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토박이 이영극 어른의 삶과 우리 현대사
- 경기학광장 Vol.4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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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극 선생님
이영극씨는 1938년 무인년에 고양군 송포면 가좌리 372번지에서 출생하여
현재 가좌동 30번지에서 살고 있다. 이 지역에서 대를 이어가며 430여 년을
살아온 여주이씨 집안의 후손이다. 일산읍이 생기기 전 중면 면사무소 직원으로 시작하여 송포동 동장으로 퇴임하였다.
고양향교에서 경전공부를 하며 배움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이영극 선생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새마을운동 등으로 이어지며 한 개인이 겪은 이야기를
풀어주셨다. 그 이야기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한 개인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의 먹거리
1950년, 6.25 나던 해에 우리들이 주로 먹었던 것은 풀떼기, 피풀떼기, 수수풀떼기, 도가니 등이었다. 당시는 누구나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특히 그 해에는 더욱 그랬다. 도가니는 수수를 갈아서 그 가루를 반죽해서 콩을 시루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반죽한 수수
덩어리를 얹어서 찌는 것이다. 익으면 수수반죽에 콩이 더덕더덕 붙었다. 우리는 시루에 안하고 가마솥에 콩 펴고 얹어서 쪄먹었다.
피풀떼기는 지금의 스프 같은 거였다. 피 껍데기를 벗긴 피쌀을
갈아서 죽을 쒀먹었다. 물을 넣고 죽을 멀거니 쒀서 먹었다. 조당숙도 먹었다. 조는 조를 갈아서 반죽해서 인절미처럼 콩가루를 무쳐서
먹는 것이다. 대부분 꽁보리밥을 먹었다. 가을에 이른 벼를 홀치기
해서 쪄서 말린 후 껍질 벗겨서 밥해먹거나 지난 겨울에 말려놓은
시래기로 시래기죽을 해먹었다.
여름에 장마진 물이 다 빠지고 나면 아이들과 함게 천렵을 했다.
물고기가 먹고 싶으면 개울에 나가서 일정하게 구간을 막아서 구간 내에 있는 고기를 잡는 것이다. 개울 중간 중간을 막아서 물을
퍼내고 그물을 땅에 박아서 고기를 잡았다. 물이 남았다 하면 위에
물 막은 개울에 밀대를 만들어서 쓱 밀면 고기들이 밑으로 밀려 내려오면 그걸 잡고 그 다음 둠베에 가서 잡았다.
그렇게 잡은 붕어는 배를 따고 냄비 바닥에 무를 깔고 조림을 하거나 매운탕을 해먹었다. 주로 털래기를 해 먹었는데 그러고도 남으면 붕어찜을 해먹었다. 수리조합시설이 안됐을 때, 물이 얼면 이렇게 봐서 샘구녁 같은데 얼음을 깨고 샘구녁을 파낸다. 미꾸라지 같은 게 거기에 있다. 그걸 건져다가 털래기를 해먹었다.
두신리 산 밑에 주로 참외를 많이 심었다. 그래서 여름날 밤 10시
쯤에 참외서리를 가는데, 주로 참외밭 입구쪽에서 서리를 했다.
불빛도 없이 밤에 참외를 따다보면 익은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개구진 아이들 중에는 참외넝쿨을 뽑아 흔들어서 떨어지는 것만 갖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잘 익은 참외는 꼭지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 1960년대에 찍은 가족사진, 송포면 가좌리 일대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누에를 쳐서 명주실 뽑던 시절
당시 면사무소에 잠사계가 있었다. 누에씨를 각 가정에 나눠주고
그걸 길러서 공판을 내라고 했다. 우리도 누에를 길렀다. 뽕나무가
근처에 별로 없어서 어머니가 부대자루를 메고 먼 곳까지 가셔서 뽕잎을 따오셨다. 그렇게 누에를 길러서 공판에 냈다.
사랑방에 서가처럼 단을 만들고 각 칸에 볏짚으로 섶을 만들었다.
누에가 작을 때는 쟁반에 뽕잎을 채썰어서 넣어주며 길렀고, 누에가
커지면 섶을 만들어서 누에를 섶에 옮기고, 뽕잎이 달린 가지채로
줬다. 그러면 누에가 그걸 먹고 커서 고치가 되었다.
