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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 남양 홍씨 문희공파 홍언필 가문

경기학광장Vol.4 _ Village & History

< 화성시 남양 홍씨 문희공파 홍언필 가문 >


- 경기학광장Vol.4 _ Village & Histor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남양 홍씨, ‘당홍(唐洪)’과 ‘토홍(土洪)’

남양 홍씨는 동성동본이면서 ‘당홍계(唐洪系)’와 ‘토홍계(土洪系)’의 두 계열로 나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남양 홍씨’는 사실상 계통을 달리하는 두 개로 분리되어 별개의 성씨집단을 형성한다. 즉 당홍계는 고려의 개국공신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삼는 반면 토홍계는 그보다 약 300년 뒤늦은 고려 고종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將)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한다. 이 두 성씨집단은 역사적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왔는데,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여러 추측이 많지만 이렇다 할 사실적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두 성씨집단의 관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당홍’은 글자 그대로 당에서 귀화해 온 홍씨를 지칭하고, ‘토홍’ 은 우리나라 토착의 홍씨를 일컫는다는 것이다. 둘째, 당홍은 남양의 옛 지명인 당성(唐城)을 본관으로 하는 당성 홍씨의 축약어로서 당홍이나 토홍 모두 남양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이기 때문에 당홍이라는 명칭과 구분하기 위해 ‘토홍’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는 설이다. 셋째, 당홍계의 후손 가운데 일파가 난을 피해 신분을 감추며 별개의 ‘토홍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을 설명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문희공 홍언필 묘소

남양 홍씨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가문이 번성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329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이중 당홍계가 206명이고 토홍계가 123명인데, 전자는 상신 8명, 대제학 3명, 왕비 1명, 청백리 3명을 배출하였고, 토홍계는 상신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3명을 배출하였다. 이처럼 남양 홍씨는 고려시대부터 명문가문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조선조에서 훌륭한 인물을 배출시켜 ‘10대 벌열(十代閥閱)’로 손꼽혀 왔다. 당홍계의 경우 세거지는 지금의 화성과는 거리가 좀 먼 듯하다. 즉 경기도보다는 다른 지역에 세거지를 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파는 남양군파, 문정공파, 판밀직공파, 판중추공파, 대언공파, 시중공파, 시랑공파, 상서공파, 선공감영공파, 익산군파, 당성공파, 경력공파, 사간공파(구참봉파), 중랑장공파, 에사공파, 재신공파 등으로 나누어진다.
반면 토홍계는 남양의 토착성씨로 지금의 화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씨이다. 토홍계 남양 홍씨의 경우 당홍계보다 파가 적어, 시조 홍선행의 9세인 홍익생(洪益生)으로부터, 12세손에서 문희공파(文僖公派), 정효공파(貞孝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등 5개 파로 나누어진다.


곡좌재


서신면 홍법리 입구

서신면 홍법리 큰말

청명산에서 해안을 향해 갈라진 두 개의 작은 구릉 사이에 형성된 좁은 골짜기를 따라 자리하고 있는 홍법리 큰말은 남양 홍씨(토홍계)들이 모여 사는 대표적인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남양홍씨 9세인 홍익생(洪益生)으로 1430년경에 정착하였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양 홍씨 13세 홍섬(洪暹,1504-1585)의 사패지라는 설이 있으나, 그 근거가 미약하다. 최초에 정착한 곳은 지금의 큰말 일대이며, 그 이후 인구 증가와 분가에 따라 이웃하는 자연마을인 삼밭골과 모래지 일대로 분화가 이루어졌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남양 홍씨는 홍한(洪瀚, 11세) 후손의 참의공파, 홍언필(洪彦弼, 12세) 후손의 문희 공파, 홍언광(洪彦光, 12세) 후손의 정효공파(貞孝公派)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마을 형성의 중심이 되었던 양반 사대부 계층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문화의 자연 공간관에 따라 주거지를 선택하고 마을을 구성하며 경관요소를 창출하여 독특한 유교적 문화경관을 자아내는데, 그러한 구체적 결과물이 종택 사당 묘역 재실 정자 서원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신분과 경제력에 따른 사회 구조의 질서가 마을 구조에 반영되어 비교적 명확한 공간질서를 가지면서, 확연한 위계성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홍법리의 경우 많은 현달한 인물을 배출하였던 명문의 세거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유교문화경관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 경기도 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남양 홍씨 묘역이 있고, 역대 선조들의 묘소와 신도비 등이 즐비하여 이곳이 명문의 집성촌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에 홍언필(洪彦弼, 1476-1549, 영의정), 홍섬(洪暹, 1504-1585, 영의정), 홍담(洪曇,1509-1579, 이조판서), 홍진도(洪振道, 1584-1649, 판중추 부사), 홍귀해(洪貴海, 생몰미상, 증좌찬성), 홍한(洪瀚,1451-1498, 증이조참판) 등의 봉분 11기, 문인석 10기, 동자석 2기, 망주석 10기, 묘비 4기, 상석 5좌, 향로석 5좌, 신도비 5기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조선중기의 덕망 있는 학자, 정치가(조광조, 송시열) 등에 의해 찬서(撰書)된 신도비와 묘갈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이곳에 근년에 지어진 ‘곡좌재(曲座齋)’란 사당이 있는데, 이는 묵재공(默齋公) 홍언필과 그의 아들 인재공(忍齋公) 홍섬이 조정(중종-인종)의 당상관을 지내면서 정사에 관한 토론이나 강론시에 비록 공석이라 하여도 부자지간이기에 마주보고 앉을 수가 없어서 동서(東西)로 굽게 앉아 정사를 논하였다하여 세간에서 곡좌(曲座)의 집안이라 불린데서 유래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복 많은 여성에 오른 홍언필의 부인, 여산 송씨

