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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수원화성 행궁길과 수원의 근현대사

경기학광장Vol.3 _ Trip & Healing

< 수원화성 행궁길과 수원의 근현대사 >


- 경기학광장Vol.3 _ Trip & Healing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수원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수원을 사랑한다.
한 자리에 30, 40년씩 머물며 맛을 지켜온 노포가 즐비해서 좋고, 구석구석 옛 도심이 원형대로 남아 현재의 사람들이 북적여서 좋다. 무엇보다 나고 자란 고향을 자랑하듯 말하는 수원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으레 서울에 와서 살아야만 ‘성공’했다고 치는 관습에 젖지 않고 서울의 좋은 대학을 나와도 다시 수원에 돌아와 둥지를 트는 일이 그들에겐 자연스럽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공간은 ‘행궁길’이다. 행궁길은 수원의 장점이 다 녹아있다. 행궁길이 있는 행궁동은 화성행궁과 성곽을 둘러싸고 형성된 마을인데, 몇 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옛날 주택과 골목길이 주는 옛 정취가 상당하다.
‘레트로’가 유행인 최근 몇 년전부터는 행궁의 정취에 취한 젊은이들이 옛 주택 1층을 개조해 개성 넘치는 카페나 음식점을 차리는 일이 늘었다. 그 덕에 서울의 경리단길, 망리단길, 삼청동길에 버금 가는 ‘행리단길’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옛 것 위에 젊은 활기가 더해지니 이보다 더 매력적일 수 없다.
이렇듯, 행궁길에는 오랜 시간 새겨진 사람들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역사에는 우리네 근현대사의 가슴 아픈 흔적도 함께 있다.

화성행궁 봉수당 옛 사진

수원화성 행궁의 정수, 봉수당의 외침

그저 평화롭기만 한 행궁길 위에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조선 성군이라 불리는 정조 정치철학의 요체인 화성행궁만 해도 가슴 아픈 근현대사 아픔이 곳곳에 서린 유적지다.
지금은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국내외 관광객이 꼭 한번은 들르는 유명 관광지이지만 한때 나라 잃은 백성의 짧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는 걸 잘 알지 못했다.
행궁 봉수당은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군인에게 짓밟힌 여성들의 역사가 있었다.
봉수당이 어떤 곳인가. 화성행궁의 가장 중요한 정궁의 역할을 했다. 또 정조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 ‘진찬연’이 열렸던 곳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 등 옛 기록에도 자주 등장하는 유서깊은 공간이다.
그러나 100년 전인 1919년 3월 봉수당은 ‘자혜의원’으로 탈바꿈 돼 있었다. 일본은 찬란했던 역사를 무참히 지웠다. 화성행궁의 심장과도 같은 봉수당을 짓밟는 것이 식민지 조선에 어떤 의미인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왕조의 권위를 무너뜨려 조선인의 자존심을 짓밟고 자신의 발 아래 복종하게끔 한 것이다.


화성행궁 봉수당


봉수당을 헐고 세운 옛 경기도립병원

다행히도 우리 선조들은 굴종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29일, 자혜의원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온 기생 33명이 봉수당 앞에서 독립을 외쳤다.
사실 건강검진 미명하에 일본인 의사에게 치부를 드러내고 성병 검사를 맡아야 하는 일은 치욕이었다. 나라잃은 백성, 그 안에서도 가장 약한 이들이 겪어야 했던 치욕이다.
치욕 앞에서 김향화를 비롯해 수원예기조합 기생들은 굴하지 않았다. 울분을 토해내듯 당당하게 독립을 외쳤다. 총칼을 찬 일본군에게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독립을 외쳤다.
그 단발의 외침은 수원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당시 행궁을 중심으로 한 수원 종로거리는 도시의 가장 번성한 곳 중 하나였는데, 지식인과 상인들은 기생들의 용기를 보며 독립의 열망을 폭발시켰다.
한때 일제에 짓밟히고 독립의 열망으로 뜨거웠던 봉수당은 과거의 영광은 잃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장소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겨울에도 국내외 관광객들이 꾸준히 찾아온다. 하지만 과거의 용기있는 외침을 기억하는 이들은 흔치 않다. 흔적도, 하물며 후대의 기록조차 없다. 씁쓸하다.
사실 우리가 보는 봉수당은 예전의 그 영광 속의 봉수당은 아니다. 일제가 자혜의원으로 바꾼 뒤 제멋대로 부수고 망가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1924년엔 완전히 허물고 난 뒤 그 위에 떡하니 ‘경기도립수원의원’을 세웠다. 그래서 벗겨진 칠 하나 없어 오히려 어색하기만 한 현재 봉수당의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아리다.