고치는 대부분 공판을 내는데, 조금 남겨서 집에서 명주실을 뽑았다. 거기서 번데기 나오면 삶아서 먹거나 팔기도 했다. 명주실 뽑는
것도 재미있다. 뜨거운 물에 고치를 삶아서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면
실이 풀린다. 그 실을 하나하나 뽑고 그걸 모아서 북에다가 감고 뱅뱅뱅 돌리면 그렇게 모인 실타래가 명주실이 되었다. 베틀에다 북을
감아서 옷감을 짜는데 몇 일 걸렸다. 당시 시골에는 그런 게 집집마다 다 있었다.
송포초등학교 시절
1940년대 말 송포초등학교에는 오전오후반이 있었는데, 의자가
없어서 바닥에 앉아서 공부했다. 학교 앞에 뽕나무가 많았다. 우리가 학교 다니기 전에는 학교에서 누에를 길렀다는데 우리 때는 안했다. 현재 송포초등학교 체육관 자리가 옛날 뽕밭이었다.
내가 오후반이었을 때 동네 애들이랑 학교에 가다가 율리 부락에
불이 난 걸 보고 불구경을 갔다가 등교시간에 늦었다. 담임 선생님이 늦은 사람 벌을 세운 후에 앞으로 늦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들어가라고 했는데 다 들어가고 나만 남았다. 내가 무슨 깡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너는 왜 안들어가냐?”라고 선생님이 묻자 “저는 앞으로 늦을지 안늦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였는데, 선생님이 다짜고짜 따귀를 몇 대나
때리셨다. 건방지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다. 속상한 마음에 1주일 동안 학교에 안 갔고 그 기간 동안 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웠다. 학교에서 왜 안오냐고 하니 난 매 맞아서 안 간다고 말했다. 결국 교장선생님이 찾아오셨고 아버지가 학교에 나가라고 해서 나갔다. 점심은
집에 가서 먹고 왔다. 소풍은 주로 심학산으로 갔다. 도시락에 계란이나 밤을 삶아갔고, 소풍을 가면 수건돌리기를 주로 하며 놀았다.
학교에서는 학생들한테 송충이 잡아오는 숙제를 내줬다. 당시는
송충이 없애는 게 큰일이었다. 또 몇 페이지까지 풀어오라는 산수숙제도 있었다. 산수 숙제를 내주면 콩을 이만큼 갖고 와서 더하기 빼기 나누기 등을 다 했다. 가을이면 운동회를 했다. 청군백군으로 나눴고, 당시 나는 백군 응원단장을 했다. 수염을 달고 창호지로 두루마기를 해 입고 깃발 들고 춤을 추며 응원을 했다.
학교 다닐 때 송포초등학교 3.1소년단을 만들었다. 중앙에 김일평
선생이 있었다. 우리 동네 이익현씨와 이석현씨가 김일평 선생한테
배웠던 것 같다. 대한청년소년단 비슷하게 송포초등학교 3.1소년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가좌리 친구들 십여 명이 따로 조직한 3.1청년단이 있었다. 적이 늘어놓은 전선을 잘라버리는 일을 했다. 총신도
몇 개 주워 바치기도 했다. 학교 관리하는 아저씨가 숙직하는 곳 뒤에 방공호가 있었는데 거기 숨어서 지내기도 했다.
중학교 들어간 후에 그 소년단이 책을 보자며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모아서 책을 사서 돌려보는 일을 했다. 당시 사서 봤던 책이 아직도 몇 권 남아있다. 『금삼의 피』, 『흙』, 『상록수』 등 문학전집, 계몽서적 등을 읽었다.
연극도 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께 효도하고 일 잘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양정고등학교 다니던 학생이 대본을 갖고 왔다. 송포초등학교에서 여름방학 때 연습을 했고, 여기서 마을 사람들한테 보여드렸는데 관람객들이 꽤 많이 왔다. 연극만 했는데도 당시 시골에
볼거리가 없으니 많이들 왔던 것이다. 당시 내가 주연을 갑자기 맡게 됐다. 주연 맡은 친구가 당일날 못오게 되서 내가 주인공 맡게 된
것이다. 무대 뒤에서 읽어주면 그걸 받아서 내가 대사를 했으니 익숙하질 못했다. 그래도 다들 재미있게 봐주셨던 거 같다.
