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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의왕시 산업의 역군이 사는 통미마을

경기학광장Vol.3 _ Village & History

< 의왕시 산업의 역군이 사는 통미마을 >


- 경기학광장Vol.3 _ Village & Histor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과천-의왕간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의왕시의 고천동과 왕곡동은 천양지판의 양상을 보여준다. 의왕시청 별관이 자리하고 있는 고천동은 아파트와 상가가 밀집해 있는 의왕시의 번화가임에 비해 왕곡동은 여전히 산지와 논밭이 대부분인 농촌의 모습이 완연하다. 아무래도 왕곡동이 근 30여 년 동안 개발제한지역으로 묶여 있다 보니 인접한 두 지역의 차별화 현상이 가중된 것이다.
그런데 왕곡동의 자연마을 중에서 가장 독특한 마을은 통미마을이다. 농촌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일종의 수용시설을 연상케 하는 주거 밀집 지역, 이것이 통미마을에 대한 필자의 첫인상이었다. 하 지만 통미마을의 어르신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도중 어떤 과정을 거치며 이러한 마을의 모습이 형성되었는가를 알게 되면서 마음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왕곡동에서 바라본 고천동의 아파트단지

청풍김씨의 사패지였던 왕곡동

왕곡동은 홍치골, 왕림마을, 통미마을, 골사그내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자연마을의 구성은 조선시대의 명문가인 청풍김씨가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형성되었다. 청풍김씨의 왕곡 동 입향조는 조선전기의 무신이었던 김우증이었다. 그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훈되었는데, 이때 왕곡동 일대의 사방 십리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고 이곳에 정착한 것이 다. 당시 그가 받은 사패지는 동쪽으로는 백운산, 서쪽으로는 오봉산, 남쪽으로는 지지대, 북쪽으로는 모락산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청풍김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마을은 홍치골이었지만, 이후 청풍김씨는 왕림마을을 세거지로 삼으며 번성하였다. 청풍김씨의 사당이 있던 ‘별묘(別廟)’, 마을의 중심이었고 현재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는 ‘향촌’, 서당이 있던 ‘서당현(書堂峴)’ 등 곳곳에 남아 있는 지명을 통해서도 왕림마을이 전형적인 반촌이자 집성촌으로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청풍김씨의 방대한 사패지를 경작하던 소작농들 또한 왕림마을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을 터인데, 통미마을과 골사그내 마을이 애초 이런 식으로 형성되었던 마을이라고 판단된다.

산신제를 함께 지내는 왕림마을과 통미마을

통미마을이 왕림마을과 공동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두 마을 간의 밀접한 연관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산신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서 왕림마을 백운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산제당에서 지낸다. 그런데 산신제를 주관하고 참여하는 주민들은 어디까지나 왕림마을 쪽이고, 통미마을의 경우에는 제비를 추렴할 때 동참하는 정도이다. 대신 왕림마을에서는 산신제가 끝나면 통미마을 주민들이 음복을 할 수 있도록 제물을 가져다 준다.
두 마을이 백운산 자락에 인접해 있기는 해도, 현재 통미마을에 청풍김씨의 사패지가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로 왕래가 잦은 편도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두 마을이 같은 수호신을 모시는 신앙공동체로 묶여있는 것은 근자에 형성된 전통이 아님은 분명하다. 특히 산신제의 운영 형태가 주종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음은 예전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로 묶여 있을 때의 인습적 잔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이다.

사통팔달의 길목이었던 통미마을

통미마을은 왕곡동에서 고천동으로 넘어가는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왕림마을에서 솔고개길을 따라 걷다보면 통미마을이 나오는데, 솔고개길은 예전 과천에서 청계산과 모락산을 넘어온 길이 지지대고개를 통해 수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비록 삼남대로의 본선은 아니지만 지름길로 자주 이용되던 지선이었다.
통미마을은 고지도에는 통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원래 통산이라고 불렀다기보다는 고유어로 통뫼, 통미라 부르던 곳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마을이 사통팔달의 주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수원과 과천을 잇는 지름길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인 횃골과 고고리를 왕래하는 길 또한 동서로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 옛길의 흔적은 마을 도처에 남아 있지만 도로에 의해 단절되거나 외지인의 통행이 거의 없는 한적한 시골길로 변해 있다.

왕림마을에서 통미마을로 가는 솔고개길

현재도 통미마을의 서쪽 경계로는 경수산업도로가, 북쪽 경계로는 과천-의왕간 고속도로가 교차하고 있으니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팔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은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가 마을 안으로 들어설 일이 없다. 그래서 대로변에 숨어 있는 외딴 마을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 는 것이다.

베드타운의 원조였던 통미마을

통미마을은 전형적인 각성바지마을이며 토박이 분들은 찾아보 기 힘들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1970년대 전국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들어왔다가 정착한 분들인 것이다. 당시 마을 인근에 고려합 섬·한국 야쿠르트 등의 공장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대규모의 노동인 력이 수급되었고, 이에 의왕은 무슨 일을 하든 먹고 살 수 있는 곳으 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의 폭발적인 인구 유입과 급속 한 개발 과정에 힘입어 의왕 지역이 시흥군에서 분리되어 의왕시로 승격될 수 있었을 터이다. 


