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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시 내손동 능안마을 전주이씨 임영대군 정간공파

경기학광장Vol.3 _ Village & History

< 의왕시 내손동 능안마을 전주이씨 임영대군 정간공파 >


- 경기학광장Vol.3 _ Village & His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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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손동(內蓀洞)은 광주군 의곡면 손동(蓀洞), 의일내동(義逸內洞), 갈산동(葛山洞)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수원군 의왕면 내손리(內蓀里)로 통합하면서 하나의 구역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 가운데에서도 계속 하나의 구역으로 이어지며, 의왕시가 승격한 1989년 1월 1일, 현재의 행정구역인 의왕시 내손동이 되었다. 내손동은 능안, 송골, 갈뫼 등의 마을이 위치 한다. 능안마을에는 전주이씨가 오래 세거하였다.

임영대군 정간공파 종회(일년 365일 태극기가 걸려있다)

능안마을 전주이씨

이 지역에서 눈에 띄는 동족마을은 전주이씨 임영대군 정간공파 (臨瀛大君 貞簡公派)의 능안마을이 가장 대표적이다. 동족마을에 대한 첫 구체적인 조사는 193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루어진 『조선의 성』 「동족집단상황」일 것이다. 당시 의왕면 내손리에는 전주이씨 50세대가 거주하고 있었다. 1957년의 『경기도지』에는 내손리의 전주이씨 동족마을이 누락되어 정확한 입향시기를 확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임영대군(臨瀛大君 璆: 1418-1469)이 사망하고 묘소가 조성된 1469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입향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입향조의 거주이래 대략 550년 정도 흘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임영대군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 지역과 인연을 맺었을까? 구전에 따르면 임영대군이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과 사이가 좋지 않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능안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되어서는 세조의 살생에 회의를 느낀 임영대군이 이주한 뒤 매일 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았다는 모락산(慕洛山)과 관련된 구전이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의왕의 역사와 문화』 에서는 세조가 여러 대군의 동정을 살피자 광주 의곡(義谷)으로 이거하였다가, 세조의 즉위 후 조정에 나와 그를 보좌하였다고 정리하였다. 동기간의 우애회복을 통해 종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즉 많은 구전에서도 임영대군의 이주가 세조의 계유정난에 반발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전한다.


능안마을 우물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임영대군의 졸기에 “세종의 4자로 천성(天性)이 활달(豁達)하고, 물리(物理)에 정통하며, 무예(武藝)가 절륜(絶倫)한데다가, 또 문사(文史)를 섭렵(涉獵)해서 의논(議論)이 초월(超越)하여, 세조(世祖)가 일찍이 유자(儒 者)의 풍도(風度)가 있다고 칭하였다. 세조를 섬기며 무릇 조정 정사(政事)의 득실(得失)과 민간(民間)의 이해(利害)를 들어 계달(啓達)치 않는 바가 없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권애(眷愛)가 몹시 융성(隆盛)하였다. 항상 검약(儉約)을 좋아하고, 재산(財産)을 경영(經營)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접대하기를 지성(至誠)으로 하여 조금도 거짓과 꾸밈이 없었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게다가 조선 왕조실록 단종1년 11월에는 ‘임영대군의 종군자(軍子)가 계유정 난에서 공을 세워 면포 각 50필과 가사 각 1구를 하사 받은’ 기록이 있다. 그의 종이 계유정란에 공을 세웠다는 것은 임영대군이 계유정란에 참여하였거나 적어도 이를 지원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곡으로 이주하게 된 원인을 구전에서 말하는 세조의 행동에 대한 회의로만 볼 수는 없다. 사실 계유정란의 원인이 단종 연간에 비대해진 신권에 대한 종실세력의 위기의식이라고 볼 때, 같은 종실로서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을 도왔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능안마을 입구

특히 임영대군은 세조가 즉위한 이후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세조가 “꾸밈이 없고 성실하며, 유학자의 기상이 있다”고 높게 평가한 데에서도 보듯, 임영대군은 세조에게 매우 신임을 받았다. 세조의 신임 속에서 그는 군사관련 활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아울러 그의 2자 구성군 준(浚)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오르는 등, 세조연간에 임영대군과 그의 직계 자손들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이러한 세조연간 이후 임영대군의 활약이 내손리 전주이씨 동족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던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임영대군의 사망 후 지금의 자리에 묘를 쓰고 받은 사패지가 근거가 되어 후손이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시대인 1923년에는 종친 19인의 공동 명의로 150정보의 사패지를 등기하였다. 임영대군의 활약과 지위는 곧 사패지와 직전의 하사 등의 우대로 이어졌고, 이것이 내손동의 전주이씨 동족마 을 형성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임영대군 이후에도 그의 부인인 제안부부인 최씨(齊安府夫人崔氏)와 적지 않은 그의 자손들의 묘가 주변 지역에 자리 잡았다. 이는 내손리의 전주이씨들이 계속 결집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이탁(李濯, 1462-1547), 이옥정(李玉貞, 1513-1593), 이전(李瑱, 1553- 1631) 등의 묘가 내손동과 주변 지역에 분포한다.
임영대군의 자식은 모두 9남2녀로, 오산군 주(烏山君 澍), 구성군 준(龜城君 浚), 정양군 순(定陽君 淳), 팔계군 정(八溪君 淨), 환성군 징(歡城君 澄), 영양군 함(英陽君 涵), 단계부정 인(丹溪副定 潾), 윤산군 탁(輪山君 濯), 옥천군 옥(玉泉君 沃), 중모현 주(中牟縣主), 청하현주(淸河縣主) 등이다. 전주이씨 임영대군 파는 이들 가운데 1남 오산군방(烏山君房), 3남 정양군방, 6남 영양군방, 7남 단계부정방, 8남 윤산군방, 9남 옥천군방 등 6개 방파로 나뉜다. 사손은 이들 가운데 3남 정양군 계통으로 승통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양군 계통 승통 이유는 오산군의 출계와 구성군 이준이 남이 장군의 사건으로 연류되어 유배지에서 10년을 보내어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3남인 정양군 계열로 승통이 계승되었다.

