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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이춘재 연쇄살인사건

경기학광장Vol.5 _ Information & News

< 이춘재 연쇄살인사건 >


- 경기학광장Vol.5 _ Information & 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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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보러 집 나갔던 처녀가 화성의 논바닥 옆 어두컴컴한 수로 안에서 알몸 시체로 발견됐다.
1986년 10월 24일 신문 사회면의 한 구석. 꿈 많은 20대 여성 의 내일을 앗아간 비극은 고작 2줄짜리 사건기사로 세상에 알려 졌다.
하지만 당시는 그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연쇄’살인 사건의 서막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대한민국 첫 연쇄살인사건의 등장

당시 수로 안에서 발견된 20대 여성 살해사건, 그보다 앞서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한 70대 여성 사망사건이 소리없이 지나가면서 사건은 베일에 가려졌다.
수사의 진척도 없이 속수무책 시간만 흘러가던 그때, 같은 해 12월 12일에 다시 2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참깨밭에서 알몸인 상태로 희생된 이 여성도 선을 보러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버섯을 따기위해 참깨밭 부근을 지나던 중 참깨 더미 속에서 이상한 물체가 보여 다가가니, 이양이 스타킹으로 목이 졸리고 양손이 뒤로 묶인 채 발가벗겨진 상태로 반듯하게 누워 숨져있었으며 참깨가지로 온 몸이 덮여있었다”고 12월 21일자 경인일보에 적혀 있던 것이 그의 마지막 흔적이다.
지난 10월에 있었던 사건과 워낙 수법과 현장의 모습이 비슷해 경찰도, 언론도, 범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연쇄 살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던 그때, 이 사건은 단순히 젊은 여성을 노린 우발적 성범죄로만 취급됐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87년 1월 10일, 이번엔 논 볏짚더미 옆에서 고작 19살 된 여성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수원에서 친구를 만나고 혼자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던 길이었다. 이 사건 역시 양손이 뒤로 묶여 있는 등 몇개월 전에 일어난 사건들과 상당히 유사했지만 이때도 경찰은 ‘인근 불량배’를 중심으로만 수사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화성 일대 마을에는 이미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1987년 1월 15일 경인일보 사회면에는 연달아 사건이 발생한 화성 일대 마을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사회면 구석에 짧게 쓰였던 사건도 이제는 지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탑기사’ 로 등장했다.
“국도와 지서에서 불과 2㎞ 안팎밖에 안떨어진 농촌마을에 강간살인사건과 강간미수사건이 잇달아 발생, 주민들이 불안해 하는 통에 초비상에 걸려있다. 부녀자들은 날이 저물면 일체 외출을 꺼리고 있으며 마을청년들이 5~6명씩 조를 편성, 수원~오산 간 국도변의 버스정류에서 마을까지 부녀자를 바래다주고 있다.”
이미 주민들은 이것이 ‘연쇄살인’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사건이 항상 국도변에서 1~2㎞씩 떨어진 외진 곳에서 발생했다는 ‘연결고리’를 알아챘고 경찰과 언론도 연결짓지 못했던 70대 노인 살인사건이 20대 여성 살해사건들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눈치챘다.
결국 1987년 4월 23일, 25살 꽃다운 나이의 여성이 또다시 살해당한 채 발견되자, 이제 경찰도 '연쇄살인'임을 인정했다. 24일자 경인일보 사회면 머릿기사로 나온 이 사건의 첫 문장은 주민들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화성연쇄강간사건 관련 현장주변에 살던 20대 여성의 실종을 놓고 가족은 피살, 경찰은 단순가출로 각각 엇갈린 견해를 보이던 중 실종 4개월 만에 폭행, 피살된 시체로 발견됐다.”