▲ 단군기원 4288년도 송포초등학교 기성회비 납입통지서
몇 번 죽다 살아난 6.25 전쟁 이야기
해방되자 송포면 사람들 전체가 다 나와 괭가리를 치면서 면 전체를 한 바퀴 돌아다녔는데 우리 동네는 두신에서부터 당음으로 한 바퀴 돌았다. 그 당시 동네마다 해방을 기념해서 8월 15일에 마을 대항 체육대회를 했다.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는데, 지도읍에 해당하는
행신동, 행주동, 능곡동 주민들이 이어가고 있다.
내가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피난은 못갔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따따따 소리가 나서 나와봤더니 비행기가 떨어졌다. 동맥이(동막이) 하던 음송굴 마을 앞에 떨어졌다. 우리 아버님이 비행기 떨어진
데서 쇠 파편을 주워다가 아궁이 앞에 걸쳐놓는 것으로 사용하셨다.
인민군이 우리 산에서 대화리 쪽에다가 대포를 쏘는 걸 봤다. 그
해 겨울에 중공군이 들어왔다. 중공군들은 이 동네에서 한두 달 정도 지냈는데 그 당시 말을 타고 왔다. 산을 깊이 파고 그 안에 말을
넣은 후 그 위에 뭘 덮었다. 방카를 파서 거기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일할 때에 일꾼들이 오면 가루담배를 한 웅큼씩 몫을 나눠줬다. 그러면 하루 종일 그걸 폈다. 우리 동네에 온 중공군들은 신사여서 민간인에게 피해를 안줬다. 그들은 동네에서 나갈 적에 집집
마다 다니면서 손해본거 없냐고 물었고 없다고 그러니까 집집마다
장수연이라는 담배를 2봉지씩 주고 갔다. 당시에 담배 제조창이 서대문구에 있었는데 아마도 그걸 털었던 거 같다.
중공군들은 동네에 들어왔을 때 우리보고 담배를 달라고 했다. 우리가 담배가 없다고 말하니까 호박잎을 말려서 가루내서 종이에 말아 피웠다. 호박잎 담배를 핀 것이다. 종이가 없으면 신문지에 싸서
피었다. 궐련을 만드는 종이를 목침에 놓고 종이에 담배를 올려서
김밥 말듯이 말아서 피웠다.
그 당시 논 전체가 피밭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낮에 거기에 가서 숨어살고 밤이면 집에 와서 자고 그랬다. 우리 아버님과 함께 대동청년단 단장하던 이영섭씨가 있었는데, 그 날만 지났으면 무사했을 건데, 우리 아버님이 “자네는 하루 더 있게,” 라고 하셨는데 “괜찮겠죠.” 라고 하면서 집에 왔다가 토착빨갱이들한테 잡혀서 북으로 가다가 처형당했다고 한다. 동네 유지였던 분들 끌려갔던 기억도
있다.
6.25가 나고 중공군이 온다고 그럴 적에 나하고 사촌만 살리시려고 외가가 있는 성석리 진밭으로 가라고 했는데 가다가 그만 인민군한테 걸렸다. 삼댕이라고 하는 기찻길 밑에서 인민군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를 붙잡고서 검문을 하면서 호주머니에 있는 거 다 내놓으라고 했다. 우리 호주머니에 세계지도가 있었는데 그걸 보고 스파이라고 하면서 사무실로 끌고 간다고 하는 걸 마침 이웃동네 김만용
엄마가 지나가다가 나를 알아보고 그런 거 절대로 아니라고 말해줘서 살아서 나왔다.
또 한 번은 벽제로 피난 갔다가 등잔기름이 없어서 석유를 가지러
집에 왔다. 그때 석유와 반찬할 무시래기 한 타래를 짊어지고 가다가 개미고개라고 금정굴 있는데서 국군한테 걸렸다. 국군들도 우리
보고 스파이라고 했다. 우리는 절대 스파이가 아니고, 중공군이 오면 사람 모가지를 베고 여자는 찔러 죽인다고 해서 겁이 나서 외가로 피난 가는 중이라면서 빌고빌고 해서 살아났던 일도 있었다.
