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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동두천 토박이 김재만 어른이 들려주는 우리 현대사

경기학광장Vol.3 _ People & Life

< 동두천 토박이 김재만 어른이 들려주는 우리 현대사 >


- 경기학광장Vol.3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동두천에 16대째 이어 살면서 삶을 이야기해준 김재만씨

김재만씨는 1941년, 해방되기 5년 전 태어나 현재 동두천시 광암동에 살고 있다. 동두천에 16대를 이어오며 대대로 터 잡고 살아오고 있는 그의 삶을 통해 동두천이라고 하는 지역이 겪은 근현대사를 조명해 볼 수 있었다.
그는 시정자문위원, 동정자문위원장, 탑동초등학교 운영위원장, 의용소방대장을 지냈다. 그러한 공 로를 인정받아 도지사표창, 시장표창 등을 많이 받았고,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고려 숭의전의 집사역할을 하는 등 유학 진작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가난

옛날, 동두천 사회는 농경사회였다. 하지만 우리 동네는 농경업을 주업으로 삼지 못할 만큼 농토가 적었고 사람은 많았다. 옛날부터 산이 많아서 나무를 해다가 장작을 하거나 숯을 만들어서 마차에 싣고 서울로 내다 팔았다.
할아버지의 부친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아버님은 홀 어머니한테 자랐다. 할아버님은 홀 어머니한테 자랐고, 좋아하는 거는 다 해보면서 자라셨다. 결국 집안이 엉망이 됐다. 내가 태어났을 때 여덟 식구가 살았는데 그 당시 여덟 식구면 대가족이었다.
나는 여동생을 일찍 봐서 젖이 빨리 떨어졌다. 먹을 게 없으니까 보리를 갈아서 보리개떡 같은 걸 먹었는데 생활이 엄청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까 어린 나는 굶주림에 배만 이렇게 불렀다. 누님이나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어린 나를 업어주려고 해도 내 배가 너무 불러서 못업어줬을 정도였다. 3~4살 때도 할머니 잔등에 업혀있는데 영양실조가 되다보니 귀신이 잡으러 오는 헛것이 보일 정도였다. 다섯 살 때는 장님까지 됐었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키가 제일 큰 어린이가 김재만씨)


