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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과 건릉의 화소 및 외금양지,화성 외금양계비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융릉과 건릉의 화소 및 외금양지,화성 외금양계비 >


-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화성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를 이야기할 때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매년 정조 능행차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으며, 문화콘텐츠의 측면에서도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편이다. 또한 지역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융릉과 건릉은 수원과 화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를 보여주듯 오늘날 수원이라고 하면 너무나 당연한 듯 수원 화성을 떠올리지만, 수원 화성이 축성된 건 불과 224년 밖에 되지 않았다. 즉 수원부의 위치는 지금과 달랐는데, 최초 수원부는 바로 지금의 융릉과 건릉의 자리였다.

지금도 화산(花山)과 그 인근을 중심으로 옛 수원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수원고읍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수원고읍성의 외형 둘레가 4천 35척이며, 흙으로 쌓은 토성의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1700년에 제작된 『여지대전도』 속 수원부의 지도를 보면 남산(南山)의 북쪽과 성황산(成皇山)의 서쪽에 수원부의 읍치가 자리하고 있으며, 읍치 뒤로 화산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 1872년에 제작된 『수원부지도』를 보면수원 화성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수원부의 위치가 변화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수원부가 옮겨지게 된 계기는 바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 추존 장조)의 영우원(永祐園)1이 화산으로 천봉되었기 때문이다.

수원고읍성, 옛 수원부의 외곽에 있던 성으로, 현재 일부 구간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수원 화성. 사도세자의 영우원이 천봉되면서, 기존에 있던 수원부가 옮겨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축성된 것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융릉과 건릉의 화소 및 외금양지의 설정과 변화

그런데 현 융릉과 건릉의 규모는 과거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선 능원을 조성할 때는 가운데 능역을 두고, 일정 거리의 바깥쪽으로 불이 안쪽으로 번져오는 것을 막기 위한 화소(火巢)를 설치하게 된다. 화소 구간이 설정된 곳은 불에 탈 수 있는 잡풀이나 수목 등을 제거했는데, 멀리서 보면 해자의 형태와 유사하게 보이며, 자연스럽게 능원의 경계를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화소(火巢)의 바깥으로는 외금양지를 설정했는데,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린벨트와 유사한 성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수원부지령등록』을 보면 현륭원의 화소 구간에 대해 ▶안녕면(安寧面) 독지촌(禿旨村) 뒤의 끝에서, 남쪽으로 세람평(細藍坪)을 경유, 석곶이[石串] 모퉁이를 지나 남산(南山) 끝(=3,296보) ▶성황산(城隍山) 뒤 끝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내려가, 초봉(草峰)을 따라 앞으로, 고서문(古西門) 전석현(=2,641보)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이러한 화소 구간의 안쪽은 현륭원의 원역에 해당하며, 화소의 바깥쪽은 외금양지(外禁養地)를 두는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화성 융릉,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능으로, 최초 수은묘로 불리다가 정조가 즉위한 뒤 영우원, 현륭원을 거쳐 고종 때 융릉의 능호를 받게 된다.

『일성록(日省錄 )』2을 보면 ▶홍범산(洪範山) ▶태봉산(泰峰山) ▶독산산성(禿山山城) 등이 외금양지로 설정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또한 『건릉지』의 능원침내금양전도(陵園寢內禁養全圖)를 통해 ▶양산 서봉 ▶노적봉 ▶하남산 ▶상남산 ▶봉조봉 등도 외금양지에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현륭원에 이어 정조의 건릉이 추가로 조성되면서, 현륭원 때에 비해 화소 구간이 확대되었다. 크게 기존 외금양지에 포함된 ▶홍범산 ▶하남산 ▶상남산 ▶봉조봉 등이 화소 구간으로 편입되었으며, 보통리와 황구지천의 바깥쪽에 있는 ▶태봉산 ▶양산 서봉 ▶독성산성 ▶노적봉 등은 외금양지로 남게 된다. 또한 화소 구간이 확대된 뒤 4곳에 화소 표석을 세웠는데, 『건릉지』에는 ▲세람교(細藍橋)4 ▲홍범산 들머리 ▲하남산5 ▲배양치 등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화소 표석의 실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수원고읍성의 서문지로 추정되는 고서문 터


독산성에서 바라본 안녕동 일원, 눈에 보이는 일대의 대부분이 화소 및 외금양지에 포함이 되었다.

