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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땅이름 이야기

경기학광장Vol.2 _ Column & Study

< 경기도 땅이름 이야기 >


- 경기학광장Vol.2 _ Column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판문점과 판교

판문점은 널문리 즉 넓은 들판이다. 그 들판을 가로지르는 사천이라는 개천이 홍수 때에는 범람하여 넓은 들판이 물난리가 나서 널물리라 한 것인데 ‘널’은 널판지, ‘물’은 문이 되어 판문점(板門店)이 되었다. 고려 때부터 불러온 지명이다. 구리시의 교문리는 포천시 영평면에서 흘러오는 왕숙천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원래는 교문리(橋門里), 다리물리, 달문리, 들물리였다. 널문리와 같 은 의미이다. 지금은 교문리(敎門里)로 바뀌어 그 뜻을 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리는 달, 들이며 문(門)은 물이다. 구리시는 그 지형이 밖으로 튀어나온 곶이므로 곶지면이라 하였는데 한자로 구지 면(九旨面)이 되었고 마을 이름도 구지리라고 하였다. 지금의 구리는 구지(九旨)와 망우리(忘憂里)를 따서 구리면, 구리읍, 구리시(九里市)가 되었다. 판교도 ‘너들이’이며 ‘너들이’는 ‘넓은들’이다. 그 너들이가 ‘너드리’ ‘널다리’가 되고 널판지로 변하여 판교(板橋)가 되었다. 널빤지로 만든 다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넓은들’ 은 그만 토라져서 따로 광주(廣州)가 되었다. 벌교도 물이 빠지면 꼬막을 캐는 ‘뻘들’인데 벌드리, 벌다리가 되어 벌교(筏橋)가 되었다. 이 역시 다리와는 관계가 없다.



월곶

강화도는 한강하구 지점에 있다. 원래는 김포와 붙어 있었는데 지대가 낮은 곳으로 물이 자꾸 유입되는 바람에 땅이 분리되어 좁은 바다길이 생기면서 강화도라는 섬이 되었다. 지형이 한강하구 의 바깥쪽으로 튀어 나와 있어서 ‘강곶’ ‘강꽃’이라 불렀는데 강꽃이 강화(江華)가 되었다. 강화도는 원래 5개의 섬이었는데 사구에 의해서 이어지고 또 일부는 간척사업으로 연결하여 하나가 된 섬이다. 김포에 월곶이 있고 강화도에도 월곶이 있다. 월곶은 땅의 튀어 나온 지역이라는 뜻이다. ‘월月’은 다, ㅅ다, 따, 땅이다. 달곶이 땅곶이자 월곶(月串)이다.
우리 조상들은 하늘의 달이 땅인줄 이미 알고 있었다. 허공에 달려있다고 달이 된 것이 아니다. 월미도도 인천의 서쪽 끝 땅이다. ‘월月’은 땅이며 ‘미(尾)’는 끝이라는 뜻이다. 썰물 때는 육지와 다름없으므로 땅의 끝 ‘월미’이다. 그런데 월미가 ‘달의 꼬리’ 가 되어 근년에 들어서 월미도에 ‘달그림자’라는 운치 있는 식당 이름도 생겨났다. 꼬리, 꽃, 겉, 거죽이 모두 끝부분이다. 끝녀, 말 녀, 끝님이, 꽃녀 모두 막내, 끝이라는 말이다. 꽃도 끝에서 온 말이다. 꽃은 가지의 끝에 핀다. 끝녀, 끝내미, 끝필이, 꽃녀, 말녀가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월’이 모두 땅은 아니다. 월곡(月谷)동의 ‘월’은 땅이 아니라 다리이다. 다리골이 ‘달골’이 되고 월곡(月谷) 이 되었다.