안타까운 죽음, 공포에 질린 사람들

4월의 사건 이후 결국 경찰도 대대적인 수사력 보강에 들어갔다. 수사팀을 2개반으로 편성하고 미제로 마무리지었던 지난 사건들도 재수사하는 한편, 수사범위도 사건 발생지역에서 인접한 시군까지 확대했다.
수사가 강화된 이후 ‘범인은 독 안에 든 쥐’라고 장담하던 경찰은 방향도 잡지 못한 채 헤매기를 반복했다. 1987년 1월 26일자 경인일보 사회면에는 “심지어 최근 들어서는 범행수법, 장소, 대상 등으로 미루어 틀림없이 동일인에 의한 단독범행일 것이란 수사의 대전제도 흔들려 정남면에서 있었던 두번째 사건은 다른 범인에 의한 범행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가정을 세운 채 수사방향을 수정하는 등 근본에서부터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경찰의 수사를 지적했다.
또 “똑같은 형태의 살인사건이 3건이 발생하고 있으나 경찰이 사건현장에서 찾아낸 단서는 아무것도 없다”는 기자의 지적처럼, 당시 경찰이 초동수사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당시 수사력의 한계가 수사를 원점에서 맴돌게 한 원인 중 하나였다. 그 결과 연쇄살인은 경찰의 수고를 비웃듯 계속해서 발생했다.
수사가 지지부진한 사이 1987년 5월 9일, 다시 안타까운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4건의 연쇄살인이 발생한 뒤 수사본부까지 차려진 현장부근에 살던 30대 가정주부가 실종 7일만에 결국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 앞선 2일, 밤 11시께 희생자는 비가 오자 남편을 마중 나가기 위해 건너방에 함께 살던 이웃에게 “정미(막내딸)가 깨면 봐달라”고 부탁한 뒤 우산을 2개 갖고 나갔다고 했다. 그의 실종을 담은 1987년 5월 7일자 기사에는 "지난 2일 자정께 비가 내려 택시를 타고 집에 와보니 세딸만 자고 있었다. 3일 하루종일 친척과 친구네 집 등 아내가 갈만한 곳을 연락했으나 아내의 행적을 알수가 없자... 지난해 12월 12일 실종된 이가 4개월만에 피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상기, 경찰에 가출신고를 했다"고 안타까운 그 날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겼다.
보란듯이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자 경찰은 사건현장마다 짚으로 엮어 창호지를 씌워 사람 형태로 만든 ‘제물’을 만들었다. 그 제물의 가슴에는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는 섬뜩한 경고문구도 적었다.
잠잠하다 싶더니 1년 5개월여만에 연쇄살인의 악령이 되살아났다. 1988년 9월 8일 또다시 농수로에서 5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발가벗겨진 채 양 손이 뒤로 묶이고 목이 졸리는 등 이전과 수법과 동일했지만 희생자를 구타하고 성적으로 모욕한 흔적들이 발견돼 이전보다 훨씬 잔혹해졌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용의자를 추적할만한 중요한 단서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사건 발생 추정 시간에 낯선 20대 남성이 발안 방면 시내버스를 탔는데, 바지가 흙탕물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는 버스기사의 증언이다. 이 증언을 토대로 용의자의 몽타주가 완성됐다. 1988년 9월 22일 사회면에는 “나이 24~27세가량에 신장 1백65㎝~1백70㎝ 스포츠 머리에 코가 우뚝하고 눈매가 날카롭다고 하고 있다. 얼굴은 갸름하고 보통체격이며 구부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목격당시 왼손에 검정색손목시계를 차고 있었고 시계밑에 문신이 있었으며 우측새끼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였고 우축 둘째 손가락에 물릴듯한 상처가 있었다”며 아주 상세하게 묘사됐다.

공포는 이제 경기남부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연쇄살인과 연관이 없는 사건들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무시무시한 소문까지 덧대 공포가 극에 달했다. 1988년 10월 5일자 신문에는 “아주머니와 아가씨 2명이 폭행살해된 후 이를 목격한 남자도 칼로 찔러죽인 후 ‘1백명을 더 죽인 후 자살하겠다’는 메모를 남겼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불안해서 못살겠다고 호소했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또 “국민학생과 중학생들 사이에 ‘정신병원을 탈출한 정신병환자가 밤마다 여자를 폭행하고 목졸라 죽인다’는 등이 악성루머가 퍼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온 한 장면이기도 하다. 아마도 실제 이런 소문이 돌았을 만큼 시민들의 공포심은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1990년 11월 16일, 이번엔 여중생이 죽었다. 2년만에 발생한 연쇄살인인데, 범행은 더욱 잔인해졌다. 숨진 학생의 꿈은 ‘스튜어디스’였다. 1990년 11월 17일 기사에는 희생자의 짧았던 생이 간략하게 적혔다. “친구들은 항상 남에게 친절하고 인정이 많으며 질서를 잘 지키는 학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김모양은 ‘언니가 보고싶다. 평소에 무척 잘해주고 함께 놀아주었는데..’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또 숨지기 전 두려움에 떨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같은 동네에 사는 학교친구 서모양에 따르면 지난 13일 ‘ㅇㅇ이가 학교수업을 마치고 귀가도중 동네 앞 야산입구에 이를때 청카바를 입은 사람이 계속 20m간격으로 따라와 무서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서양은 또 ‘ㅇㅇ이가 괴한이 갑자기 달려들면 머리를 찌르겠다며 필통에 바늘을 꼭 넣어가지고 다녔다’고 밝혔다.”

