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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비들의 토지매매

경기학광장Vol.2 _ Information & News

< 남한산성을 거닐다. 그리고 마주하다. >


- 경기학광장Vol.2 _ Information & News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통사회의 토지매매문서에는 단순히 토지를 사고 파는 것 이외에 매매 관계자의 이름은 물론 사회적 신분, 토지 소재지의 지명(地名), 토지 가격, 토지를 매매하는 목적이나 이유 등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정보가 담겨있다. 토지매매문서를 보면, 특히 노비들이 양반을 대신해서 매매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지명들도 있다. 토지를 매매하는 목적은 흉년을 당해 살기가 어렵거나, 갑자기 초상이 나서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고리대금을 빌렸다가 갚을 길이 없다거나, 또는 거주지가 멀어서 농사를 짓기가 어렵다는 등의 이유가 일반적이었다.



토지를 사고팔 때 작성하는 문서가 토지매매문서이다. 토지매매는 토지를 매입하는 매수인과 양도하는 매도인이 서로 사고 팔겠다는 쌍방 합의와 토지의 대금 지불, 그리고 토지 양도의 절차로 진행되는데, 이 매매관계를 증명하는 문서가 토지매매문서인 것이다. 토지를 사고 파는 행위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일이다. 그래서 현재 남아있는 고문서들 중 토지매매문서가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의 토지매매문서에는 단순히 토지를 사고 파는 것 이외에 매매 관계자의 이름은 물론 사회적 신분, 토지 소재지의 지명(地名), 토지 가격, 토지를 매매하는 목적이나 이유 등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정보가 담겨있기 때문에 지역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경기도 광주(廣州)의 토지매매문서 약 120여 건이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되어 있는데, 그 문서들 중 약 100여 건이 동부면(현재의 하남시)의 토지매매문서이다. 그렇다면 동부면의 토지매매문서에는 어떤 정보들이 담겨 있을까? 먼저 동부면 소재의 토지와 관련이 있는 양반, 평민, 노비 등 여러 신분계층들이 눈에 띤다. 장례촌의 김선달, 박생원, 덕풍리의 허주부, 이생원, 취곡(수리골)의 김생원, 산곡 건류평의 홍생원, 유생원, 창우동 작평의 박생원 등 양반은 물론 이씨댁 노비 칠뜨기(七得), 유생원댁 노비 작은놈이(者斤老尾), 박생원댁 노비 얌전이(也音田) 등 남녀 노비들의 이름도 보인다. 특히 노비들의 이름 중에는 예를 들면 최씨댁 노비인 삼복이는 ‘三福’ 또는 ‘三卜’으로 쓰기도 하고, 박생원댁 노비 한금이도 ‘漢今’, ‘汗今’으로 쓰는 등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 노비들은 한금, 윤금과 같이 이름의 뒷 자가 ‘금’자이거나 분이, 복이, 동이와 같이 ‘이’, 갑덕, 순덕 처럼 ‘덕’, 정월, 이월처럼 ‘월’자가 많았다.



문서의 형식

그렇다면 조선시대 토지매매문서에는 어떤 정보들이 더 들어 있는지 광주의 토지매매문서를 사례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토지매매문서를 작성하는 형식은 먼저 첫 줄에 연호와 간지를 쓰고 토지 매매문서가 작성된 월일, 매수자 이름, 〜전(前), 또는 〜처(處), 댁(宅) 등을 기재한다. “도광(道光) 23년 계묘(癸卯) 4월 27일 석경석 전(前) 명문(明文)”을 예로 들면 여기에서 도광은 연호, 계묘는 간지, 4월 27일은 월일, 석경석은 토지 매수자 이름, 명문은 토지 매매문서이다. 도광은 중국 청나라의 연호이며, 도광 23년은 1843 년 계묘년이다. 광주의 경우, 1년 중 토지매매문서가 작성된 시기는 10월부터 4월까지가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른 지역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 이유는 추수한 후부터 파종하기 전까지 농사를 짓지 않는 농한기를 주된 매매기간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매매의 사유