화전동과 고잔동

경기도 고양시 화전동은 곶의 바깥쪽 땅인 ‘곶밖’이다. 그것이 ‘꽃밭’이 되어 ‘화전(花田)동’이 되었다. 안산의 고잔동은 곶의 안 쪽, ‘곶의 안’ ‘곶안’이 ‘고잔’이 되어 ‘고잔(古棧)동’이 되었다. 또 곶안이 꽃안. 꽃산이 되어 화산(花山)으로 변하기도 한다. 장산곶 (長山串)은 동쪽으로 산줄기가 길게 뻗어 있어서 장산곶이다. 조선시대에는 ‘장미(메)곶’이었다. 그 후 ‘미’가 ‘뫼’ ‘산’으로 변하여 장산곶이 되었다.
포항의 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되어 호미곶이다. 김포의 대곶은 김포반도의 큰 곶이라는 뜻이다. 울산의 간절 곶은 곶의 모양이 난초 잎처럼 여러 가닥이 바다로 뻗어있어서 곶 의 사이사이가 갈라진 것처럼 보여 간절곶(間切串)이 되었다. 또 곶의 모양이 간짓대(대나무 막대기)처럼 여러 가닥으로 길게 바다로 뻗어 나와 있어서 ‘간짓곶’ 간절곶이 되었다.

모란시장

대동강 모란봉은 구부러진 강의 물 안쪽 지역이다. ‘물안의 봉우리’가 ‘물안봉’ ‘무란봉’ ‘모란봉’이 되었다. 대동강 바깥쪽은 곶밖이다. 성남시 5일장 모란시장은 모란봉이 고향인 북한 실향민들이 채소 장사를 하면서 생겨난 시장으로 고향의 이름을 따서 모란시장이 되었다. 모란꽃과는 관계가 없다.

남이섬

중국을 다녀온 사신이 붓 대롱에 조그마한 벌레를 넣어가지고 와서 성종임금에게 보였다. 성종이 대롱 속을 들여다봐도 벌레가 너무 작아 아무것도 안보이므로 ‘빈대 밖에 없구나’라고 한 것이 그 벌레가 ‘빈대’라는 이름이 되었다. 가평의 남이섬 역시 ‘남쪽의 섬’이라는 뜻으로 ‘남의 섬’인데 그것이 ‘남이섬’이 되어 엉뚱하게 남이장군이 전사한 곳이 되어 가짜무덤까지 만들어 놓았다. 남이섬은 원래 섬이 아니었으나 일제 때 수력발전소를 만들기 위하여 댐을 막아서 물이 차올라 섬이 되었다. 춘천 쪽에서 바라보면 남쪽에 있는 섬이므로 ‘남의 섬’ ‘남이섬’이 되었다.
남이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 2리 산145번지에 있다. 남전2리 바로 뒷동산이다. 무덤이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것은 어머니가 남양홍씨라서 외가동네에 산소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청평과 양평

청평은 가평과 마주보는 들판이므로 맞뜰, 막뜰인데 ‘막’이 ‘맑’ 이 되어 ‘맑들’이 되면서 맑은 들판, 청평(淸平)이 되었으니 원래의 뜻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마산도 창원, 진해와 마주 보이는 땅 이므로 ‘맞산’이 ‘마산’이 된 것이다. 산은 산도 되지만 땅도 된다. 양평은 조선시대에 양근(楊根)군이라 하였는데 일제 항쟁시대에 지역을 통합하면서 양근군과 지평현을 합하여 ‘양평군’이 되었다. 또 양평이라는 단어만 보면 ‘벋은 들’이 ‘버드나무 들’이 되어 양평 (楊平)이 되기도 한다. 가좌동이 가장자리의 여울, 갓여울이 가여울, 가재울로 변하면서 가좌동이 되었듯이 경기도 가평도 물 가장자리에 있는 땅이름이다. ‘가평’ ‘가동’ ‘각동’ ‘각골’ ‘갓골’ ‘가리’가 모두 물 가장자리에 있는 동네이다.