서울로 학교 다니던 이야기
우리는 교육일 수가 안 맞아서 2월에 졸업하지 못하고 초등학교를 8월에 졸업했다. 우리가 중학교 국가고시 1회로 시험을 보고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집에서 1시간 걸어서 일산역까지 가
서 기차를 탔는데, 말곳간, 짐곳간에 탔다. 짐차라서 밑에서 바람이
심하게 올라왔다.
집에서 일산역까지 걸어서 1시간, 일산서 서울역까지 1시간, 서울역서부터 학교까지 걸어서 1시간 걸렸으니, 정시로만 3시간 걸리는
등굣길이었다. 기차가 연착되는 경우는 늘 있는 일이었다.
교복도 꾀죄죄하고 운동화도 제대로 못 신고 다녔다. 양말도 없이
그냥 맨발에 운동화 신고 다녔다. 젊었으니 땀도 많이 나고 제때에
세탁도 못했다. 여기에 비라도 맞아 교복이 홀딱 다 젖으면 옷에서
나는 냄새로 난리였다.
어느 날인가 비가 와서 다 젖은 채로 학교에 갔다. 씻을 시간도 없어 바로 교실로 들어가 앉았다. 그랬더니 앞에 앉은 놈이 “야 이게
무슨 냄새냐?” 그러는데 죽겠어서 1교시 끝나고 우리 학교와 붙어
있는 비원에서 가서 물 흐르는데서 씻고 왔던 일도 있다. 도시락도
무짠지에 보리밥이었다.
▲ 1970년 성역화된 행주산성 충장사에서 찍은 사진
학교를 마치고 일을 시작하며
1958년에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농사짓는 것을 도왔다.
모내기 철이었는데, 이웃집에서 못줄을 잡아달라고 했다. 못줄을 잡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젊은 놈이 모를 내지 않고 무슨 못줄을 잡느냐고 뭐라 하시면서 모를 내라며 나를 모내는 이들 가운데에 서게
하셨다. 그러고는 나래비로 죽 서서 모를 심으면서 못줄을 넘겼다.
하지만 내가 모를 내봤나... 모를 잡을 때 손에 모를 많이 잡으면 한
번에 모를 다 심을 수 있는데 나는 그걸 잘 못하니 한번 내면 모가
모자라서 남들 쉴 때 모를 가지러 가야했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모를
내가는데 너무 힘들고 못견디겠어서 나는 못한다고 논에서 나와 집에 오는데 샛밥이 떴다. 다들 밥 먹고 가라고 소리치시는데도 나는
그것도 싫다며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울었다. 그랬더니 그다음부터는 안 불렀다.
그해 12월 경에 농지수리시설 공사가 시작됐다. 흙을 파내서 농수로를 만드는 일이었다. 나도 거기서 일했다. 한 평씩 맡아서 퍼내는
‘평띠기’로 하고 돈을 받았다. 그 일은 괜찮았다. 한 달 일해서 쌀 한
가마 이상 샀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레일을 깔아서 흙을 옮기는 일을
했다. 들판에 둑을 쌓아야 수로가 되니 높은데서 흙을 퍼서 쌓는 일을 했다. 피난민들이 많이 사는 장성마을 사람들이 와서 주로 했다.
당시 이은구씨가 십장을 맡았다.
군대 시절 이야기
이 일을 하다가 군대에 나갔다. 훈련소에서 훈련받아 경상남도 김해 공병학교에 가 있었는데 그때 태풍 사라호가 불었다. 마산에 문창이라고 보급창고가 있었는데 태풍 사라호 때문에 그게 날아가서
보수작업을 했다.
그 일 끝난 후에는 진해 육군대학인가에서 높은 산꼭대기에 댐을
막아 물 가두는 공사했는데 거기서 모래를 메고 다니는 일을 했다.
그 일이 끝나고 부산에 있는 807공병
야전정비중대에 배치되었다. 1군 소속이었다가 군수기지사령부 807부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62년 3월 2일 제대하고 바로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화전리에 있던
30사단에 가서 재건훈련을 받았다.
