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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해주정씨 고문서로 읽는 경기 이야기

경기학광장Vol.2 _ Column & Study

< 남양주 해주정씨 고문서로 읽는 경기 이야기 >


- 경기학광장Vol.2 _ Column & Stu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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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가운데 하나인 사릉이 있다. 그리고 사릉 내에는 해주정씨 해평부원군 종가의 선영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남양주 사릉의 해주정씨 해평부원군 종가는 조선초부터 형성된 왕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성부에 계속 거주해 오다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선영이 있는 양주목으로 옮겨왔다. 이 종가에는 1400년대 중반 이래로 형성된 1,800여 점에 달하는 조선시대 고문서가 전래되고 있어 종가에 전래된 600여 년이 넘는 세월의 조각 속에서 경기도의 옛 이야기 몇 토막을 꺼내 읽어보고자 한다.

사릉과 해주정씨

남양주 사릉(思陵)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1440-1521)가 모셔진 곳이다. 처음에는 민가의 여느 무덤과 다름없이 유지되어 오다가 1698년(숙종 24)에 이르러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과 더불어 능호를 부여받았다. 왕위를 잃은 단종과 정순왕후는 결국 노산군과 노산군부인으로 생을 마쳤다. 그들의 무덤은 왕실의 묘제를 따르지 않고 민가의 묘처럼 평범하게 유지되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왕위가 회복되면서 능(陵)으로 조성 되었다.
국가의 규례를 따라 정순왕후의 무덤이 왕후의 능으로 조성될 때 원칙적으로는 그 경내에 있던 해주정씨 집안의 묘는 모두 이장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전기 이래 해주정씨 집안에서 정순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무덤을 수호해 온 의리와 정성을 높이 산 왕의 윤허로 해주정씨 집안의 묘를 그대로 둔 채 능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여타 조선왕릉과는 달리 지금까지 사릉과 해주정씨 집안의 묘가 같은 경내에 함께 어우러져 온 배경이다.

조선초 왕실과 맺은 겹혼인

한성부에 거주하다가 18세기 후반에 들어 남양주로 옮겨 온 해주정씨 집안은 조선초 정이(鄭易)-정충경(鄭忠敬)-정종(鄭悰)-정미수(鄭眉壽)로 가계가 이어진 집안이다. 정이는 맏딸(예성부부인 정씨)를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아들)에게 시집보냈고, 정충경도 셋째 딸(춘성부부인 정씨)를 영응대군(永膺大君, 세종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정충경의 아들 정종은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를 부인으로 맞아 외아들 정미수를 낳았다. 이처럼 조선초에 해주정씨 집안은 정계의 중심에서 왕실로부터 사위를 얻기도 하고, 공주를 며느리로 맞기도 했다.
이 집안에는 놀랍게도 이 당시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 1400년대에 작성된 고문서 원본이 여러 점 남아 있다. 1450년(세종 32)에 정충경의 부인 여흥민씨가 딸 춘성부부인에게 재산을 나누어 줄 때 작성한 문서, 1468년(세조 14)에 문종의 후궁 숙빈홍씨가 경혜공주에게 노비를 나누어 줄 때 작성한 문서, 1473년(성종 4)에 경혜공주가 아들 정미수에게 토지와 집을 물려줄 때 작성한 문서, 1494년(성종 25)에 영응대군으로부터 버림받은 춘성부부인 정씨가 친정조카 정미수에게 자신의 노비, 토지, 집 등을 물려주면서 작성한 문서 등이 작성 당시의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전래되고 있다.


1473년 경혜공주가 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나누어 줄 때 작성한 문서. 가운데 붉은색 도장이 바로 경혜공주의 도장이다.

그런데 단종이 폐위된 후 단종의 복위 움직임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정종은 몇 차례 유배길에 올랐고, 결국엔 능지처참을 당했다. 해주정씨 집안은 급변하는 당시 상황에 차분하게 대처하고자 했지만, 결국은 혈연으로 이어진 무게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영양위 정종이 죽임을 당한 후 세조는 그의 처자인 경혜 공주와 정미수에게까지는 화가 미치지 않게 해주었다. 이후 정미수는 예종 대부터 관직에 나아갔고, 중종반정 때에는 공로를 인정 받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의 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공신 집안으로서의 든든한 배경을 추가로 얻게 되었다.

경기 고을의 사또를 지낸 정식과 정중휘 부자

조선후기에 이르러 이 집안의 직계 자손 가운데 정식(鄭植)은 남양도호부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정중휘(鄭重徽)는 경기도관 찰사에 제수되었다. 정식이 남양도호부사를 지낼 때 작성된 문서 가운데는 1660년(현종 1) 말부터 1661년(현종 2) 초까지 연이어 제출된 사직 요청서가 여러 점 남아 있어 관심을 끈다. 조선시대 관료가 왕에게 사직을 청한 사직 상소(上疏)는 종종 언급되곤 하지만, 현직 수령이 자신의 휴가나 사직을 위해 제출한 문서의 원본이 남아 있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당시 남양도호부사 정식은 자신의 병세가 갈수록 심해져서 공무를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호소하면서 다섯 차례나 관찰사에게 문서를 올렸다. 그러나 끝내 관찰사는 몸조리를 위한 며칠간의 휴가만을 허용할 뿐 사직의 청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한 도 전체를 관할하고 있던 관찰사로서는 수령들의 개인 사정을 모두 들어줄 경우 경기도 모든 고을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생길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사직까지는 들어주지 못하고 몸조리를 위한 얼마간의 휴가만 허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1660년 남양도호부사 정식이 병을 이유로 경기도관찰사에게 사직을 청한 문서