한편 외금양지로 설정된 곳은 주로 수목을 금양(禁養)6 하는데 중점을 두게 된다. 『일성록』을 보면 정조가 조심태(1740~1799)에게 홍범산처럼 태봉산이 울창해지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지 물어보는데, 이에 조심태는 2~3년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태봉산 일대가 황폐해져 있었고, 외금양지가 설정된 이유 역시 나무를 심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의 목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홍범산의 경우 외금양지에 속했지만, 산 아래 인가가 많아 수목의 금양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조심태의 보고도 있었다.

안녕리 표석, 정조의 원행길에 세워진 표석으로, 안녕삼거리에 세워져 있다. 안녕리 표석이 세워진 곳은 과거 독지동으로 불렸다.

홍법산의 효암바위, 홍법산은 기록 속 홍범산으로 현륭원 때는 외금양지에 속했으나, 건릉이 조성된 뒤 화소 구간으로 편입되었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에 있는 순종 태실의 화소 표석, 건릉의 화소 구간 확대 시 세운 화소 표석 역시 이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외금양계비의 조성과 의미

외금양계비(外禁養界碑)는 화성시 정남면과 봉담읍의 경계에 있는 태봉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화강암 재질로 전면에 외금양계(外禁養界)라 새겨져 있다. 이러한 외금양계비의 조성 과정은 『일성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1798년 2월 19일에 조심태는 정조에게 현륭원 영(顯隆園令)인 서직수(徐直修)의 말을 전한다. 서직수는 태봉산 아래에 사는 신광린(申光隣)이 올린 정소(呈訴)9를 전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원소 밖에서 금양한 뒤로는 산 주변에 사는 백성들이 비록 무덤이 있더라도 감히 봉금(封禁)한 곳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봉금하는 데에 또한 온 힘을 쏟지 않으니 촌백성들이 갖가지로 외람되이 범하므로 숲이 울창하게 우거질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상(上)·중(中)·하(下)의 민호(民戶)가 계(契)를 만들어 계중(契中)에서 엄히 과조(科條)를 세워 금단(禁斷)하고,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가 중할 경우에는 관(官)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고 가벼울 경우에는 계를 따라 벌을 시행하여 실효를 거둘 수 있게 하소서”

조심태는 이러한 신광린의 정소에 대해 일리가 있다고 보고, 우선은 그대로 시행은 하되, 원소 밖의 금양을 동계(洞契)에만 맡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조심태는 정조에게 다음과 같이 상소하게 된다.

“속히 본부(本府)로 하여금 산허리 아래에 금표와 표석을 새겨서 세우게 하고, 또 현륭원 영으로 하여금 지금 나무를 심는 때에 금석(禁石) 사이에 소나무와 잡목(雜木)을 줄지어 심어 여러 겹으로 둘러싸서 경계를 표지(標識)할 수 있도록 한다면 대소(大小)의 촌민이 아마도 징계를 받을까 두려워할 바를 알 것이니 감히 멋대로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정조는 조심태의 의견을 받아들여 표석을 세울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태봉산에 외금양계비가 세워질 수 있었다. 외금양계비는 크게 두 가지의 관점에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데, 우선 외금양지의 경계를 표시한 표석이라는 측면과 외금양지 내에서는 나무의 벌채를 금지하고, 분묘의 조성 및 농경지 조성, 가축을 기르는 행위는 금지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외금양계비는 지난 2006년 발간된 『문화유적분포지도: 화성시』에서도 희귀한 금석문으로 평가한 바 있다. 또한 『일성록』의 기록을 통해 외금양계비에 대한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는 점, 융릉과 건릉의 화소 및 외금양지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문화재라는 측면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외금양계비는 비지정 문화재로, 사실상 관리의 부재 속에 방치된 상태에 놓인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하루 빨리 외금양계비에 대한 문화재 지정 및 실질적인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심이 요구된다.



글 김희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문화교양학과를 전공했다. 현재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의 소장으로 활동,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와 문화재 속에 담긴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쉽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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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5 _ 2020 여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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