화성, 억울한 오명 벗고 이춘재 살인사건으로.

1991년 4월 3일 마지막 사건을 끝으로 연쇄살인은 종적을 감췄다. 6년여의 시간동안 경찰 수사는 1천444명을 용의자로 조사했다. 그 사이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도 무수히 발생했다.
1988년 10월 22일자 경인일보 ‘화성수사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에는 용의자를 떠올리는 경찰의 수사방식이 원시적이라고 비난했다. “강간살인을 저질러 경찰에 붙잡혔던 동일전과자를 우선 한차례씩 죄다 불러보거나 사건 당일행적을 묻는다. 행적이 입증되거나 최근 생활이 건전했다면 다음 사람을 확인한다”고 꼬집었다. 초동수사를 놓쳤고 단서가 없으니 유사범죄자 위주로 용의자 지목 범위만 계속 확대한 것인데, 증거도 없이 동네주민들을 연행해 수사하면서 피해도 이어졌다. 1990년 12월 25일자에는 ‘화성 수사 또 “강압” 회오리’라는 제목으로 경찰이 허위진술을 강요하고 가혹행위를 가해 수사받던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까지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이 기사에는 “피살현장에서 2백여m 떨어진 곳에 사는 김군은 지난 11일 3번째 연행됐을 때 수사관 3명이 자신에게 피해자를 만나 야산으로 유인해 강간한뒤 살해했다는 내용의 피의자진술조서를 만들어 자신에게 날인할 것을 강요하고 거절하자 수갑을 뒤로 채우고 수건으로 눈을 가린 뒤 죽도록 마구 때리는 가혹행위를 당했다.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풀려난 ◦◦◦씨는 정신분열증세를 보여 지난 18일 하오 3시 45분쯤 태안읍 진안1리 병점역근처 철길에서 부산발 서울행 새마을8호열차에 뛰어들어 숨지기도 했다”고 당시 가혹수사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기록됐다.
여중생이 살해된 사건에서 정액이 검출됐고,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혈액형 추출에 성공하면서 혈액형 ‘B형’은 절대적인 단서가 되기도 했다. 때마침 당시 사건발생 인근 지역서 20대 여성을 성추행한 19살 윤모군을 체포한 것은 ‘혈액형 검출’을 활용하는 도화선이 됐다. 윤군의 옷에서 발견한 혈흔을 검사했더니 여중생 피해자의 혈액형인 A형이 검출됐고 윤군의 자백까지 받아 사건이 급물살을 탔다. 하지만 이 조차도 강요에 의한 허위자백 논란이 일었고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이 현장서 채취한 정액과 윤군의 혈액을 일본 수사시관에 보내 유전자감식을 의뢰했다. 그 결과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결과가 추출됐고, 사건은 다시 오리무중이 됐다.
대한민국 첫 연쇄살인사건은 ‘화성연쇄살인사건’으로 불리며 전대미문의 미제사건이 됐다.


“꼭 잡고 싶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 포스터가 말하듯 마음의 빚이 컸던 것일까.
억울한 희생이 계속되는 동안 모순되게도 한국 과학수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끈질긴 집념과 발전된 과학수사기법을 힘이 되어 결국 범인을 잡았다. 이것이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전말이다.

글 공지영

유년을 보낸 경기도에 돌아와 경인일보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등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경기도의 숨은 이면과 매력을 동시에 발굴하며 도민에게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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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5 _ 2020 여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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