정중휘는 1694년(숙종 20) 5월 25일에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 수군절도사 순찰사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에 제수되었다. 경기도 전역의 행정과 군정을 왕으로부터 위임받아 처리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조선에서 관찰사라는 자리는 책임이 막중한 직임이었기 때문에 일반 군·현 단위의 수령을 임명할 때와는 달리 임명장 외에도 왕이 직접 내리는 장문의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별도로 발급하였다. 정중휘가 경기도관찰사에 제수될 때 왕이 내린 교서와 유서의 원본도 지금까지 실물로 전하고 있어 과거 관찰사 자리에 오른 시절의 영화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정중휘는 관찰사를 지낸 뒤 1697년(숙종 23) 생을 마쳤다. 처음에는 충주에 묘소를 마련했다가 1761년(영조 37)에 다시 양주의 선영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해주정씨 집안에서는 일찍이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이력을 들어 양주목사에게 전례에 따라 분묘 조성 등에 필요한 인력 등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당초 기대와는 달리 양주목사는 당시 왕의 명령이 지엄하여 수령이 임의로 인력 등을 지원하기는 어려우니 경기감영에 요청하여 감영의 지시가 내려진다면 지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조심스런 답변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관의 지원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관찰사를 지낸 사람에 대한 관행적인 예우 요청과 당시 관가에 형성된 엄한 기강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1694년 정중휘를 경기관찰사에 제수하면서 내려진 왕의 교서(위) 및 유서(아래)


1761년 정중휘의 묘를 이장할 때 양주목에 올린 문서

양주와 고양에 조성된 묘소 관리

해주정씨 집안은 대대로 양주목과 고양군에 있는 선영 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여 왔다. 양주목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후기에 사릉으로 조성된 해주정씨 집안의 세장지(世葬地, 세대를 이어 조성된 묘역)가 있었다. 이곳은 수목이 남달리 잘 조성되었던 탓인지 종종 국장이 있을 때도 인부들이 나무를 베어가는 경우가 있었고, 인근 주민들이 함부로 출입하거나 몰래 묘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대해 해주정씨 집안에서는 경우에 따라 대응 전략을 달리하였다. 때로는 노산대군부인(정순왕후)의 묘소 수호를 이유로 예조(禮曹)에 직접 조치를 요구하기도 했고, 조선시대 여느 양반가와 마찬가지로 이들이 살고 있는 양주목사에게 지역민들의 부당한 행동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기도 하면서 집안 대대로 이어온 선영 관리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 고양군 대자리(大慈里)에는 조선전기부터 영양위 정종과 경혜공주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자손들이 묘소 인근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묘소 관리를 비롯한 인근 토지에 대한 소유권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묘소 관리를 묘인근에 사는 묘지기에게 맡기면서 근처 전답에 대한 관리까지도 조건 없이 맡겨 왔는데, 어느 해에 이르러 예기치 못한 분쟁이 발생하였다. 사건을 요약하면, 1700년대에 들어 해주정씨 집안에서 그동안 믿고 맡겨왔던 묘지기가 다른 집안의 묘지기를 겸해 오면서 묘지 주변 전답의 소유권마저도 엉뚱하게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일련의 소송문서들도 고스란히 종가에 남아 있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해주정씨 집안에서는 고양군의 토지대장을 다시 확인하여 그 부본을 제출했고, 조선 초에 작성된 분재문서(재산 상속문서)의 원본을 새삼 꺼내어 제시하기도 하는 등 소유권 분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결과적으로 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조선초 이래의 소유권을 명확히 증명하는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러한 분쟁 외에도 사릉이 조성된 이후에는 사릉 경내에 위치한 선영 관리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중앙과 지방 관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특히 예조판서에게는 사릉의 관리 책임이 있는 능관(陵官)을 시켜 사릉 내에 무성해진 수목을 벌목하여 정씨 집안 분묘의 잔디가 말라죽지 않게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집안에서 손을 쓸 수 있는 부분과 관청에서 나서서 조치해 주어야 할 부분을 구분하여 선영 관리에 문제가 없도록 한 것이다. 해주정씨 집안으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은 예조나 양주목에서는 인력 동원 등의 이유로 번번이 즉각적인 조치를 해주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것으로 보이지만, 집안의 입장에서는 관을 상대로 요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 매우 적극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1726년 해주정씨 집안에서 고양군에 전답 현황 확인을 요청한 일련의 문서

사릉참봉에 제수된 정운희

숙종 대에 들어서 단종과 정순왕후의 왕위가 회복되면서 해주정씨 집안에 대한 왕의 은전(恩典)도 베풀어졌다. 정중휘의 손자 정운희(鄭運熙)는 영조 대에 사릉참봉에 제수되었고, 영조가 사릉에 행차했을 때 해평부원군 정미수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소개되면서 사릉에 정씨 집안의 묘가 위치하게 된 경위 등에 대해 왕의 면전에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 자리에서 사릉과 정씨 집안의 이야기를 듣게 된 영조는 능참봉 정운희를 사릉 봉사(奉事) 자리로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다.

사릉과 해주정씨 집안의 이야기는 조선시대로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사릉을 이야기한다면 해주정씨 집안의 이야기는 반드시 언급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양주 해주정씨 해평 부원군 종가에 전래된 고문서는 분량이 적지 않은데다가 최근에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 『고문서집성』122~123집을 통해 그 전모를 드러냈기 때문에 앞으로 하나하나 풀어내야 할 이야 기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필자도 고문서 연구자이자 고문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안에 담긴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다.


글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고문서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대학원 고문헌관리학 전공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문서의 양식, 제도 등을 중점적으로 공부해 왔고, 최근에는 문서에 담긴 여러 정보를 토대로 사람들의 인식과 관습 변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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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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