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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경기도 제사유적에 대한 소고 -온조왕묘(溫祚王廟)를 중심으로-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경기도 제사유적에 대한 소고 >

-온조왕묘(溫祚王廟)를 중심으로-


-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들어가며

필자는 2018년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경기도의 제사유적’을 발간하였다. 그 내용은 경기도의 국가제사와 지방제사를 우선 살펴보고, 다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하 『승람』)․ 『여지도서』, 고종 때 편찬된 『경기읍지』에 기록된 부·목·군·현제사와 제사 유적의 현황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경기도의 명산대천 중 일부가 조선의 국가제사에 편제되어 있었고, 경기도의 지방제사는 3단(壇) 1묘(廟), 즉 사직 단·문묘·성황사·여단 및 기우제단과 기타사묘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중 기타 사묘에는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과 광주의 온왕묘(溫王廟)가 있었다.
마전의 숭의전은 고려 왕실의 종묘 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승람』과 『여지도서』, 『경기읍지』에 모두 나온다. 반면 광주의 온왕묘는 『승람』에는 보이지 않다가 『여지도서』에 새로 나타나는데, 필자는 ‘경기도의 제사유적’ 발간 당시 과문한 탓으로 그 성격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온왕묘는 백제 시조인 온조왕의 사당이다. 『춘관지』권1, 역대제군묘(歷代諸君廟)와 『연려실기술』별집 권4, 사전전고(祀典典故) 제사(諸祠) 및 『임하필기』 권16,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전대시조묘(前代始祖廟) 등에서 조선의 역대 시조묘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는데, 온조왕묘는 그 중의 하나이다.
본 글은 ‘경기도제사유적’에서 활용한 지지(地誌)를 기본으로 하고, 온왕묘=온조왕묘와 관련된 기록을 보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 백제 시조인 온조에 대한 인식과 온조왕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조선 시대에 행해진 역대 시조묘 연구의 기본 바탕이 될 것이다.

2. 직산(稷山)의 온조왕묘

『여지도서』에는 온조왕의 사당을 온왕묘라고 하였고, 남한산성에 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에 있는 온왕묘는 다음에서도 알 수 있다.

○ 숭렬전(崇烈殿) [남한산성 안에 있다. 세조 10년 직산현에 온왕묘를 세웠고, 인조 16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정조 1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백제시조왕, 이서(李曙)[한양의 태묘(太廟)에 보인다.] (『대동지지』2, 경기도 광주부 묘전(廟殿))

○ 온조왕묘는 옛날에는 충청도 직산현의 동북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남한산성에 있다. 직산에 있던 옛 사당은 세조 11년에 창건한 것으로 나라에서 봄과 가을에 축문과 향을 내려 치제하였는데, 선조 정유년에 왜병들이 불을 질러 태워버렸으므로 곧 폐지되었다. 계묘년에 충청 감사 유근(柳根)이 백제의 시조 온조묘를 직산에 다시 세우기를 청하였다. 본 고을의 읍지(邑誌)에는 임진병란 때 불에 탄 후 그대로 폐지되었다고 하였다. 인조 병자년 3월에 남한산성에 온조묘를 세웠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남한산성 사당의 창건 연월은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병자년 겨울에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을 때, 예조판서 김상헌을 보내 제사하였다.(『연려실기술』별집 권4, 사전전고 제사)

『대동지지』와 『연려실기술』의 내용을 보면 세조 10년(1464) 내지 11년에 직산현에 세운 온왕묘(온조왕묘)는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화재로 폐허화되어 폐지되었고, 인조 14년(1636) 3월 내지는 인조 16년(1638)에 남한산성으로 옮겼으며, 정조 19년(1795)에 숭렬전으로 칭호를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 『임하필기』에 따르면, “온왕묘는 남한산성에 있으며 또 직산현의 동북쪽에도 있다.”고 한다.
직산현의 온조왕묘는 『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온조왕묘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 우리 세조 11년에 비로소 세웠고,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서 제사 지내게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16, 충청도 직산현 사묘)

