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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텃골 광주안씨 고문서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광주시 텃골 광주안씨 고문서 >


-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廣州)는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와 강동구 일부를 비롯하여 경기도 동부와 남부지역까지 매우 방대한 영역을 관할한 고을이었고, 조선후기에는 타지역과 달리 정2품의 고위직 유수가 부임하는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반면 지금의 광주는 과거에 비하면 행 정구역의 변천으로 지역의 범위가 많이 축소되었지만, ‘광주’라는 유서 깊은 지명과 더불어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광주시 중대동 텃골에는 광주를 본관으로 하는 광주안씨의 선영, 종가, 재실이 유지되고 있고, 조선후기 이래 그곳에서 형성된 고문서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여기에는 조선후기 학자이자 관료였던 순암 안정복을 전후로 한 광주안씨 집안 자료와 광주부의 지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텃골 광주안씨

오늘날 성남시와 광주시를 오가는 길은 잘 닦인 도로와 터널, 철로 등의 기반시설 덕분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방면으로 다니든 예전으로 치면 고개 하나씩은 지나게 되어 있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고갯마루를 넘어야만 했던 과거의 고갯길을 곧게 놓인 도로와 산 아래를 관통한 터널 덕에 미처 고갯길인지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고 있을 뿐이다.
성남시청 쪽에서 광주시로 넘어가는 지방도를 타고 가다보면 갈현, 갈마치고개, 갈마터널이라는 표지나 지명을 마주하게 된다. 산에 칡이 많아서 칡갈(葛)자가 들어갔다고도 하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고개를 넘던 수험생들이 말의 갈증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잠시 쉬어간 곳이어서 갈마(渴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고갯길 아래를 관통하는 갈마터널을 나오자마자 중대동(中垈洞)이 나오고, 중대동의 북편 산줄기 사이 감싸 안긴 곳에 텃골이 자리하고 있다. 한자로는 기곡(基谷), 덕곡(德谷) 등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광주부 경안면 이리동약》에 적힌 “德谷터골” 표기


1849년 광주부에서 발급한 호구문서에 적힌 “曷峴垈洞(갈현대동)” 표기

지금 텃골에는 주택이 빼곡히 밀집해 있지만, 마을길을 올라가다보면 광주안씨 집안의 재실인 이택재(麗澤齋)를 마주치게 되고, 그 뒤로 조금 더 올라가면 광주안씨 집안의 선영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산길을 좀 더 따라 올라가면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평가받는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선생의 묘소가 나온다. 이렇듯 광주시 텃골에는 경기도 광주를 본관으로 삼은 안씨들이 조선후기 이래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텃골에 광주안씨 집안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순암 안정복의 아버지 안극(安極, 1696~1754)대부터이다. 이 집안은 광주안씨 감찰공파 가운데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모신 공로를 인정받아 호성공신에 오른 광양군 안황(安滉, 1549~1593)의 종계를 잇고 있다. 1980년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현지조사를 통해 이 집안에 안황의 아들 안응원(安應元, 1565~1605)대로부터 형성된 고문서 약 300여 점이 전래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광양군 안황 이하 텃골 광주안씨 주요 계보도

아버지의 정(情)을 담은 문서, 분재기

텃골 광주안씨 집안에 전래된 비교적 이른 시기의 고문서 가운데 ‘아버지(父)’ 명의로 작성된 분재기(分財記, 재산 증여나 상속문서)가 몇 점 있다. 우선 1639년(인조 17)에 아버지 안시성(安時聖, 1585~1666)이 아들 안신행(安信行, 1611~1649)에게 노비를 증여할 때 작성해 준 문서를 살펴보자. 여기에는 본래 집안이 빈한해서 오로지 자식들이 과거 공부를 통해 선조들이 쌓은 가문의 위상을 유지해주기만을 기대했는데 마침 신행, 민행, 윤행 등 아들들이 연이어 생원시에 합격하여 기쁘기 그지없다는 아버지의 소회가 적혀 있다. 특히 신행은 이미 1633년(인조 11)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바로 그때 아비의 기쁜 마음을 분재를 통해 ‘표현(表情)’하고자 했지만, 나라에 큰 상사가 생겨 그렇게 하지 못했던 미안함을 아울러 서술하였다.
1688년(숙종 14)에는 시아버지 안건행(安健行, 1625~1711)이 며느리 홍씨에게 노비를 증여하면서 문서를 작성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아들 안서우(安瑞羽, 1664~1735)와 혼인한 며느리 홍씨에게 시아버지의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에 시집가는 딸에게 친정 부모가 재산을 나누어 주거나 자신의 아들이나 손자가 혼인할 때 재산을 나누어 준 사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렇게 새로 맞은 며느리에게 시아버지가 자신의 감회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증여문서를 작성해 준 경우는 흔하지 않다. 과연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시아버지 안건행은 이 문서를 써주었을까? 내용을 살펴보면 1668년(현종 9)에 이미 부인과 사별한 안건행은 자신의 4남 1녀를 노모의 손에 의지하여 키웠는데, 이 가운데 위로 세 아들은 노모가 살아 계실 때 장가를 보냈지만 막내아들 서우와 막내딸은 노모가 돌아가신 후에야 혼인을 시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건행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손자 서우가 이렇게 훌륭한 신부(新婦)를 부인으로 맞는 것을 눈으로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는 북받치는 마음과 자신의 흡족한 마음을 문서에 자세히 적어 며느리 홍씨에게 주었다.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일부를 전해주면서 그 구체적인 이유를 적고 진심이 담긴 ‘정을 표시(情意之表)’한 증거로서 이 문서를 작성한 것이다.