어린시절 농사짓던 모습

6.25 전쟁

7살 때 학교에 들어갔고 10살 때 6.25가 났다. 6.25때는 비가 무척 와서 마냥 모를 낼 때였다. 그 전에는 비가 안와서 모를 못내다가 그 때 한참 모를 내는데 새벽에 그냥 우리 할아버지가 난리가 났다며 피난가야 된다고 하셨다. 포 소리가 무척 나는데 그게 포 소린지도 몰랐다.
보따리 싸서 여기서 조금 가면 있는 장림이라는 데를 갔는데 벌써 인민군들이 여기 와서 막았어. 포천에는 추부대 여기는 호부대가 있었다. 포천 쪽에 대장이 저쪽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군인들을 전부다 외출을 보내서 거기가 뚫린 것이다.
중고등학교 앞에 사과나무 밭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피난 간다고 거기에 서 있었다. 초성리 가는 데가 삼팔선인데, 호부대 사람들이 보초를 서는데 집더미 같은 쇳덩어리가 굴러들어왔다. 그게 하나가 아니라 몇 십 개가 들어왔던 것이다. 보초서던 사람이 우리 동네 사람이었는데 보초 서면서 생전처음 탱크를 본 것이었다. 이 사람이 그게 무서우니까 총을 멘 채로 부대에 들어가지도 않고 도망을 나왔다. 산 쪽으로 뛰어가다 보니까 벌써 저쪽으로 갔다. 의정부까지 가서 보니까 또 저쪽으로 벌써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아리까지 가서 잠을 잤다고 하는데 그만큼 6.25때 군인들도 탱크를 몰랐다.
동두천에서는 탱크를 막으려고 꽤 노력을 했다. 군인들이 멍석을 가지고 가서 탱크 못구르게 하고 참나무 서까래 같은 걸 탱크 바퀴 속에 넣고 그렇게 저지를 했는데 저녁때 여기 포천 추부대쪽이 뚫렸다. 우리는 피난 가지도 못하고 도로 들어왔다. 인민군들이 들어오면서 내무서원들이 점령했다. 학생 애들이고 농민들이고 전부다 그 사람들이 정치하니까 우리도 학교 다니면서 ‘백두산 줄기줄기’ 노래도 부르고 그랬다.
젊은이들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침입했다고 하는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작은 전투에서 벌어지는 일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처음에 탱크가지고 밀고 들어온 건 저쪽이다.
6.25 때 여기가 전쟁터였다. 왜냐면 연천에서 들어오는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여기를 지나 천보산으로 해서 덕소쪽으로 갔다. 군인들이 1.4후퇴 때 밀려오는데 이 군인들이 천보산에서 무척 많이 죽었다. 그것도 중공군들이 들어와서 굉장히 많이 죽었다. 우리는 그 틈바구니에 있는 거였다. 인민군 애들 가면서 웬만한 사람들 끌고 가고, 사상적으로 그런 사람은 죽이고 올라갔고, 1.4 후퇴 때는 피난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남자 어른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피난도 못갔다. 고생은 덜했다. 중공군이 와서 쌀이고 뭐고 그 사람들은 여자, 민간인 건드리지를 않았는데 쌀을 전부 뒤져내는 거였다. 쇠꼬챙이로 해서 뒤져가서 우리가 먹을 게 없었다.
중공군 애들이 저희한테 마땅치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는데 나한테도 수류탄 갖고 죽인다고 협박했다. 우리 집이 저쪽 구석에 있어서 중공군들이 있었다. 2~3월경에 미군들이 들어왔는데 중공군들이 우리집에 있었던 것 때문에 저쪽 사상을 가진 집이라고 우리집 식구들 일렬로 세워놓고 M1총으로 쏴죽인다고 그랬다. 그때 일곱식구가 쭉 서있었는데 이장이고 뭐 사람들이 와서 그런 사람들 아니라고 사정해서 미군들한테 용서를 받아서 살아남았다.
1.4후퇴 때는 천안까지 밀려갔다가 다시 밀고 올라왔고 다시 3월에 중공군들이 내려와서 미아리까지 갔었다. 이때 저 산에서 중공군들이 몇 백명 이상 죽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올 때 타고 온 말을 잣나무가 많은 산 속에 갖다놓고 숨어있었다.
미군 비행기에서 그 정보를 받아서 드럼통같이 생긴 기름폭탄을 그 산에 뿌렸다. 그게 뿌려지면서 사람한테 불붙은 기름이 붙으면 꺼지질 않는다. 드럼통만한 것을 내려뜨리면서 기관총으로 쏴서 불이 붙어 떨어지는 거였다. 그때 이북으로 간 사람들이 많다. 사상적으로 그런 사람들, 젊은 사람들 많이 끌려갔다. 6.25때 여섯 번을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하면서 고생했다.

학교생활

초등학교 4학년 때 다시 학교 들어가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농사나 지으라고 그래서 1년을 묵었다가 그 이듬해 몰래 가서 책을 타왔다.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다보니 초등학교를 나왔는데도 한글을 제대로 못깨우쳤다. 일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글방에 다니라고 해서 3개월인가 다녔다.
그 당시 이담고등공민학교가 생겼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장이 안 나오는 곳이었다. 여기를 졸업 맡았는데, 영어고 수학이고 전혀 몰랐다. 고등학교를 가야하는데 안보내줬다. 고등공민학교 다닐 때 학교 갔다 온 후에는 생나무를 잘라다가 패서 새벽이 되면 어머니랑 같이 동두천에 가서 팔았다. 나무를 팔고나서 어머니가 호떡 하나 사주시면 그거 먹고 학교 갔다. 그렇게 공부했으니 무슨 공부를 했겠나.


이담고등공민학교 전교생과 함께

군대시절

당시 남의 농사를 많이 지었다. 내 나이 16살에 형님은 군대에 가셨고, 우리 아버지는 일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질 않으셨다. 17살에 졸업하고 그 많은 농사를 쫒아다니면서 했고 나무도 해다가 팔고, 구들장도 뜨러다니면서 생활하다가 22살 되던 1962년에 군대에 지원해서 갔다.
당시에도 군대에 가는 걸 싫어하고 그랬는데 친구들이 술 파티 한 번 해줬다. 나는 재수가 좋은지 대전 3공사령부 통신참모부로 발령 받았다.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 전선 늘이는 데로 배치되었다가 천안으로 파견을 갔다. 1년 2개월간 무척 편하게 생활했다. 어느 누구 보다 잘 지냈다.
그러다가 유선을 취급하는 통신참보부 유선계에 있던 우리 사수가 제대할 때가 되니까 나를 차출했다.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데 그때부터 꽤 고생했다. 실력은 모자라는데 거기에 가서 행정을 보려니 쉽지 않았다. 게다가 운용계라고 제일 어려운 행정일을 해야 했다. 계획서도 꾸며야하고 충남북 일대 36개 부대를 상대해야 했다.
남들은 쓱쓱쓱하면 다 하는데 나는 잘 못하니까 밤을 새워서서 했다. 그 당시 공부를 많이 했다. 제대할 무렵이 되니 과장이 기껏 가르쳐놓으니까 제대한다는 말을 할 만큼 많은 것을 배웠다. 챠트, 가리 방긁기, 사령관한테 한문으로 글씨 써서 서류 올리기 등을 주로 했다. 지금도 그때 영향으로 거의 매일 일기를 20여 년간 쓰고 있다.