둘째 줄에는 토지를 매매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적어 넣었는데, 즉 흉년을 당해 살기가 어렵거나, 갑자기 초상이 나서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고리대금을 빌렸다가 갚을 길이 없다거나, 또는 거주지가 멀어서 농사를 짓기가 어렵다는 등의 이유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가면 토지를 매도하는 구체적 이유를 생략하고 단순히 ‘돈이 필요하여’ 정도만 기재하였다.
경기도 광주의 경우에도 1679년 양인 이만술이 윤생원댁 노비 수리금에게 매도한 당정섬 토지문서에는 ‘집안이 궁핍하여’, 1862년 김생원댁 노비 종득이 신문억에게 매도한 취곡(수리골) 토지문 서와 1702년 한홍신이 이숭덕에게 매도한 중대면 오금리 명문에는 ‘가사가 빈한하여’였다. 1698년 홍생원댁 노비 예만이 최생원댁 노비 작은놈(自斤者)에게 매도한 동부면 건류평 토지문서에는 ‘상전 댁에 초상이 나서’, 그리고 1779년 석치벽이 이운대에게 매도한 덕풍동 토지문서에는 ‘환상을 납부할 길이 없어서’, 1834년 박근춘이 김영서에게 매도한 가지동 산지문서에는 ‘2년 동안 흉년이 들어 생활할 길이 없어 부득이’라는 토지매매의 구체적 이유가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광주 역시 ‘돈이 필요하여’라고 간단히 기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비가 주인 대신 매매에 참여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양반들이 자기의 신분을 기재하고 직접 토지매매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양반댁의 노비들이 상전을 대신해 토지매매에 참여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양반들이 자신의 이름이 토지매매문서에 기재되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1876년에 거래된 덕풍리의 토지매매문서에는 매도자가 박생원댁 노비 삼만(三萬)이고 매수자는 안병사 댁 노비 백중, 이 매매의 증인을 선 사람은 윤생원댁 노비 완이, 토지매매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임생원댁 노비 순득이로 모두 양반댁 노비들 뿐이다. 물론 노비도 자신의 토지를 소유, 매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비 자신의 토지를 매매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러한 경우를 제외하고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노비는 토지매매 과정에서 증인이나 문서 작성자로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씨댁의 노비 삼복이는 매년 한 차례 이상 7년 동안 장례촌, 덕풍리 등에서 증인과 문서 작성자로 참여하고 있고, 그 동생으로 보이는 작은 삼복(小三卜)이도 증인을 서고 있다. 삼복이는 지금으로 보면 아마 부동산 전문가가 아닐까 추측된다. 동부면에서 노비로서 매도자나 매수자, 증인, 문서작성자로 관여한 사람들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토지의 이력

다음으로 토지매매문서에는 매도하는 토지를 어떻게 취득했는가를 기재하는데, 예를 들면 1621년 申鍵○이 신천령에게 매도한 당정섬 밭은 처가 쪽에 전해오는 토지이고, 1679년 양인 이만술이 윤생원댁 노비 수리금에게 매도한 당정섬 밭은 장인이 생시에 매수한 땅이다. 1688년 오촌숙부 이회가 오촌조카 이정유에게 매도한 당정섬 밭은 조상 때부터 전래해 온 토지이며, 1852년 배쾌성이 김 씨댁 노비 대득이에게 매도한 제우평 논은 대대로 전해오는 토지이다. 이 토지는 75냥에 매도했는데, 그 다음 해인 1853년 유칠곡댁 종중에 82냥에 다시 매도되었다가 1864년 다시 이생원댁 노비 작은복이에게 130냥에 매도되었다. 12년 여 만에 땅값이 약 2배 가까이 올랐음을 알 수 있다. 1751년 이시춘이 매도한 계모우 논은 할아버지가 구입한 토지이며, 그 외에도 자기가 매수한 토지들도 있다.