제대하면 예비사단에 가서 양돈, 양계 교육을 3일간 받는 게 있었다. 3월
4일 교육이 끝났다. 저녁 늦게 고모와
함께 가좌리 집에 도착하니 집에서
난리가 났다. 3월 5일이 내 결혼식이
었거든...
▲ 1965년 발행된 재산세 영수증
결혼 이야기
부산 군대에 있을 때 아버지한테 편지가 왔다. 어디에 색시가 있으니 와서 선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장가가는 것보다 공부를 더 하겠다고 답장했다. 그랬더니 한 달 후 예물교환 다 해놨으니 결혼하라고 답장이 왔다. 얼굴도 못 본 상태였다.
8월 추석 즈음 육군본부에 심부름을 왔다가 시간이 있길래 집엘
갔더니 색시를 보고 가라며 중매장이를 붙여줘서 갔다. 기차타고 파주읍에 금촌리에 가서 거기서부터 걸어서 고양군 내유리까지 갔다.
당시는 교통편이 불편해서 고양군 송포읍에서 고양군에 있는 내유리 가기를 이렇게 파주로 거쳐서 갔다.
한참 걸어 올라갔더니 저기 저 집이라고 알려줬다. 그래서 중매장이 보고 먼저 들어가라고 하고 나는 산에 올라가서 사람들 거둥을
봤다. 거둥을 보니까 중매장이 들어가고 나서 조금 있다 여러 사람이 나오길래 산에서 내려갔다. 나를 보더니 어서 오라며 방 안으로
안내해서 들어갔다.
점심 먹고 나니까 자리를 다 비켜줬다. 그 때 색시될 사람을 처음
본 거였다. 다 정해놨으니... 저 사람이 내 사람이었다. 삶은 밤을 먹으라고 들여보내줬는데 얘기할 것도 뭐 없고, 밤을 까주길래 두꺼비
처럼 덥석덥석 집어먹다가 간다고 나왔더니 어른들이 같이 나가라고 해서 파주읍 봉일천으로 갔다. 거기서 또 자장면을 한 그릇 먹고 집으로 왔다. 그러고선 제대날짜가 아무 날짜라고 알려드렸더니 날을
그렇게 잡은 것이었다.
결혼할 적에도 엄마가 해준 바지저고리, 두루마기 입고 고무신 신고 했다. 처갓집까지 시발택시타고 갔다. 여기서 혼인식을 할 처갓집에 가면 거기에 신랑을 위한 방을 하나 잡아준다. 거기 가서 옷 갈아입고 나와 대례청 가기 전 전안 드리러 갈 때 재꾸러미를 씌우는
장난을 친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이렇게 보니까 문에서 삼태기로 재를 뒤집어씌우려고 하기에 얼른 피해서 뒤집어쓰지 않았다.
또 전안례 드릴 때 돗자리를 깔고 거기에다가 수수깡이나 콩을
깐다. 전안 드린다고 무릎 꿇고 앉으면 옆에 섰다가 돗자리에 깔아
놓은 수수깡을 잡아당기면 신랑이 콧방아를 찧게 된다. 신랑한테 장난치는 거였다. 그렇게 혼례 치르고 시발택시타고 왔다.
▲ 1962년 제대 후 다음날 전통혼례식으로 치른 결혼식
공무원 생활 이야기
농사를 짓는데 나는 그 일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당시 고모가 포목점 하면서 재봉틀 놓고 사람 사서 옷 만드는 일을 했는데 거기서
일하던 재봉사가 포천 미군부대 내에 장교들 옷수선 해주는데 취직
시켜준다고 해서 거길 갔다. 하지만 취직은 안되고 오면가면 길에서
허송세월에 고생만하고 말았다.
그 해 12월 달에 공무원시험 있다고 해서 시험봐서 공직에 들어왔다. 1963년도부터 임시직으로 공직생활이 시작됐는데 고양군 중
면의 징세원으로 처음 일을 시작했다. 정직원 임용 후보자 명단에
올랐는데 먼저 공직생활 하다가 시험본 임시직원을 정직원으로 해주고 나를 임시직으로 썼다.