1639년 안시성이 아들 신행에게 준 분재기


1688년 안건행이 며느리 홍씨에게 준 분재기

비인현감을 지낸 안서우의 해유문서

앞서 언급한 안서우는 본래 안건행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광양군 안황의 종손인 백부 안신행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였으므로 집안에서는 중의를 모아 안서우를 백부의 계후자(繼後子), 곧 종가의 종손으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광주안씨 집안의 고문서에는 안서우와 관계된 자료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안서우가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받은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홍패(紅牌)를 비롯하여 그가 경외의 여러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받은 관직임명문서들도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비인현감 자리를 이임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해유(解由) 문서가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에 지방 고을의 수령이나 병영을 관할하는 막중한 직임을 맡은 관원은 단순히 임기를 다 채웠다고 해서 다른 자리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유라는 제도가 있어서 후임자가 전임자로부터 인계받은 직무를 점검하여 그 이상 유무를 관찰사 등의 직속상관에게 보고하면, 그것을 근거로 중앙관청인 병조, 호조, 이조에서 직무별로 검토를 하여 최종적으로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내려야만 다음 관직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아래 문서가 바로 이 해유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의 일부이다. 사진으로는 각각 별도의 문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 종이 한 장에 앞면과 뒷면을 활용해 각각 별도의 문서를 기재한 것이다. 원래는 이 문서에 앞서 신임 비인현감이 전임 비인현감 안서우가 재임했을 기간의 제반 직무를 점검하여 충청도관찰사에게 보고한 문서도 있어야 하지만, 문서 전래과정에서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신임 비인현감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충청도관찰사는 아래 문서 가운데 왼쪽에 있는 문서를 기안하여 병조로 발송했고, 이를 접수한 병조에서는 병조 소관 분야를 다시 점검한 뒤 오른쪽에 있는 문서를 기안하여 호조로 발송했다. 병조에서 호조로 발송한 문서에는 “안서우가 비인현감에 재직할 때 임기 내 군대 기물 등의 물품에 아무런 손실이 없었음”이라고 간략히 기재되어 있다.
병조의 문서를 접수한 호조에서는 호조 소관 직무에 대한 검토 결과를 이조로 적어 보내고, 관원의 인사 업무를 관장한 이조에서는 최종적으로 안서우의 해유에 대한 이상 유무를 판단하여 이상이 없는 경우 이제까지 절차를 거쳐 제출된 원본문서를 하나하나 풀로 연결하여 당사자인 안서우에게 보내게 되어 있었다. 다만, 위에서 본바와 같이 현재 남아 있는 문서에는 신임 비인현감이 관찰사에게 올린 보고문서와 호조에서 이조로 보낸 문서 등이 유실된 상태이므로 아쉽게도 전체적인 흐름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해유가 진행된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의 일부가 남아있다는 것은 해유 절차가 특별한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종결되었음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승정원일기에 기재된 안서우의 인사 관련 기사나 집안에 전래된 관직임명문서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09년 충청도관찰사가 병조로 보낸 해유문서


1709년 병조에서 호조로 보낸 해유문서

순암 안정복이 편찬한 《광주부 경안면 이리동약》

순암 안정복은 선대의 묘가 있는 텃골을 근거지로 학문을 연마하였고, 조정의 부름이 있을 때면 관직에 나아갔다가 소임을 다한 뒤 다시 돌아왔다. 순암은 텃골의 서재에서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는데, 훗날 그 결과물을 모아 ≪순암집≫이 간행되었고, 현재는 한국고전종합DB를 통해 원문과 번역문까지 누구나 편리하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집안의 고문서 가운데에도 순암의 관직임명문서와 그가 주고받은 편지글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 순암이 직접 편찬한 ≪광주부경안면이리동약(廣州府慶安面二里洞約)≫이라는 필사본이 있어 주목된다. 조선후기에는 주자학이 심화되면서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참고하여 여러 학자들이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의 모델을 제안하였다. 순암도 자신이 살고 있었던 광주부 경안면의 마을을 대상으로 자치와 상부상조를 위한 규약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동(洞)을 이끌 임원조직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세부 조목에 이르기까지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해 놓아 문자만 열거한 선언적인 것이 아니라 실행을 전제로 한 실질적인 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제까지 순암이 제시한 ≪광주부 경안면 이리동약≫은 ≪순암집≫에 수록된 선생의 연보를 근거로 1756년(영조 32)에 마련된 것으로만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아래 사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집안에 전해진 이 동약의 원본에는 순암이 지은 서문이 앞에 붙어 있고, 서문의 끝에는 서문을 지은 날짜와 장소까지 적혀 있다. 이 내용을 근거로 하면, “≪광주부 경안면 이리동약≫은 1756년(영조 32)부터 순암 선생이 편찬하기 시작하여 1757년(영조 33) 중양(음력 9월 9일)에 텃골 분의당에서 최종적으로 서문을 붙여 완성했다(上之三十三年重陽書于德谷之分宜堂中)”라고 보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원본 문서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치게 된다.



순암 안정복이 편찬한 ≪광주부 경안면 이리동약≫의 서문과 동약 본문


글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고문서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대학원 고문헌관리학 전공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문서의 양식, 제도 등을 중점적으로 공부해 왔고, 최근에는 문서에 담긴 여러 정보를 토대로 사람들의 인식과 관습 변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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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5 _ 2020 여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6.30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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