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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의 토박이, 정수일 선생님이 들려주는 농촌과 전통문화

경기학광장Vol.3 _ People & Life

< 평택의 토박이, 정수일 선생님이 들려주는 농촌과 전통문화 >


- 경기학광장Vol.3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경기도 남서부에 위치한 평택시는 조선시대만 해도 충청도에 속했던 곳으로, 지금의 팽성읍 일대가 옛 평택현의 관아가 있던 자리다. 현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평택시는 크게 3개의 지역으로 구분이 가능한데, 크게 팽성읍과 진위면, 안중읍이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은 진위천과 안성천 등의 자연적인 하천과 함께 조선시대에 진위면은 별도의 진위현(振 威縣)이 있었고, 안중읍의 경우 수원군(水原郡)에 속했던 적도 있다. 이 가운데 안중읍 현덕리의 토박이로 살고 있는 정수일 선생님은 지역의 농민운동과 지역사회개발, 3.1운동 선양사업 등을 이끌어간 시민사회의 원로이자, 평택의 토 박이다. 정수일 선생님의 삶을 통해 평택의 농촌과 문화의 옛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평택의 토박이, 정수일 선생님과의 인터뷰

평택에 정착하기까지

정수일 선생님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가장 먼저 평택에 정착하게 된 계기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이에 “처음 평택에 정착하게 된 건 9대 전으로 거슬러간다. 당시 우리 조상이 화성시 남양을 떠나 인광리에 정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소개했다. 또한 “당시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공부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에 더 치중했다”고 한다. 특히 선생님의 조상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바로 장예쌀이다. 생소하게 느껴지는 장예쌀은 일종의 대출 형태로, 보릿고개에 곡식을 빌려주면, 후에 추수한 뒤 이자와 함께 갚는 방식으로 해방 이후에 도 찾아볼 수 있던 풍경이었다. 장예쌀과 관련해 “보리 1말을 빌리면 추수해 쌀 2말로 갚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장예쌀과 관련한 풍습은 의외로 지명에 영향을 미친 사례도 존재하는데, 실제 하남시 신장동에는 장예말이 있다. 장예말은 장예쌀과 관련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풍습이 지명에 영향을 미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어 선생님이 만주에서 태어나시게 된 계기에 대해 질문을 드렸는데, 이와 관련해 선생님의 아버지(=정우명)가 만주로 건너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선생님의 아버지인 정우명 선생은 당시 공부를 잘해 명문학교로 손꼽히는 중앙고보(=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학 중 일제 앞잡이인 교장을 쫓아내기 위한 집단행동에 나섰다가 퇴학 조치를 받게 되는데, 이른바 중앙고보 데모사건이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다시 중앙고보로 돌아가 졸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중앙고보를 졸업한 뒤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상과에 진학했는데, 재학 중 일본인들과 싸우다 스스로 학교를 자퇴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메이지대학)을 다니던 중 학생운동과 아나키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한때 지인의 추천으로, 부천군(富川郡, 현 인천시 남구)에 근무하기도 했지만, 조선인에 대해 창씨개명 및 머리를 깍으라는 등의 강요와 같은 일을 했음에도 임금의 차별을 주는 것에 분노해 일을 그만두고, 만주로 건너갔다고 한다. 한편 만주로 건너간 뒤에는 지금의 관광서 격인 길림성공서의 임시직으로 입사했는데, 위생계에 근무하며 주로 아편을 단속해, 몰수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독립군 참모장인 신숙 선생과 연결되어 몰수한 아편 중 일부를 넘기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빼돌린 아편을 팔아 독립자금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일이 발각되어 쫓겨난 뒤 목단강 인근에 거주하며 벼와 콩을 심 고 농사를 짓고 사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방을 맞이하셨다는 설명이다. 한편 정수일 선생님이 태어나신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선생님은 1940년에 태어나셨는데, 아명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릴 적 내 아명이 만길이다. 이유는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렇게 조국이 해방된 뒤 현덕면 인광리로 돌아오게 되고, 지금까지 평택의 토박이로 살아가고 있다.

농민운동과 3.1운동 선양회

평택으로 돌아오신 뒤 선생님은 주로 농민운동과 지역사회, 3.1운동 선양회 등 시민운동가의 삶을 살아오셨다. 이러한 시민운동 가운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농촌운동이었다. 스스로 농민으로 소개하기도 했던 선생님은 50년대 평택군 4H구락부연합회의 3대 회장을 역임하며, 관련 조직을 정비했다고 한다. 4H 구락부는 현 4H 운동의 전신으로, 농촌의 생활 향상 및 기술 개량과 더불어 미국의 원조 속에 농촌 일꾼을 양성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지금도 평택 농업박물관에 이때의 사진과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80년대 평택시 농민회 고문과 전국농민운동연합을 조직화하고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 선생의 주요한 관심은 수세의 부당성을 강조하며, 이를 폐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이었다고 한다. 수세는 쉽게 물세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수세의 징수는 수리시설의 건설 및 보수, 유지와 함께 조합 운영 등을 위한 일종의 세금 징수의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 수세를 징수했던 기관은 시기에 따라 명칭의 변화는 있지만, 1917년 조선수리조합을 시작으로, 1971년 농지개량 조합(=농조, 전신인 토지개량조합)으로 바뀌게 된다. 때문에 인터뷰 중에도 농조와 관련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는데, 수세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이유 가운데 수리시설의 정비는 마땅히 나라에서 해야 할 일임에도 농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던 사례였다. 또 한 땅의 경작면적에 따라 수세를 매겼기에 농민들의 부담은 컸다고 하는데, 이러한 연유로 수세의 부당성에 대한 공론화가 이루어졌고, 수세 거부와 농조의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져간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수세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 강조했던 정수일 선생님은 수세 싸움에 앞장을 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징역을 살기도 했지만, 선생님의 이러한 활동 등을 통해 지난 200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요구로 수세가 공식적으로 폐지될 수 있었다.