결혼

우리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고 내 밑으로 동생이 5명 있었다. 여동생 4명에 돌 지난지 한 달 된 남동생이 있는 상태였다. 공부할 새도 없었고 고통도 엄청 받았다. 제대해서 객지로 조금 다니다가 그런 어려운 생활 속에서 집사람과 결혼을 했다. 30살 넘어 결혼하려고 했는데 동생들 데리고 살다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게 먹고살기가 힘든 상황에서 결혼했는데 신기하게도 결혼 후 쌀밥만 먹었다.
내가 27살, 집사람이 22살에 중매로 결혼했다. 우리 집사람은 광릉내 사람이다. 여기서는 일면식도 없었다. 여기 있는 분이 광릉으로 딸을 시집보냈는데 그 사람이 저 사람 작은 어머니였다. 내가 그 분 친정집 앞에서 채마밭을 일구고 그랬는데 친정에 있을 때 나를 잘 봤는지 그 작은 어머님이 중매를 했다.
결혼 전에 우리 식구가 원체 많으니까 큰집에서도 나와서 따로 살림을 냈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바로 밑에 여동생이 시집을 가서 여동생 셋에 남동생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당시 여자들에게 제일 좋은 직업이 식모였다. 여동생 둘은 성장한 후 식모로 나가서 어린 동생들 둘을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힘이 들었다.
맞선 본지 한 달 만에 결혼했다. 결혼얘기가 나온 것은 여름이었다. 하지만 동생들이 셋이나 있으니 결혼할 형편이 못되서 결혼 안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겨울에 군대 제대해서 집에 오니 셋째 여동생이 밥을 해먹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구들장 떠서 모아놓은 돈이 2천원 정도 됐는데, 그걸 셋째 여동생이 갖고 가버렸다.
그래도 원망 안하고 계속 열심히 살아가는데, 가을쯤 되자 동생이 다시 들어왔다. 그래서 동생한테 돈을 또 맡겼는데, 겨울 들어서면서 그걸 또 갖고 도망을 갔다. 그런 상황이 됐으니 먹을 게 없었다. 할 수 없이 청산으로 가서 싸리나무 넉 단을 져다 팔았다. 당시 이 정도를 팔면 한 단에 오십 원씩 해서 이백 원 정도를 벌었다. 쌀 한 말이 4백원 정도였으니 쌀 반말은 사올 수 있었다. 하지만 11살 먹은 여동생이 밥을 하니 맨날 밥이 설었고, 반찬도 없이 ‘만나니 간장’만 보리밥에 비벼먹고 그랬다.
옛날 속담에 과부는 은이 서 말이고 홀아배는 이가 서 말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동생 둘을 데리고 생활하면서 나는 청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왔다. 20리 떨어진 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서 집에 오면 캄캄해졌고, 그 나무 팔아먹느라고 집에 불 땔 나무도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생각할 때 결혼 얘기가 또 나왔다. 에이 모르겠다, 없어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신사복, 코트 다 빌려 입고 선을 보러 갔다.