○ 백제시조 온조왕묘 [현의 동·북쪽 사이 5리에 있다. 금상(今上) 11년 기유 7월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봄·가을에 향축을 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한다.](『세종실록』권149,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직산현)

위의 내용에 따르면 직산현 동북쪽 3리 내지는 5리에 있는 온조 왕묘는 세조 11년(1465)에 세웠고, 봄·가을에 향축을 내려 제사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직산현은 “본래 위례성(慰禮城)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도읍을 만들고 나라를 세웠다.”고 한데서, 조선시대 온조왕묘가 직산현에 세워진 이유를 알 수 있다. 온조왕묘의 치제(致祭)와 관련된 일련의 내용은 다음에서 알 수 있다.

○ 예조에 전지하기를, “단군과 기자의 묘제(廟制)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에게 묘를 세워 치제하는 일을 모두 고제(古制)에 상고하여 상세하게 정하여 아뢰라.”하였다.(『세종실록』권37, 세종 9년 8월 21일)

○ 호조에서 충청도 감사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이제 하교를 받자와 백제 시조의 묘우(廟宇)를 이미 직산현에 세웠으니, 청하건대 평양부의 기자전(箕子殿)에 따라 본 고을의 노비 각 2인을 정하여 이를 지키게 하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권44, 세종 11년 5월 7일)

○ 예조에서 아뢰기를,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이미 사당을 세웠으니, 청하건대 사전(祀典)에 기재하고 치제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권45, 세종 11년 7월 4일).

○ 호조에서 아뢰기를, “충청도의 백제 시조와, 경상도의 신라 시조와, 평안도의 고구려 시조의 제전(祭田)을 각기 2결씩 급여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1월 10일)

우선 세종 9년(1427)에 단군과 기자의 묘제와 삼국의 시조묘를 세워 치제하는 일을 정하게 하였고, 세종 11년(1429) 5월 7일 에는 백제 시조의 묘우에 평양부의 기자전과 같이 노비 2명을 두었다고 한다. 세종 11년 7월 4일에는 삼국 시조를 사전에 편제하여 치제할 것을 건의하였고, 세종 13년(1431)에는 호조에서 백 제·고구려·신라 시조의 제전(祭田)을 2결씩 급여할 것으로 청하였다. 그리고 온조왕묘의 위판(位版)을 정하였고 중수하기도 하였다.

○ 예조에서 여러 도의 순심별감(巡審別監)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악(嶽)·해(海)·독(瀆)·산천의 단묘(壇廟)와 신패(神牌)의 제도를 상정하기를 “···· 나라에서 행하는 직산현의 백제 시조는 중사이고, 사묘의 위판 은백제 시조라 쓴다.····”하였다.(『세종실록』권76, 세종 19년 3월 13일)

○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충청도 직산에 있는 백제 시조묘가 해가 오래 되어 무너져 허물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소재지인 직산과 각 고을로 하여금 협력해 수즙(修葺)하게 하소서.”하니, 문종이 그대로 따랐다.(『문종실록』권9, 문종 1년 9월 16일)

세종 19년(1437) 예조에서 악·해·독 산천의 단묘와 신패의 제도를 상정하면서 온조왕묘의 위판을 ‘백제시조’라 쓴다고 하였고, 문종 1년(1451)에는 허물어진 백제 시조묘를 수즙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온조왕묘는 『연려실기술』을 보면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화재로 폐허화되어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이 주목된다.