현재 정수일 선생님은 평택시 3.1운동 선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할 것 없이 3.1운동에 대한 선양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평택의 3.1운동에 대해서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선생님께 평택의 3.1운동이 다른 지역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이와 관련해 선생님은 “1919년 3월 9일 현덕면 계두봉에서 3.1운동이 시작했다. 경기도 남서부에서는 최초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언급, “타시군의 경우 대개 면단위에서 2~3곳 안팎으로 참여하는 것과 비교해 평택의 경우 11곳의 모든 면에서 참여했다”는 차이점을 설명했다. 이와 함께 “당시 일제는 평택의 만세운동에 대해 광포(狂暴)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며 이는 일제가 보기에도 평택의 3.1운동이 치열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3.1운동 선양회의 활동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고 설명하는 정수일 선생님, 단적으로 평택의 3.1운동 최초 발생지인 계두봉에 비석을 세운 것이 지난 2012년이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 3.1운동과 관련해서 관심이 없던 상황에서 90년대 평택 3.1운동 최초 발생지 표석 건립 준비위원회를 발족했지만, 이런 저런 이유들로 실제 표석이 세워지지 못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선생님은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최초 발생지 비석을 조성했는데, 지금도 해당 비석이 계두봉에 세워져 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당시 비석을 세울 때 성금을 걷은 지 불과 열흘 만에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행사와 선양사업을 하던 모습과는 사뭇 비교가 되는 풍경으로, 이렇게 평택의 3.1운동 선양사업이 초창기에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며, 이야기를 들려주신 정수일 선생님, 향후 계두봉 자리에 평택 3.1운동 기념탑의 조성과 이번에 포 함된 훈, 포장을 받은 60여명의 흉상을 제작, 평택의 3.1운동 선양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덕면 계두봉, 평택에 첫 3.1운동이 시작된 장소다.

▲ 계두봉에 세운 평택 3.1운동 첫 만세운동 터 표석

사라져가는 전통문화, 복원을 위한 노력이 필요해

한편 인터뷰 중 정수일 선생님은 사라져가는 경기도와 평택의 문화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다. 특히 농촌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전통문화가 사라진 것에 대해 농촌으로 확대된 종교의 역할이 크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우리 민속생활사가 사라지고 변조되는데, 몇 가지 큰 영향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 문화의 전래”라며 “기독교의 경우 기존의 전통문화를 신앙으로 보기 때문에 농촌으로 확대된 기독교 문화와 우리 민속생활사가 충돌하는 지점이 발생한다”라고 설명한다. 이와 함께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생활사적 유품을 태워버리는 것 역시 생활사적 문화가 사라지는데 한 요인이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이를 위해 “지금이라도 생활사적 문화를 연계시키기 위해서는 조상들이 쓰던 것을 소중히 보관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전통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가장 먼저 터주가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는데, 생소하게 느껴지는 터주가리는 민속신앙의 측면에서 집의 울타리 안을 지키는 신으로, 장독대 가까이에 세우는 것이 특징이다. 터주가리의 외형을 보면 내부에는 항아리가 있는데 여기에 벼나 콩 등의 종자를 담고, 외부에는 짚으로 엮은 짚가리를 덮어두는 형태다. 이러한 터주가리와 관련해 정수일 선생님은 “농민들이 내년 농사 때 쓸 종자(=씨앗) 을 보관하는 장소였다”고 설명한다. 또한 “어떤 일이 있어도 터주가리에 있는 종자는 건드리지 않았다”며 농촌 사회에서 터주가리가 민속신앙의 측면이 아닌 종자를 보관하던 장소로 활용되었음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터주가리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고 하는데, 한 번은 기독교 쪽에서 터주가리를 신앙의 그것으로 인식, 신도들에게 터주가리를 치우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러한 농촌사회의 변화와 함께 전통문화 역시 사라졌다는 점에서 안타깝게 느껴지는 한 장면이다.

두 번째로 과거에 평택의 농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 중 칠성주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칠성주머니의 외형은 무명으로 만든 주머니 안에 쌀을 다섯 되 넣어 벽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칠성주머니의 목적은 혹 집안에 변고가 있거나, 가세가 기울어 노모가 식사를 못할 경우 주머니 안에 있는 쌀을 꺼내어 밥을 지어 올리는 일종의 비상식량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칠성 주머니 역시 민속신앙으로 접근해, 어느 때부터인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대감가리가 있는데, 생소한 이름인 대감가리는 일종의 공동체 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설명이다. 대감가리는 대감님처럼 베풀고 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주로 부잣집에서 큰 독에 벼를 담아두었고 한다. 그러다 보릿고개가 닥치거나 노모가 병으로 굻고 있을 경우 대감가리의 벼를 내어 주었다. 그렇게 벼를 받아오면 돌절구나 나무절구에 찧어 죽을 쑤거나 시레기를 넣어 양을 불려 먹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대감가리 역시 터주가리와 칠성주머니처럼 지금은 사라진 전통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을 입구에 돌을 쌓아둔 서낭과 관련해 신앙의 측면이 아닌 마을 지킴이로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서낭에 돌을 쌓은 건 예전 마을과 마을이 서로 다투는 경우가 있었는데, 돌맹이는 이때 쓰기 위한 용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장승 역시 대부분 전통적인 민속신앙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 장승의 다른 용도로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복원하지 않고는, 경기도와 평택의 문화를 이야기하기 어렵다” 고 설명한다. 이처럼 평택의 토박이로, 정수일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평택의 변화와 전통문화 복원의 필요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정수일 선생님과 함께

글 김희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문화교양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의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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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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