지평리

지평면은 예로부터 지평막걸리로 유명하다. 지평 막걸리 공장이 6.25때 유엔군 사령부로 사용되었다. 그때 프랑스 대대의 전설적인 사령관 몽클라르 중장은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한 계급장을 달고 유엔군 지휘관으로 지평리 전투를 이끌었다. 임신한 아내도 따라왔다. 그때 뱃속에 있던 딸이 3년 전에 지평리를 다녀갔다. 지평이라는 땅이름은 숫돌이 많이 나는 곳이라 지평(砥平)이라 전한다. 동락리 전투가 한국군이 북한군을 맞아 승리한 최초의 전투라면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승리한 최초의 전투이다.

건지산

안성 금광면의 건지산은 금이 난다고하여 금광산인데 나중에 검강산이 되고 건지산이 되었다고 한다.

메홀과 작전동

수원은 메홀이다. 메홀은 ‘물골’이다. 메탄동, 메산동의 ‘메’가 모두 물마을, 물동네(무우=물=메=미)라는 뜻이다. 동대문구 용두동(龍頭洞)은 물머리, 미르머리, 용머리이다. 두 물이 만나는 곳이지 용머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물머리가 미르, 머리, 용의 머리로 변한 것이다. 동두천은 동쪽으로 흐르는 개천이라는 의미이다. 미아리의 미도 물이며, ‘아리’는 작다는 뜻으로 작은 물고개 이다. 미앳길의 ‘미’도 물이며, ‘앳’은 작다, 어리다, 앳띠다는 뜻이다. 즉 작은 물길이 미아리이다. 김포의 알미골도 ‘아미골’로 작은 물길이 이어진 곳이다. 찬우물 삼거리와 연결되어있다.
인천 부평구의 작전동(鵲田洞)도 까치밭 즉 작은 밭때기들이 있던 곳이다. 까치설날이라고 하는 것도 작은 설날이다. 애, 아리, 알, 아이, 까치 등은 모두 작다, 어리다, 낮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운천리

운천리는 포천시 영북면으로 원래 큰 우물이 있었다. 큰 우물이 크누물, 구루물이 되고 ‘구루’는 구름 운(雲)이 되고 ‘물’은 샘 천 (泉)이 되어 ‘운천리(雲泉里)’가 되었다. 땅이름의 변천이 이러하다. 파주 야당역의 야당리(野塘里)는 들 가운데 못이 있어서 ‘들 못’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야당(野塘)이 되었다.

제부도와 대부도

화성시 제부도는 지형이 젖꼭지처럼 생겨서 젖부리라고 한 것이 젯부리가 되고 제부도(濟扶島)가 되었다. 또 어린아이는 업고 노인들은 부축하여 건넌다는 뜻인 ‘제약부경(濟弱扶傾)’에서 ‘제부’가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지명은 인위적인 작명보다는 자연발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래 남양군 신리면이었다. 시흥의 오이도는 조선 초기에 오즐애(吾叱哀), 오즐이도(吾叱耳島)로 불리다가 정조 때 오이도(烏耳島)가 되었다. 짐작컨대 외딴섬인 외도, 외섬, 오이섬이 오이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참오이는 참외, 물오이는 물외로 ‘외’와 ‘오이’가 서로 넘나드는 이치와 같다고 하겠다. 까마귀와는 관계가 없다. 1980년 시화간척사업으로 대부도와 연결되어 지금은 육지가 되었다. 안산의 대부도는 화성시에서 바라보면 큰 솥처럼 생겼다. 흉년에는 더욱 그렇게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큰 솥섬, 대부도(大釜島)였는데 지금은 대부도(大阜島)로 바뀌었다.



일산과 대화

일산은 한메. 큰 산이라는 뜻이다. 고양시는 일산 고봉산의 ‘고’ 와 행주산성 덕양산의 ‘양’을 따서 고양시가 되었다. 대화는 한강의 ‘큰곶’이어서 ‘대곶’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큰꽃’ 즉 ‘대꽃’이 대화 (大花)가 되었다. 지금은 대화(大化)로 바뀌었다. 지금은 직강(直江)공사로 ‘곶’이 없어졌지만 처음의 땅이름은 쉽게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여주

여주, 파주, 광주의 주州는 천川보다 큰 곳이며 따라서 마을도 많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여주(驪州)는 넓고 큰 고을이라는 뜻이다. 여주의 ‘여(驪)’는 능서면의 마래리, 말마당, 마감산(馬甘山), 마암(馬巖) 등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마’는 ‘크다’라는 뜻이다. 충남 대천(大川)은 대천시내에 개천이 흐르고 있어 ‘한내’라고 했는데, 그것이 대천이 되었다. 주(州)보다 작은 곳은 춘천, 화천 등이 있다.