토지의 위치, 지번, 전답의 크기

그 다음으로는 매도할 토지의 위치, 지번, 전답의 크기를 기재하는데, 예를 들면 1891년 작성된 장씨댁 노비 이덕이의 토지매매문서에는 “광주 동부면 장례촌 복재 패자 55전 4부 7속 1일경과 성자 제초 7전 4부 3속 초8전 1부 8속 반일경 합1일 반경(廣州東部面長禮村伏在沛字五十五田四負七束一日耕果性字第初七田四負三束初八田一負八束半日耕合一日半耕)”이라고 기재되어 있 는데, 광주 동부면 장례촌은 토지의 위치이고, 패자 55전은 토지의 지번이며, 4부 7속 1일경은 토지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토지의 지번을 천(天)은 1번지, 지(地)는 2번지, 현(玄)은 3번지 등 천자문의 순서로 매기고, 그 안에서 또 나뉘는 세부 지번은 일(一), 이(二), 삼(三)으로 기재하였다. 토지의 크기에서 부(負)는 ‘짐’으로 4부는 네 짐이다. 1898년 작성된 최순단 토지매매문서의 동부 장례동 외자(外字) 61답은 그 크기가 2두락 3복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두락은 ‘마지기’를 말하는 것이고, 복은 부와 같은 뜻이다.
토지의 크기 다음으로는 토지의 가격을 기재하였다. 예를 들면 1628년에 작성된 신천령의 토지매매문서에는 당정섬 배자 밭 7복 1일경의 토지 가격이 정목(正木) 10필이었고, 1688년 작성된 이정 유의 토지매매문서에는 당정섬 회자 밭 1일경 3복 1속이 은자(銀子) 2냥이었으며, 1843년에 작성된 석경석의 토지매매문서에는 동부 장례촌 염자 밭 3작 6두락 5부 4속이 전문(錢文) 250냥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는 목면, 소, 말, 쌀 등 지불 수단이 다양하였으나 17세기 이후 상평통보가 발행되면서부터는 전문이 지불 수단의 기준이 되었다.
동부면의 경우, 문서의 건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매매는 한 번에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장심여, 이문회, 석경석, 안병사댁 노비 백중과 윤오위장댁 노비 분이 등 몇몇 사람은 여러 차례에 걸쳐 토지를 사고 파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기간의 길고 짧은 차이는 있지만 사고 파는 과정에서 매수가와 매도가가 크게는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안병사댁 노비 백중은 1861년과 1876년, 1881년 3차례에 걸쳐 매득한 토지를 1894년과 1896년 두 해에 모두 매도했는데, 1861년 유원태에게서 480냥에 매입한 장례촌 휴자 33답은 1894년 4,500냥에 매도하였고, 1876년 박생원댁 노비 삼만에게서 420냥에 매입한 덕풍 휴자 43답과 1881년 최성완으로부터 280냥에 매입한 덕봉 휴자 84답은 1896년 4,000냥에 매도하였다. 백중은 약 15년∼33년 사이에 1,180냥에 매입한 토지를 8,500냥에 매도해 7,320냥의 매매차익을 올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토지매매문서에는 이후 만약 자손 중 누구라도 매도 토지와 관련하여 분쟁을 제기하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바로 잡으라는 내용을 적어 넣고, 토지주, 증인 문서 작성자의 이름과 사인을 하면 토지매매문서로서의 형식이 모두 완성되었다. 토지주는 토지의 성격에 따라 답주, 전주, 재주 등으로 표기하였다. 글씨를 몰라 이름을 쓸 수 없거나 사인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손바닥을 문서에 대고 그리는 경우도 있었다.


글 김세민

1954년생,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원대, 건국대, 이화여대, 공주대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하남역사박물관 관장 및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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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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