남양 홍씨 가문으로 시집을 간 여산 송씨 송부인은 홍씨 가문의 영화를 절정에 이루게 한 어머니이자 아내였다. 중종때 영의정에 오른 남양 홍씨 묵재공 홍언필과 그의 아들 인재공 홍섬과 관련된 이야기다. 홍섬은 선조 때 영의정을 3번 역임한 명상(名相)이자 청백리(淸白吏)의 칭송을 들었으며, 아버지 홍언필과 함께 부자가 모두 영의정을 지낸 드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송부인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宋軼, 1454~1520)의 셋째 딸로, 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모두 영의정을 지낸 ‘세계에서 유일한 복 많은 여성’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벼슬 영의정은 모두 162명이다. 그 중 3명과 함께 일생을 보낸 송씨 부인은 조선조 유례없는 ‘영의정의 여인’이었다. 게다가 세 남자는 그 즈음의 숱한 사화나 정변의 와중에서도 비교적 순탄한 벼슬살이를 하며 아버지는 67세, 남편은 74세, 아들은 82세까지 살았고 본인은 무려 94세까지 건강하게 살면서 아들의 영의정 벼슬생활을 다 지켜보았으니 그야말로 부귀영화에 천수까지 누린 복 많은 여인이었다. 영의정의 딸로 태어나 영의정의 부인으로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영의정의 아들 앞에서 죽은 것이다.


인재공 홍섬 묘소

이렇게 복 많은 여인이기에 왕비도 송부인이 나타나면 꼭 일어서서 마중하며 깍듯한 존경을 표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변에서 왕비에게 그 까닭을 묻자 왕비는 자신은 남편이 임금일 뿐이지만, 송부인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영의정이니 어찌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답했다고 한다. 왕비의 존경을 받을만큼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송부인은 명문의 여인답게 예의범절에 밝고 부덕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여장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송부인의 처녀시절 친정아버지인 송질은 극성스러운 부인의 성격에 골치를 앓았다고 한다. 이에 자신의 딸들도 어머니를 닮으면 큰일이다 싶어, 세 딸을 불러놓고 한바탕 연극을 했다고 한다. 송질은 딸들 앞에 약을 한 사발씩 내 놓고 너희들이 어머니를 본받아 극성을 부리면 시집을 가더라도 송씨가문에 누가 될 터이니 그럴 것이면 여기 있는 독약을 마시고 아예 죽음을 택하라고 말했 다. 그랬더니 송부인의 두 언니는 절대로 어머니 같은 극성을 부리지 않겠다고 아버지와 약속했다. 반면 셋째 딸 송부인만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본마음대로 살지 못하면 살아도 죽은 것 과 무엇이 다르겠냐며 선뜻 약사발을 들이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약은 독약이 아니라 보약이었고, 딸들의 기질을 시험하고 길을 들이려던 송질은 셋째 딸의 기개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한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중종 6년 4월에 이런 기록이 보인다. “홍언필이 일찍이 윤삼계의 여종과 사통하였는데 홍언필의 처 송씨가 그 여종을 꾀어내 매질을 하고 칼로 머리털을 잘랐으며 심지어 빗으로 그 얼굴을 긁기까지 하여 너무 참혹하므로 물의가 일어났다.” 야사에는 이후의 사정도 나온다. “그 여종을 생사도 확인하지 않은 채 땅속에 묻었다. 사간원에서 조사해 보니 매장될 당시 여종은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도 송씨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산 사람을 땅속에 묻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신혼 때 홍언필이 시중들던 여종의 손을 잡자 태연하던 송씨 부인이 잠시 후 그 여종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성정임에도 불구하고 남편 홍언필의 벼슬길에는 지장을 주지 않은 듯하며, ‘기개와 의지를 겸비한 여장부’로 둔갑한 것이 아닌가 한다.