김재만씨의 결혼사진

선을 볼 때 의정부에서 퇴계원으로 해서 진접면 남양주시 광릉내로 갔다. 여기서 갈 때 우리 작은 어머니가 “너 거기서 밥 주는 거 절대 다 먹지 말아라. 밥 다 먹으면 못 사는 줄 안다.”고 신신당부했다. 처갓집은 초가집인데 방안이 컴컴했다. 보니까 신부가 무척 이뻤다. 거기서 점심을 먹었는데, 밑에가 넓고 위가 좁은 주발에 밥을 줬다. 몇 숟갈 푸니까 바닥이 나오는데, 작은 어머니가 밥 다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셔서 그걸 다 못 먹었다. 두 그릇을 먹어도 괜찮은데... 그렇게 허전하게 먹고 그날로 사진을 찍었다.
영등포 사시는 이모님 댁 간다고 청량리 쪽으로 갔는데 거기 길거리에 떡 파는 사람이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 사람한테 떡을 사 먹는데, 떡 파는 할머니가 “왠 떡을 그렇게 많이 먹냐?”고 야단을 할 정도였다. 그 때만해도 맨날 배를 곯고 살아서 그런지 그렇게 많이 먹어도 소화가 잘 됐다.
2만원을 빌려서 결혼식을 했다. 다시 옷을 빌려 입고 버스를 타고 의정부로 가는데, 남의 옷을 빌려 입어서 어색했는지 검문소에서 내리라고 했다. 그래서 같이 간 사람들이 결혼식 가는 신랑이라고 말해줘서 간신히 타고 갔다.
의정부에서 광릉내로 버스를 타고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는 사람이 거길 언제 버스를 타고 가냐고 택시타고 가자고 그랬다. 광릉 내 갈려면 멀긴 멀었다. 시발택시라고 그걸 두 대 타고가자고 하는 데 나는 돈이 없고... 나중에 들은 얘기로, 처갓집에서는 신랑이 버스 타고 온다고 해서 수군대면서 얼마나 없이 살면 버스를 타고 오냐고 그랬는데 택시가 두 대 오니까 다들 난리였다고 한다.
결혼식은 시간을 따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도착하면 하는 거였다. 여기서 아침 일찍 떠났다. 결혼식 끝나고 바로 그 차로 타고 왔더니 어둑어둑해졌다. 그런데 나는 호주머니가 비어서 죽겠지. 남의 식구 데려다 놓고 먹고 살게 넉넉해야 되는데 그게 모자랐으니 걱정이었다.
큰집에서 하루저녁 자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 이튿날에 아내보고 쌀 한 되 사오라고 하니까 챙피하다고 펄펄뛰었다. 아내는 친정에서 농사를 넉넉히 져서 쌀을 가마로 놓고 살았는데 한 됫박 사오라니까 부끄러웠던 거지. 한 말을 사오래도 안간다고... 다행히 한 말 사다먹고 나서 집세 밀린 집에서 돈을 줘서 한 가마 사다먹었다. 그래도 집은 있었다. 새로 지은 집인데 꽤 크고 좋았다. 방이 여섯 개였는데 그 방을 세를 줬다.
아내가 와서 썰어 담근 김치를 한 동이 사오고 우거지를 사다가 시레기 국을 끓이고 하니 맛있다고 잘들 먹었다. 그런거 없이 간장만 찍어 먹다가 김치와 국이 있으니 그냥 아주 좋아 죽었지. 그렇게 살았어.
동생들 옷을 벗기면 옷솔기로 석 줄씩 이가 나래비로 섰다. 머리카락을 들쳐보면 머리가 석캐로 하얬다. 옷을 털면 투투투투 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내가 삶고 씻고 하니까 차츰 없어졌다. 그런 세월 다 지나고 어느새 갈 때가 다 됐지...

직업

이 지역은 어떤 곳이냐면 구들장 만드는 돌이 나오는 곳이었다.
여기서 뗀 구들장이 서울로 다 나갔다. 그게 돈벌이가 돼서 나도 구들장 뜨러 다녔다. 나이 먹도록, 결혼하고도 다녔다. 망치로 켜켜이 돌을 켜는 것이다.
그 후에 파주에 장파리에 있는 KSC 10중대에 취직이 돼서 3년간 살았다. 파주 근방에는 안돌아다닌 데가 없었다. 71년에 거기서 감원을 당해서 고향땅에 돌아왔다. 1년 되기 한 달 전에 내보내서 결국 1년치 퇴직금을 못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그 당시 동두천 지역이 미군기지촌으로 활성화됐다. 징집제로 한국에 온 미군들이 돈을 잘 썼고 그래서 가게도 잘됐다. 방 2개 포함해서 22평 규모의 가게였다.
가게와 함께 나무도 해다가 약 3~4㎞ 거리에 있는 동두천 큰 시장 쪽으로 팔러다녔다. 저 쪽 청산에 가서 하루 종일 두어 둥가리 해서 집에 오면 캄캄했다. 청산에는 6·25때 무척 추었는데 소나무가 얼어 죽었다. 그 죽은 나무들을 잘라왔다. 동두천 시내나 이 동네에서도 아가씨들 많이 데리고 있는 집에서 샀다. 나무가 얼어도 잘 탔다. 참나무 밤나무 같은 거 잘 탔다. 우리는 단으로 요만큼씩 묶었다. 한 단에 지금 돈으로 하면 50환 정도 받았던 거 같다. 그 돈 가지면 어머니가 쌀을 한 두 되를 살 수 있었다.
동네 친구들은 돈 벌려고 ‘팸프’라고 아가씨를 미군한테 소개해 주는 일을 했다. 10불을 받으면 2불을 소개해준 사람한테 주는 거다. 기지촌 생활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었다. 이 동네에 아가씨들이 780명까지 있었다. 강제징집을 한 것은 아니지만 돈 벌러 나온 것인데 그 중에도 꼬임에 빠져서 온 경우가 많았다. 포주한테 전부다 매여서 생활하게 된다. 여기에 들어오면 인신매매가 된다. 그 사람들한테 매여서 자기 활동을 못했다.