흔적 없이 살아있는 역사길, 양성관가옥·신풍초등학교


신풍초등학교

화성 행궁을 중심으로 양갈래 길이 있다. 한쪽은 문화예술인들이 일찍이 터를 잡은 ‘행궁공방길’이고 오른쪽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을 시작으로 최소 30여년은 넘는 오래된 주택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행리단길’이다.
행궁공방길은 낡은 단층 건물과 주택이 모여있고 그 1층에 수원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공방을 열었다. 하나 둘 예술가들이 모이자 거리도 조금씩 유명해졌고 사람들도 모이기 시작했는데, 어찌 보면 신도시에 밀려 낙후됐던 구도심의 전성기를 다시 찾게 해준 고마운 길이다.
그 공방길 위에 수원을 쥐락펴락했던 인물들이 거쳐간 대궐 못지 않은 상징적인 집이 있었다면 상상이나 할까.
‘양성관 가옥’. 이 집의 주인은 수원 최고 부자이거나 최고 권력자 였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공방길을 쭉 가 다보면 언덕배기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는데, 인터넷 지도로 주소를 찍으면 그 쯤 어딘가 빌라건물을 지목한다. 그래도 당시 '남창동의 99칸 기와집'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 법한 그런 인물의 집이었단다.
처음에 누가 이 집을 지었는진 알 수 없지만 기록이 있는 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근택’이 소유했었다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이근택은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인물 중 하나다. 고종의 측근이었지만 친일파로 변절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면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이 됐다.


양성관 가옥 옛 사진

이후 양성관가옥은 이름처럼 양성관이 주인이 됐다. 양성관은 수원 최고 부자였다. 경기 남부 일대 9만여평의 땅과 600명의 소작인을 거느린 대지주였다. 일제강점기의 대부호였던 만큼 지금의 평가 는 엇갈린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수원고등학교의 전신인수 원상업강습소, 화성학원,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 전신의 수원중학교, 수원여자고등학교 등에도 지원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힘썼다. 하지만 일제의 고사기관총 구입비, 군용기 경기호 4대 헌납 등 일제 침략행위에 도움을 주는 행위도 발각돼 현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됐다.
이후 워낙에 넓은 공간인지라, 남창동사무소 등 공공기관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결국 가옥은 매매돼 용인민속촌으로 옮겨졌다. 그 곳에서 ‘대장금’ ‘다모’ 등 역사드라마의 촬영지로도 활용됐다.

공방길의 반대편, 행리단길의 시작점에도 숨겨진 ‘역사스팟’이 있다. 지금은 유적 발굴 등의 이유로 폐쇄된 ‘신풍초등학교’다. 수원 최초의 근대학교로 유명한 신풍초는 원래 ‘수원군공립소학교’로 개교했고 1907년 ‘수원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행궁공방길 거리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촬영지


화성 행궁길 전경

지금은 읍면동, 작은 단위 지역명을 따 학교를 짓는 것이 아주 보편적이지만, 학교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는 흔치 않았다.
수원 근대학교의 상징이던 수원공립보통학교가 '신풍'국민학교가 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다다른 당시의 일본의 폭정은 극에 달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하나라는 미명 하에 조선의 공립보통학교를 일본식의 소학교로 바꿨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특히 수원공립보통학교는 이미 일본인이 다니는 수원소학교가 있다는 이유로 신풍동을 붙여 ‘신풍심상소학교’로 바꿔 격하시켰다.
지금까지 그저 100년이 넘는 초등학교가 도시 안에 있다는 사실에만 주목했다. 이름 안에 숨어있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는 걸 알 았다면, 학교의 벽돌 하나, 운동장의 흙 한톨도 소중히 여겼으리라. 이제는 광교 신도시로 이름만 옮겨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지만, 후대에도 잊지 않고 오랫동안 아픈 역사를 기억했으면 한다.

길 위에서 만난 역사, 부국원

행궁길, 마지막 소개할 곳은 '부국원'이다. 수원의 대표적인 근대식 건물로 알려져 있고 최근엔 리모델링을 통해 수원 근현대사 역사를 알리는 작은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2017년 10월 23일 엔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 698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
부국원은 익히 알고 있는 행궁길에서 도보로 10분쯤 걸어야 하는 곳에 위치했다.
일단 주변 건물들과 다른 독특한 모양새에서 눈길이 간다. 네모 반듯하게 지어진 사각형 건물 사이로 세모지붕 모양을 했다. 건물을 쌓아올린 벽돌도 예사롭지 않다. TV 속 근대를 다룬 시대극에서 보던 것과 색과 모양이 비슷하다. 여기에 아치형의 좁은 창문은 왠지 ‘레트로’ 감성을 자극한다.


화성행궁 앞

부국원은 일제강점기가 한창인 1923년, 종자회사에서 시작됐다. 농업의 기초인 '종자'와 비료같은 물품을 판매하는 ‘주식회사 부국원’이 그 출발이다. 그래서 현재 부국원을 소개하는 문구에는 '식민지 시대 일제의 농업침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라고 안내되고 있다.
그렇게 일제를 부강하게 해주던 부국원은 해방 후 수원법원과 검찰청사로도 사용됐다.
그리고 수원 토박이들에겐 이 곳은 ‘박내과 의원’으로 기억 남을 것이며, 이후 인쇄소가 들어와 부국원의 쓰임이 바뀌었다.
90여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부국원은 굴곡도 많았다. 철거위기에 놓였다 수원시가 매입해 구사일생으로 보존됐고 지금은 수원 근현대사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

행궁길은 워낙에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었다. 밥을 먹으러, 커피 한잔 마시러 심심찮게 오가는 길이었음에도 나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고,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꼭 알리고 싶었다.
오늘도 그 길 위엔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 것을.


글 공지영

유년을 보낸 경기도에 돌아와 경인일보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등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경기도의 숨은 이면과 매력을 동시에 발굴하며 도민에게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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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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