기흥과 신갈

용인은 조선 태종14년(서기1414년)에 용구(龍駒)와 처인(處仁)을 합쳐 부른 지명이다. 처인성 전투는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기흥구는 사기막골(지곡리)의 이름을 따서 ‘기곡면’이라 하였는데 그 후 ‘기곡’과 ‘구흥’의 이름을 따서 기흥면이 되었다.
신갈(新葛)은 물이 갈라지는 곳으로 원래 갈리, 갈동이다. 경안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신갈은 새 갈래이다. 하갈은 아랫 갈래 이며, 구갈은 옛 갈래이며, 상갈은 윗 갈래, 중갈은 중간 갈래이다. 모두 칡과는 관계가 없다. 전북 이리는 2개의 마을 즉 이리(二里)가 이리(裡里)로 변하였다. 용인 보정(寶亭)동은 ‘보수원’과 ‘독정’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보라(洑羅)동은 보평(洑坪)동(보뜰 마을, 보구리=바구니처럼 생긴 들판)과 나곡(羅谷)동이 합한 이름이다.

수지

용인시 수지구는 의상(儀上), 의하(儀下), 상리(上里), 하리(下里), 덕동(德洞)의 5개리를 병합하고 수진면과 지내리를 따서 수지라고 하였다. 고기리(古基里)는 고분재와 손기동을 딴 것이다. 고분재는 산등성이와 언덕이 구부러진 굽은재이다. 수원 영통지구는 수원 영덕리와 통미마을을 따서 영통이라고 하였다. 수원 장안구 이목(梨木)동은 옛 수원군 형석면의 배나무 골이다. 배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죽전과 분당

용인 죽전동은 옛날에 큰 연못이 있어서 ‘대지(大池)’라 한 것이 나중에 못이 메워지고 넓은 평지가 되어 ‘대전(大田)’이 되었고 ‘대전’의 ‘대’가 ‘대나무 죽’으로 변하면서 ‘죽전(竹田)’이 되었다. 지금의 경기도 분당선 죽전역이다. 결국 죽전이나 대전이나 같은 뜻이다. 상미마을은 상갈과 통미에서 상미가 된 것으로 보인다. 야탑동은 원래 돌마면인데 돌마면의 ‘오야소(梧野所)’마을과 300년 전의 상탑, 하탑의 ‘탑골마을’을 따서 야탑(野塔)동이 되었다. 분당선 야탑역이다. 오야소는 ‘오야실’로 오동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이다. 분당은 ‘분점(盆店)’과 ‘당모루’를 딴 이름이다. 당모루는 당집이 있는 모퉁이로 보인다.



임진강

파주의 임진강의 임진(臨津)은 앞나루이다. ‘임’은 우리말의 ‘이마’이다. 남풍을 마파람이라고 하듯이 이마도 ‘남쪽’ ‘앞’이라는 뜻이다. 신안군 임자도(荏子島)의 ‘임’도 이마, 앞, 앞섬이다. 즉 개성에서 서울로 건너오는 남쪽나루, 앞 나루가 임진나루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 올 때 제사를 지낸 일과는 연관이 없다.


글 반재원

40여 년 동안 훈민정음 창제원리와 동양천문도의 연관성에 대하여 연구해 왔다. 아울러 없어진 옛글자를 살려 써야하는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 단군과 땅이름에 대해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다. 훈민정음 연구소장, 한배달 부회장,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훈민정음 창제원리와 기능성한글』, 『단군과 교웅』 등 10여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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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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