송부인은 평생 세 번 평양을 갔다. 처녀 때는 평안감사인 아버지를 따라, 결혼한 뒤에는 평안감사 남편을 따라, 세 번째는 역시 평안감사로 부임 받은 아들을 따라갔다. 그러나 정작 천하제일 강산 평양의 경치를 구경한 것은 늙어서 아들을 따라가서였다. 처녀 때와 젊은 부인이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느라 집밖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백발의 할머니 나이가 된 세 번째 방문에 이르러서야 가마를 멈추게 하고 ‘이제는 평양 구경을 해도 욕되지 않을 것이다’며 산천경계를 구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평안감사 관사 별당에는 송부인이 처녀 때 아버지를 따라와서 심었던 복숭아와 앵두나무가 그대로 고목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무가 이렇게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늙었겠느냐고 인생무상을 탄식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중종은 당대 복덕귀(福德貴) 부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특별과거를 베풀고, 글제로 ‘三至柳京歎櫻挑樹老(3번 평양에 가서 앵두나무 늙음을 탄식하다)’를 출제했다.

홍법사와 홍랑각시

조선 제 15대 광해군 3년 (서기1611년)에 창건된 홍법사는 음력 정인월 초이일에 중수된 것으로 홍랑의 살신성인으로 문중과 마을을 지킨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남양 홍씨 문중에 의해 세워진 사찰이다.
조선 제 15대 광해군 2년(1610) 남양반도 해변마을인 서신의 홍법마을. 명나라 천자의 후궁을 구하러 온 사신들이 젊은 아낙네들을 모조리 끌어내려하니 마을 어른인 홍초시를 비롯한 주민들은 아낙네들을 숨기는 등 온 마을은 비명과 통곡의 수라장이었다. 홍만석의 딸 홍랑은 절색으로 소문난 터라 관원들은 홍랑을 내놓지 않으면 왕명을 어긴 죄로 삼족을 멸하고 마을까지 폐촌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 같은 마을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던 홍랑은 조정의 제물로 희생될 것을 결심 ‘모래와 대추, 물’을 세발 가져갈 것을 간청, 명을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천자의 후궁이 된 홍랑은 고향에 서 가져간 대추와 물로 연명하고 궁 뜰에 물을 뿌리며 일백일간 단식투쟁으로 몸을 지키다 “내 목숨이 없어지더라도 내 넋을 보살이 되어 영원히 남을 것이며, 내가 뿌린 모래는 궁 뜰에 남아서 천자가 회개하도록 할 것”이라는 말은 한 후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한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홍랑각시

낭자가 죽은 지 3일 만에 천자는 이름 모를 병을 얻어 백약이 무효였는데 어느 날 천자의 꿈에 나타난 홍랑은 “방탕한 성품을 회개하고 백성을 아끼는 성군이 되옵소서. 그리고 소첩의 혼이 담긴 보살상을 만들어 돌배에 태워서 무쇠사공 12명과 함께 고향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폐하의 병도 낳을 것이며 나라도 부흥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니, 깜짝 놀라 꿈에서 깬 천자는 석수장이와 철공을 시켜 돌배와 무쇠사공 보살상을 조각케 하고 자신도 불전에 나가 백일기도를 드리며 홍랑의 넋을 위로하고 자신의 잘못도 뉘우쳤다. 천자가 백일기도 마지막말 완공된 보살상과 무쇠로 만든 12명의 사공을 돌배에 태워 바다에 띄우니, 이 돌배는 흘러 흘러 꿈에도 그리던 고향 앞바다에 다다른 것이다. 이때 홍법마을의 남양 홍씨 문중의 원로 3명의 꿈에도 똑같이 명나라로 갔던 홍랑이 나타나 “서신 앞바다에 보살상과 무쇠사공이 있으니 사찰을 짓고 모시도록 하라”이르니, 꿈을 꾼 노인들이 바다에 나가보니 정말 돌배에 무쇠사공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조심스럽게 돌배 위의 무쇠사공 2명과 보살상을 내렸으나 나머지 사공 10명과 돌배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 후 홍씨 문중에서는 서신 앞바다가 굽어보이는 마을 뒷산에 홍랑보살과 2명의 무쇠사공을 봉안한 사찰을 건립하니 이것이 바로 홍법사이다.


홍법사 대웅전 안

글 이진복

성균관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중국고대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졸업 후 성균관대를 비롯하여 한양대, 카이스트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1996년 열린사회연구소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닫힌 사회가 아닌 열린 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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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4 _ 2020 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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