탑동초등학교가 지금은 100여 명인데 당시에는 800명이 넘었을 만큼 주민들이 많았다. 지금은 미군들이 없고, 돈을 안쓰다 보니까 동두천시가 망그러졌다.
일명 ‘양공주’라는 이미지 때문에 여기 사는 사람들을 다 그렇게 본다. 오히려 여기 사람들은 지역이 이렇다보니까 딸을 낳아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교육시킨다.

지명유래


파주군 장파리에 살 때 첫째딸 돌잔치

신시가지 초성리에서 넘어오면 창말이라고 있다. 동두천초등학교와 동양대학이 들어와 있는 곳이 창말이다. 그 밑으로 내려오면 빈양말, 싸릿말, 보투루리, 너른바위까지 동네가 그렇게 있었는데 그 동네가 다 미군기지가 됐다. 그 사람들이 소개(疏開) 되서 이쪽으로 나왔다.
동두천 신시가지는 옛날에 모랫말이었다. 그 위에 서낭당이라고 있는데 그쪽이 얕아서 비만 오면 쓸고 내려와서 농사도 못짓던 곳이다. 개울(신천)을 정리하면서 둑을 올려서 거길 막다보니 물이 넘치지 않아서 논이 생겼고 그러다보니 전부다 집을 짓고 해서 신시가지가 생겼다. 우리 동네아래와 동두천 큰시장까지 모랫말이었다. 옛날에 거기에 호밀만 심었다가 비오면 그것도 못 먹고 그랬다. 모래밭에다 심어먹을게 없었으니...
원 동두천은 동두천역이 있는 곳이다. 동두천은 동녘동자에 콩두자를 쓴다. 보뚜들기, 싸릿말, 빈양말 이쪽에 콩을 많이 심어서 동두천이라고 얘기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게 알고 있다. 이 위 탑동이 포천군이었는데 지금은 동두천으로 속한 곳이다. 동쪽 머리두자 즉, 동쪽 머리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해서 동두천이라고 불렀다. 포천은 어딜 가던지 남의 동네 물은 안먹었다. 탑동이 포천이었는데 그 동네 사람들 남의 동네 물 안 먹었다.
그렇게 해서 동두천이라고 했고, 그 위로 가면 어수동, 즉 이태조가 지나가면서 물을 먹어서 어수물, 어수동이 있다. 거기까지는 모랫말에서 내려가는 물이 안들어갔다. 산쪽으로 동네가 있었는데, 어수물 그 위로 샘골, 산골, 방축골, 황매동이 있다. 황매동은 옛날에 황진이가 황씨네 살던 동네에 와서 일주일인가 생활하다 가서 황매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위로 오면 샘골, 조골이 있고 산쪽으로 안골, 서낭당이라고 부르는 동네가 있다. 옛날에는 몇 천 명 정도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9만 8천 정도 살고 있다. 봉암리 쪽, 상봉암, 소요산 있는 곳, 하봉암도 있다. 동네가 그런식으로 이뤄졌었는데 신시가지 들어오니까 발전은 조금 됐는데 인구는 늘지를 않는다.


파주군 장파리에 살 때의 모습


처갓집 육순잔치

귀한 이야기 들려주신 김재만 어르신께 감사드립니다. 고생 끝에 낙이라는 말 그대로, 어려운 시절을 겪어내시면서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그 고생을 구수한 추억으로 만드셨습니다. 생생한 증언 덕분에 동두천 광암리가 너무나 가깝게 느껴집니다. 아름다운 삶을 이루시고 모본이 되어주신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글 이옥석

상명여자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고양신문 기자와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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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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