임영대군의 묘역

임영대군의 묘역은 의왕시 내손동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묘역의 가장 큰 특징은 묘역을 상계, 중계, 하계로 구분하는 조선 전기 왕실 묘의 수법을 보이고 있으나 봉분을 장방형이 아닌 원형으로 조성하였다는 점이다. 최근에 호석을 마련하였으나 처음부터 원형의 본분이었던 것이 확실하다면 15세기 후반부터 봉분 조성에 변화가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상계에는 봉분과 묘표, 상석을 배치하였으며, 중계에는 장명등과 망주석, 하계에는 문인석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임영대군 묘역

봉분의 좌측에 있는 묘표는 방부개석형으로 전면에 “조선국왕자 임영대군 정간공지묘(朝鮮國王子臨瀛大君貞簡公之墓)” 라 새기고, 측면에 “개국 533년 알봉곤돈 병월 일 중건 신좌(開國 五百三十三年閼逢困敦窉月 日 重建 辛坐)”라고 새기고 있어 이 묘표가 1924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계의 상석과 중계의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망주석은 1981년 묘역을 정비할 때 교체된 것인데 상석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이 원래의 상석으로 보인다.
옛 석물로는 장명등과 문인석이 있다. 장명등은 옥개석과 몸체로 구성되어 있고, 사면에 화창(火窓)을 비교적 크게 만들었다. 조선 전기의 양식으로 비교적 안정감을 잘 보이고 있다. 몸체 하단에는 매듭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고졸한 멋을 풍긴다.
문인석은 좌우의 모두 복두공복(幞頭公服)을 하고 있는데 안면의 형상과 홀(笏)을 들고 있는 손의 모습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좌측의 문인석은 얼굴이 둥근 형태로 눈이 희미하고 코와 턱의 수염 이 조각되어 있지 않은 반면, 우측의 문인석은 각진 얼굴에 눈동자와 코와 턱의 수염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홀을 잡은 모습도 좌측의 문인석은 왼손이 위에 있고 우측의 문인석은 오른손이 위에 놓여 일반적인 문인석과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후면의 모습은 복두의 깃을 팔(八)자형으로 길게 늘여 어깨에까지 닿아 있으며, 야(也)자대를 착용하고 있다.
문인석 모두 장대한 크기이지만 의습선을 깊고 도드라지게 표현하여 전체적인 모습에서 풍기는 안정감이 뛰어나다. 조선전기 성종 조를 대표할 만한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제안부부인 최씨묘

▲ 제안부부인 최씨지묘

임영대군의 묘소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100m 지점의 능선에 임염대군의 부인인 제안부부인 최씨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임영대군의 묘소보다 규모는 작으나 역시 3단의 상계, 중계, 하계 로 구분하는 왕실 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상계에는 봉분과 묘표가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앞쪽에 있는 묘표는 전면에 “제안부부인 최씨지묘(齊安府夫人崔氏之墓)” 라 새기고, 후면에 “성화6년 갑 오 3월 12일(成化六年甲午三月十二日)” 이라고 기록하여 1476년(성종 7)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표는 조선 전기의 전형적 인 묘비 양식인 방부하엽형(方趺荷葉形)으로 하나의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는데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성종조를 대표할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중계의 중앙에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 2기가 배치되어 있다. 망주석은 최근에 새로 마련한 것이다. 장명등은 옥개석과 몸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화창을 낸 것이 특이하다. 전후로는 통으로 깎 아냈으나 좌우로는 반만 깎아내 바람을 막기 위한 실용적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몸체 기단부와 화창부에 줄무늬를 표현 하였다.
문인석은 복두공복 형식으로 둔중한 체격에 네 겹으로 접힌의 습선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잘 묘사하지 않는 손의 처리는 양호하지만, 임영대군 묘의 문인석에 비하면 양감과 세부 표 현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다. 안면의 처리가 주목할만데 굳게 다문 입에 치켜올라간 눈꼬리, 눈동자를 표현하여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광대뼈를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임영대군 사당


임영대군 사당

임영대군의 묘역 동쪽에는 임영대군의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는 임영대군의 사당은 원래 마을에 있던 것을 약 190년 전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것이라고 전한다. 사당의 실내 중앙에는 임영대군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나머지 공간에는 제기(祭器)와 제복(祭服) 등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종친회 주관으로 해마다 음력 정월 21일 정오에 기신제(忌辰祭)를 올리는데 전국에서 평균 150-200명 후손이 참가한다. 그리고 기신제에 사용할 음식을 종가에서 준비하여 사당으로 옮길 때 쓰던 ‘나무가마’가 예로부터 전해오고 있어 주목된다. 나무가마는 ‘가자(架子)’라고도 하는데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약 100여 년 정도 된 것이라 한다. 이외에 제안부부인 최씨의 제사가 음력 12월 9일에 있으며, 학의리 마을에 위치한 윤산군 탁(輪山君 濯)의 묘에서 시제 제향이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열린다. 이 지역에 산재한 임영대군과 제안부부인 최씨, 그리고 후손들의 묘소와 임영대군의 사당은 이 내손동 전주이씨가 결집하는 중심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전주이씨 가문이 갖는 권위의 상징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글 이진복

성균관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중국고대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졸업 후 성대를 비롯하여 한양대, 카이스트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1996년 열린사회연구소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닫힌 사회가 아닌 열린 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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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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