▲ 고양군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당시의 모습(왼쪽이 이영극씨)
처음 한 일이 면허세 납부고지서를 쓰는 일이었다. 부대에서 경리도 보고 서무를 봤으니 일이 낯설지 않았고 글씨도 꽤 잘썼다. 이장님들이 나이 많으신 분들이었는데 사위삼자고 그랬던 일도 많았다.
일도 잘했고 무척 열심히 했다. 일요일이나 일산 장날이면 더 열심히 했다. 3·8장이 서는 일산장날이면 주민들 호주머니에 돈이 생겨서 세금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직원이면서도 남의 집에 가서 재산 차압한다고 빨간딱지 붙이고 그랬다. 젊어서 혈기가 왕성했던 시절이었다. 육곳간에 가서
장사하는 저울에 빨간 딱지 붙인다고 하니까 화가 난 주인이 저울을
팽개쳐 버렸다. 나도 화가 나서 막 뭐라 했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건방지게 보였는지 이리 오라고 창고 뒤로 불러서 치려고 그랬다. 분하고 속상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면장님이 경찰에
신고해서 입건한다고 했던 일도 있었다.
송포면은 중면보다 작았고 그 대신 진급이 빨랐다. 그래서 그리로
가려고 했더니 선배님이 당시 고양군에서 최고로 컸던 중면에 있으라고 붙잡아서 송포면으로 가지 못하고 중면에서 계속 일했다.
1964년도에 최순낙씨가 부가계장으로 오면서 나를 재무과 징세원으로 일하게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부터 직무 교육이 있었다. 송포면에 있는 집에서 걸어 나와 명성운수를 타고 고양군청으로
와서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버스를 못탔다. 그날따라 비가 왔는데,
그 비를 다 맞고 고양군청까지 뛰어왔다. 비에 다 젖어서 생쥐가 뜸
물통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하고 교육받는다며 앉아있었다.
당시 재무과장이었던 분은 의정부에서 오는 교외선을 타고 다녔는데 그 분보다 내가 더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그 분이 와서 내 모습을 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버스를 놓쳐서 뛰어왔다고 그랬다. 그랬더니 그 분이 그런 모습을 바르게 봐주셨고 덕분에 신임을
얻게 되었다.
▲ 수재민구호물품이 도착하여 한 가정에 나눠주는 모습
그때도 일요일도 없이 혼자 다니면서 일을 해서 6개월이면 체납자된 것을 다 징세했다. 어느 날인가 그때도 일요일이었는데 고양동에서 세금을 받고 내려오다가 우연히 길 가던 세무과장을 만났다.
내가 일요일에도 세금 받으러 온 줄 알게 된 세무과장님이 신임을
많이 해주셨다.
정식공무원이 되려면 시험을 봐야했는데 그때 추천을 해줘서 시험을 봤고, 1965년에 정식공무원이 되어 송포면으로 옮겨 활동했다. 새마을 운동할 때 철근과 세면(시멘트) 나눠주는 것을 담당했다.
철근을 마을마다 갯수를 세서 나눠주고, 세면 335포를 한 동네당
몇 포씩 정해서 나눠줬다. 철근도 1~2톤을 똑같이 나눠줬다.
당시는 새마을 사업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어서 마을길 넓힐 때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땅을 다 내놨다. 다리, 암거 등에 철근, 시멘트를
사용했다. 동네마다 도랑같은 곳에 철근을 이용해서 옹벽세우고 덮개 해서 길 넓히고 그랬다. 그렇게 저렇게 일하면서 1990년에 면장이 됐고 1995년에 정년퇴임했다.
이영극 선생님의 80여 년의 세월을 이렇게 짧은 글로 담아내는
것이 아쉬웠다. 주렁주렁 달린 참외가 덩쿨채로 달려나오는 것처럼,
여쭤보는 것마다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르신의 이야기에는 그 분의 삶과 고양시의 소중한 옛 모습이 소담하게 담겨있었다.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이야기 들려주신 어르신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 1965년 8월 28일 면수해복구촉진대회를 마치고 대화리 희도교에서 찍은 사진
글 이옥석 | 상명여자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주)고양신문 기자와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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