○ 충청 감사 유근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묘(墓)를 직산 땅에 세우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수정실록실록』권37, 선조 36년 6월 1일)

○ 충청 감사 유근이 아뢰기를, “백제의 시조 온조의 사당이 직산에 있습니다. 변란을 겪은 뒤로는  비록 물력이 매우 탕갈되기는 했습니다마는, 폐추(廢墜)된 것을 수리 복구하는 전례(典禮)를 마땅히 강구해야 할 것이니, 예관으로 하여금 정탈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어 예조가 아뢰기를“, 역대 시조의 사당에는 봄과 가을의 중간 달에 중사(中祀)를 차리게 한 것이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는, 난리가 일어난 뒤로는 모든 제사를 미처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숭의전·기자전·삼성사(三聖祠)는 지난해에 수리했기 때문에, 현재 봄과 가을에 향축을 내려 보내 제사를 차리고 있습니다. 본도의 직산 땅에 있는 온조전은 장계대로 본도에서 형편에 따라 수리하고서 계문한 다음 처치할 일로 행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선조실록』권163, 선조 36년 6월 17일)

선조 36년(1603) 6월 1일에 충청감사 유근이 온조왕의 무덤을 직산에 세울 것을 청하고 있으며, 6월 17일에는 백제 시조 온조의 사당이 변란을 겪어 폐추(廢墜)되었다고 하면서 수리 복구할 것을 아뢰자 전교하였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직산의 온조왕묘는 이 때 다시 세워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임하필기』에 직산현의 동북쪽에 온조왕묘가 있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여지도서』에는 온조왕묘가 단묘조가 아닌 고적조에 보이며 정유재란 때 불타 제사의 예가 폐지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광여도」 직산현과 「해동지도」 직산현 지도를 보면 온조왕묘가 아닌 ‘온조묘기(溫祚廟基)’가 그려져 있다.

<도면 1>「해동지도」 충청도 직산현 - 온조묘기와 위례성이 보인다.

3. 광주(廣州)의 온조왕묘

『대동지지』에는 인조 16년(1638)에, 『연려실기술』에는 인조 14년(1636) 3월에 직산의 온조왕묘를 남한산성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남한산성에 온조왕묘가 세워진 시기와 관련해서 우선 다음이 참고된다.

○ 예조가 아뢰기를, "온조가 이곳(남한산성)에 도읍을 정하여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는데, 반드시 그 신(神)이 있을 것입니다. 옛사람은 군사 작전을 벌이며 주둔할 때에 반드시 그 지방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대가가 머물러 계시면서 성황에도 이미 사전을 거행했는데, 온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인조실록』권33, 인조 14년 12월 25일)

위의 내용을 보면 인조 14년 12월 25일에 온조에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이 때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었다. 병자호란은 인조 14년 12월 9일에 시작하여 되어서 이듬해인 인조 15년 1월 30일에 끝난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문헌비고』에는 남한산성에 온조왕묘가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하였지만, 인조 14년 12월 25일에 온조에게 치제한 사실로 미루어, 온조왕묘는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졸기(卒記)이다.

○ 완풍부원군 이서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상이 그를 위하여 통곡하였는데 곡성이 밖에까지 들렸다. 의복과 명주를 하사하여 염습하게 하 고 7일 동안 소선(素膳)하였으며, 도성에 돌아온 뒤에는 빈소를 그 집안에 들이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이서는 효령 대군 이보(李補)의 후손이다. ··· (이서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감독하여 완성시키고 군자(軍資)와 기계(器械)를 구비하지 않음이 없어 마침내는 대가가 머물면서 의지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특별히 온왕묘를 세워 이서를 배향하도록 명하였다.(『인조실록』권34, 인조 15 년 1월 2일)

이서는 병자호란에 앞서 남한산성을 견고하게 개축한 공을 인정받아 인조 15년(1637) 1월 2일에 온조왕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예조에서 인조 15년 1월 8일에 앞서의 제사(인조 14년 12월25일)가 미진하다고 아뢰자 온조왕묘에 정식으로 제사지냈다.
남한산성은 “백제 시조 온조왕이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 계묘에 국도(國都)를 위례성(慰禮城)에 세웠다가 ··· 14년 병진 정월에 도읍을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 하였다.”7) 고 한 것과 “··· 남한은 바로 온조가 수백년 동안 도읍으로 정하였던 곳 ···· ”, “(남한)산성은 바로 온조왕이 나라를 개창(開創)한 땅”이라고 한데서 온조왕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온조왕묘의 위판(위패)은 다음에서 알 수 있다.