통미마을의 최문영 할아버지

통미마을은 이때 공장노동자들의 주거지로 각광을 받던 마을 중 하나였다. 최문영 할아버지(83세)도 50년 전 충남 당진에서 소문 을 듣고 무작정 올라와 통미마을에 정착한 분이다. 최 할아버지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마을이라 할 것도 없이 집 몇 채에 논밭 만 있었던 벌판 지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 공 장으로 출퇴근하기 위해 이 마을에 정착하는 외지 사람들이 늘어나 며 마을은 순식간에 포화상태가 되었다. 통미마을은 낮에는 텅 비 고, 밤에는 북적이는 주거 지역이었으므로, 어찌 보면 1970년대에 형성된 우리나라 베드타운4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최 할아버지는 의왕 지역의 공장들이 하나 둘씩 이전한 이후에도 이곳에 남아 잡부일을 하며 지내셨다. 자식들은 다 분가하여 외지 로 나갔고, 할머니는 5년 전 치매로 돌아가셔서 지금은 혼자서 노령 연금과 국민연금으로 생활을 하신다. 어차피 다른 데로 떠날 여유 도 없지만, 고향을 떠나와서 처음 정을 붙인 마을이 이곳이고, 떠나 봐야 별로 나을 바도 없어서라고 한다. 현재 통미마을에 거주하시 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거의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이곳에 정착한 것이다.

통미마을의 개발 현장

통미마을에 쪽방촌이 자리잡은 내력

현재 통미마을은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사근천의 지류 를 경계로 사뭇 다른 모습이 전개된다. 시냇가의 북쪽으로는 연립 주택이 들어서는 등 개발이 진행되는데 비하여 남쪽으로는 왕년 산업의 역군들이 살고 있는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는 것 이다.
통미마을에 블록을 늘어놓은 듯이 쪽방촌을 연상케 하는 집들이 들어선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1970년대의 일이었다. 이때 통미마 을에서 딸기 농사를 짓던 분이 자신의 딸기밭을 분할하여 수십 채 의 집을 지어 공장노동자들에게 분양하였던 것이다. 파주에 살다가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당시는 집 단위가 아니라 방을 단위로 월세를 주었다. 한 방에 대여 섯 명씩 기숙하는 경우도 다반사였기 때문에 집집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마당이 없이 쪽방 들만 들어차 있는 특이한 집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쪽방촌을 연상시키는 통미마을의 집들

공동목욕탕으로 쓰였던 빨래터

통미마을에는 지금도 마을을 관통하며 흐르는 시냇가에 공동빨 래터가 있다. 시내에 콘크리트를 깔고 수로를 내어 양쪽에 일렬로 쭈그리고 앉아 빨래하기 좋은 구조이다. 빨간 플라스틱 대야와 바 가지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사용하는 주민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공동목욕탕으로 사용되기도 했 다. 빨래터에는 지금도 검은 천이 둘러쳐진 포장막이 있는데, 양쪽 입구를 가리고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목욕하는 시간을 정해서 이용하였다고 한다.


통미마을의 공동빨래터. 예전에는 공동목욕탕으로도 쓰였다.

시내를 가로지르며 놓인 다리 옆에는 연탄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 다. 통미마을에 아직 가스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들 이 연탄보일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 연탄아궁이보다는 개 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껏 열악한 생활여건임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개발을 앞둔 통미마을

이제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공장들은 대부분 외지로 이전되었 고, 그나마 남아 있는 공장들에서는 연로한 그들 대신 외국인노동 자를 채용하고 있다. 의왕에서 가장 번화한 동네인 고촌동을 도로 하나 사이에 두고 이렇듯 낙후된 마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의아스럽기는 하지만, 연민의 감정을 앞세우는 시선은 통미마을 주 민들에게 실례인 듯싶다.
그들은 1970~8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을 이끌어갔고 지금의 의 왕시가 있게 한 산업의 역군들인 것이다. 비록 일자리를 찾아 고향 을 등지고 기나긴 타향살이를 하며 간고한 삶을 살아온 그들이지 만, 과거의 시간이 회한의 기억은 아닌 듯했고, 현재의 삶 또한 어느 정도 만족해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에는 그들이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데서 기인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 을 것이다. 실제로 통미마을의 주민들은 고된 노동을 통해 자식들 을 키웠고, 그다지 번듯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도심 속의 농촌마을로 남아 있던 왕곡동도 머지않아 개발의 열풍 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다. 경수대로변에 자리한 이 통미마을이 예 외일 리는 없는데, 이 마을이 개발되었을 때 이곳에 거주하고 계 신 어르신들의 삶이 또 어떤 식으로 변화를 맞이할까 적잖이 염려 스럽다.


글 김준기

동국대학교에서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대학원에서 구비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에 근무하며 마을조사를 다니면서 살아있는 민속현상과 그 안에 담겨있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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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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