라굿까지 보기도 하지만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보면, 도당굿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본래 마을 진산에서 산군(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낸다. 무격이 어지럽게 북을 치고 춤을 추고 노는데 이를 도당제라고 한다. 祭山君於本里鎭山。而巫覡紛若。鼓之舞之 以 妥之。名曰都堂祭。” 이처럼 도당굿은 호환을 막기 위해 무당굿을 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도당굿의 모습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행했던 별기은(別祈恩) 과 흡사하다.

나라에 무당(巫堂)을 두는 것이 벌써 정당치 못한 일인데 소위 별기은(別祈恩)이라는 곳이 10여개 소나 되고 일 년 사철의 제사와 그리고 무시로 있는 별제 등 일 년 간 낭비를 이루 열거할 수 없습니다. 제사 때에는 비록 금주령이 엄격하나 여러 무당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나라의 행사라고 핑계하므로 유관 관리들도 이것을 감히 힐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큰 거리에 모여서 태연자약하게 술타령을 하며 북을 치고 피리를 불고 노래하고 춤추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니 풍속이 아주 더 러워졌습니다. (<고려사> 열전 김자수전)

일제강점기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이런 도당굿은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일제 때 발간된 『조선무속의 연구』에서 개성 덕물산 도당굿을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 덕물산 도당굿이 열릴 때 면 열댓명의 무녀들과 사당패까지 합세하여 그 규모가 대단했고 서낭대를 앞세워 유가를 도는 모습 등은 지금의 도당굿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처럼 과거 무당들이 무리를 이루어 마을을 돌고 마을 제당에 제사를 지내던 도당굿의 전통은 면면히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도당굿과의 만남, 갈매동 도당굿

도당굿은 필자에게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96년경 필자가 민속학에 첫 발을 들여놓을 즈음, 구리시 갈매동 도당굿을 종합 조사하는 팀의 보조연구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도당굿이 열리기 한 달 전부터 날을 잡고 우물을 치우고 장을 보는 과정을 조사하고 밤새워 유가를 도는 모습을 따라 다니면서 고단하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도당굿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갈매동 도당 전경(1996년)

갈매동 도당굿은 음력 3월 초순에 벌어진다. 한 달 전인 음력 2월 1일이 되면 제관들을 뽑는다. 회의를 열어 뽑기도 하지만 필자가 참관했던 1996년에는 대잡이가 신대를 잡고 일 볼 사람들을 점지하는 방식으로 선출하였다. 당주, 숙수, 도가, 시주, 화주가 뽑히면 바로 회의를 열어 도당굿에 필요한 경비와 준비 사항을 결정한다. 음력으로 3월 초하루가 되기 전에 우물을 청소하고 제당과 숙수간도 깨끗하게 정리를 해 놓는다. 주민들은 정성을 들이기 위해 쌀이나 돈을 내 놓는다.
음력 3월 초하루가 되면 본격적인 굿 준비에 들어간다. 먼저, 제일 중요한 제삿날을 정하게 된다. 그 전날 밤부터 모여 있다가 새벽이 되면 책력을 보고 날을 잡는다. 대체로 음력 삼월 삼짇날로 잡힌다. 날이 잡히면 제관들은 당집에 산제 날짜가 적인 방을 붙인다. 아침 일찍부터 만신과 대잡이, 제관들은 우물을 청소하고 제물을 준비한다. 제삿날인 삼일 날이 되면 저녁부터 산제 준비에 들어간다. 떡을 치는 안반 위에 떡과 제물을 조금씩 여러 군데 올려놓고 산할머니에게 기원을 한다. 이것이 ‘안반고사’이다. 안반고사가 끝나면 두부를 직접 만드는데 이를 ‘조포 모시기’라고 한다.

조포 모시기(1996년)

제사상에 올릴 밥도 작은 놋쇠 솥에 짓는데 이를 ‘노구메’라고 한다. 제물이 다 준비되면 산 중턱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제를 지낼 때는 그 금기가 엄격하여 옮기는 사람들 입에는 다 한지를 물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