○ 남한산성에 사당을 세워 온조왕을 제사하고 위판(位版)을 고쳐 써서 ‘백제시조왕’이라 칭하였다. 예조에서‘ 우리나라의 사서(史書) 및『 여 지승람』에 모두 온조왕으로 썼는데, 세대가 멀어져서 명호 및 시호를 분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의 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거하여 위판에 쓰자고 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온조는 이름인 듯한데, 위판에 바로 쓰는 것이 어떠할지?” 했다. 예조가‘ 백제시조’ 라고 쓰기를 청하니, 상이‘ 왕(王)’자를 더 써넣도록 명하였다. (『인조실록』권38, 인조 17년 2월 2일)

위의 내용을 보면 조선의 역사책 등에 온조왕이라 썼는데, 시간이 오래되어 명호 및 시호를 분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인조 17년(1639)에 위판을 고쳐 ‘백제시조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온조왕묘와 관련된 제향 축문의 칭호도 바로잡았다.

○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역대 시조의 제향 축문의 칭호를 바로잡도록 하였다. 아조(我朝)에서는 역대의 수명(受命) 한 군주에 대하여 보사(報祀)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남구만이 건의하기를, “남한산성의 온조왕 제사 축문(祝文)에 온왕(溫王)이라 칭하였는데, 만일 그 성을 들어서 칭한다면 마땅히 고(高) 자를 칭하여야 하고, 만일 그 당시의 고질(古質)한 칭호를 따라서 그 이름을 든다면 마땅히 온조왕이라 칭하여야 하며, 만일 그 이름을 바로 거명하는 것을 꺼린다 면 백제시조왕이라 칭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름의 한 글자만 따서 온왕이라 칭하였으니, 이는 사리에 있어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청컨대 예관으로 하여금 상세히 의논하여 바로 고치도록 하소서.”하였는데, 예관이 아뢰기를, "다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경주의 신라 시조 축문에는 ‘신라시조’라 칭하였고, 마전의 고려시조 축문에는 ‘고려태조대왕’이라 칭하였으니, 모두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청컨대 백제 시조의 축문에는 ‘백제시조왕’이라 칭하고, 신라 시조의 축문에는 왕이란 한자를 첨가시키며, 고려 시조의 축문에는 대란 한자를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숙종실록』권28, 숙종 21년 4월 17일)

남한산성의 온조왕 제사 축문에 온조왕 이름의 한글자만 따서 ‘온왕’이라 칭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백제시조왕’ 이라고 칭하고, 신라는 ‘신라시조왕’, 고려는 ‘고려태조왕’으로 역대 시조 제향 축문의 칭호를 숙종 21년(1695)에 고쳤다.
그리고 영조 30년(1754)에 온조왕의 묘를 봉심(奉審)하게 하였고 영조 39년(1763)에는 온조왕묘를 중수하였다. 중수된 온조왕묘는 정조 19년(1795)에 숭렬전으로 고쳤다.

○ 백제 시조의 묘호(廟號)를 숭렬전이라 하였다. 광주판관 이시원(李始源)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에 백제 시조의 사당이 있는데 아직도 그 이름이 없으니 사체상으로 외람스럽기만 합니다. 마전의 숭의전이나 평양의 숭령전과 같은 예에 의거하여 예문관으로 하여금 편액의 이름을 정하게 한 뒤 본부에서 써서 현판을 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역대 후왕(后王)을 제사지내는 곳에는 모두 부르는 이름이 있으니, 예컨대 기자의 숭인전이나 단군과 동명왕의 숭령전이나 신 라 시조의 숭덕전이나 고려 시조의 숭의전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유독 백제 시조의 사당에만 아직껏 전호(殿號)가 없다니 이는 흠이 되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공사 간의 문적(文跡)에 이름을 가지고 임시로 일컫는 것은 외람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일단 그런 줄 안 이상에는 즉시 바로잡아 고쳐야 마땅하니, 숭렬전이라는 칭호로 『문헌비고』와 『대전통편(大典通編)』·『오례의(五禮儀)』등 책을 즉시 세보개정(洗補改正)토록 하라. 그리고 마침 연석(筵席)에서 하교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숭렬전의 편액은 대신에게 명하여 쓰도록 하고, 현판을 거는 날에는 수신(守臣)을 보내어 제사지내 주도록 하라. 제문은 내가 직접 짓겠다.” 하였다.(『정조실록』권43, 정조 19년 9월 18일)

위의 내용에 따르면 정조 19년에 광주판관 이시원이 온조왕묘의 사당에 이름이 없는 것이 외람하여 편액의 이름을 정하여 현판을 걸기를 아뢰자, 정조는 기자의 숭인전이나 단군과 동명왕의 숭 령전, 신라 시조의 숭덕전, 고려 시조의 숭의전 등 다른 역대 시조묘에는 전호가 있다고 하면서 숭렬전이라는 전호를 내렸다.
한편 남한산성 안에는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한 김상헌·정 온·홍익한·윤집·오달제 등을 제향(祭享)하는 현절사(顯節祠)도 있다. 정조·철종·고종은 온조왕묘와 현절사에 관원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하였는데, 정조는 “옛 도읍을 생각하고 곧은 충절을 높여 장려하는 아름다운 법에 관계된다.”고 하였다.

<도면 2>「해동지도」 광주부 - 남한산성 안에 온왕묘와 현절사가 보인다.


4. 나가며

조선은 역대 시조의 사당을 세웠다.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는 환인·환웅·단군을 향사하는 사당인 삼성사를 비롯하여 숭령 전·숭인전·숭덕전·동명왕묘 등이 그것이다. 숭령전은 평양부의 성문 밖에 있는 것으로, 단군과 고구려 동명왕을 제향하였고 숭인전은 평양부의 성 밖에 있는데, 기자를 제향하였다. 숭덕전은 경주부의 남쪽 월남리에 있으며 신라 시조를 제향하고 경순왕을 배향하였다. 동명왕묘는 고구려 동명왕을 모신 사당으로, 평양성 밖에 있고 단군과 함께 모신 사당이다.
조선시대 온조왕묘는 왜란 이전에는 직산에 있었지만, 그 후에는 남한산성에 있었다. 직산의 온조왕묘는 건립 시기가 기록에 차이가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록에는 왜란을 계기로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직산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남한산성의 온조왕묘 역시 그 건립 시기가 다르게 나온다. 따라서 앞으로 이들 기록의 상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본 글은 조선시대 온조왕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내용을 스케치한 것으로, 백제 당대의 역사적 사실과 다르기도 한다. 특히 직산과 남한산성이 한국 고대에 차지하는 위상은 다양한 기록과 연구 성과를 통해 밝혀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백제 시조인 온조왕과 온조왕묘에 대한 이해는 넓고 깊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여지도서』, 『대동지지』, 『경기읍지』, 「해동지도」, 「광여도」, 『明谷集』, 『춘관지』, 『연려실기술』, 『임하필기』, 『세종실록』, 『문종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실록』, 『인조실록』, 『숙종실록』, 『정조실록』,
채미하, 2018,『경기도 제사유적』, 경기문화재단.



글 채미하

경희대학교에서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한국고대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고대 국가제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례에 관심을 가지면서, 중국과 일본 그리고 고려·조선과 비교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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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1 _ 2019 여름창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08.16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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