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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조(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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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회원’이란 소정의 가입 승인 절차를 거쳐 지지씨 글쓰기 계정(ID)을 부여받고, 지지씨에 자료 등록 권한을 부여받은 경기도 소재 문화예술기관 및 유관기관을 의미합니다.
‘생산자료(=콘텐츠)’란 ‘회원’이 지지씨 플랫폼 상에 게재한 부호, 문자, 음성, 음향, 그림, 사진, 동영상, 링크 등으로 구성된 각종 콘텐츠 자체 또는 파일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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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본 가이드는 경기문화재단의 온라인 플랫폼 운영 정책 및 저작권 등 관련 법규에 따라 개정될 수 있으며, 가이드를 개정, 적용하고자 할 때는 30일 이전에 약관 개정 내용, 사유 등을 '회원'에 전자우편으로 발송, 공지합니다. 단, 법령의 개정 등으로 긴급하게 가이드를 변경할 경우, 효력 발생일 직전에 동일한 방법으로 알려 드립니다.
1. 본 가이드의 개정과 관련하여 이의가 있는 ‘회원’은 탈퇴할 수 있습니다.
2. 경기문화재단의 고지가 있고 난 뒤 효력 발생일까지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을 경우, 개정된 가이드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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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분류 | 외부기관 | 경기문화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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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
[모종의발견] ⑮ 지금, 여기를 사는 법 - '없이있는마을'의 생똥과 이제
2025 실학박물관 지역활동가 아카이브
때로는 어이없게 순진하고 단순하지만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진지하고 철학적인 이들이 있다. 놀랍게도 어느 쪽이든 언제나 깊이 골몰하고 있는 모습은 인간이 타고난 ‘적자(赤子)의 마음’ 빨간 어린아이인 듯 본연 그 자체이다. 이들은 지금/여기에 꿈꾸는 너머의 세상을 신나게 노래 부르며 순간순간 당겨와 현실로 만들어낸다. 성공에 해맑게 기뻐하고 실패에도 좌절 없이 새로운 것은 배우는 이를 보고 싶다면 이상하면서도 재미있고 엄숙하면서도 신나는 마을, 없으면서도 있는 마을, 있으면서도 없는 마을의 ‘생똥’과 ‘이제’를 만나보라.

Q. 이름이 특별하고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지으신 것인가요?
생똥 : 제가 29살에 귀농학교에 갔었습니다. 그랬더니 제 본명 말고 새 이름을 직접 지어오래요. 뭐라고 지어야 하나 한동안 고민했었습니다. 그런데 귀농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새로 알게 된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똥의 순환’이에요.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똥을 누면 그것이 물과 같이 흘러서 처리장으로 가고 그대로는 오염을 유발하니까 정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같은 똥이 흙으로 가면 생명을 살리는 거름이 된다.’
그렇게 중요한 똥이 입에 담기에도 불편한 단어로 쓰이기에 그 괴리를 줄여보려고 이름을 ‘똥’이라고 짓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학교에서 그건 우리도 어렵다고 앞에 다른 글자를 하나 더 붙이는 게 좋겠다고 같이 고민해 주셨어요. 그러다가 날 생(生)자를 붙여서 ‘생똥’이 어떠냐고 ‘생똥’이라 부르게 되었어요.
이름을 짓는 것이 오묘한 것이 계속 이런저런 뜻을 생각하게 되잖아요. 저는 ‘생똥’이란 이름이 좋았어요. ‘막 싼 똥’이라는 뜻이 당시 제 자아상 같았거든요. 서울에서 별 볼 일 없이 쫓겨난 것처럼 느껴졌고 친구들이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는데 도울 처지도 안 되었고 마치 서울이 지금 막 싸놓은 똥 같았어요. 지금 막 싼 똥이라 서울 냄새도 좀 나고 아직 잘 죽는 법도 모르고요. 하지만 흙을 만나면 생명을 살릴 수 있다잖아요. 생명을 살리다니 거대하잖아요. 좋은 땅을 찾아가서 잘 죽자. 잘 죽어서 다른 생명 살리는 거름으로 살아가자. 그런 다짐, 그런 마음가짐으로 ‘생똥’이라고 지었어요.
이제 : 저는 ‘이제’라는 이름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1, 2년 남짓 쓰고 있습니다. ‘이제야 내가 깨달았다!’ 이런 느낌이에요. ‘여기에 진리가 있었구나! 이제야 알았어.’ 하는 순간이요.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캘 채(採) 참 진(眞), 진리를 캐다, 찾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인지 평생 진리를 찾아다니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한참 찾아 헤매던 진리가 사실은 언제나 지금 여기 있었구나. 이제야 알았구나.’ 깨달았어요. 그 순간을 기억하려고 지은 이름이에요.

Q. 어떻게 남양주에 오시게 되셨어요?
생똥 : 그건 귀농학교에서 이어져요. 제가 다닌 귀농학교가 거창에 있었어요. 1년 과정 끝나고 거기 정착하는 것까지 계획했었지만 잘 되지는 않았어요. 그건 그 시기 제 상황하고 연관이 있어요.
29살 때였어요. 제가 서울 강동구 촌놈이에요. 강동구에는 ‘강동구 촌놈’이라는 말이 있어요. 진짜 강동구밖에 모르고 사는 사람을 의미하죠.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두 사람이 있었어요. 순박한 두 강동 청년에게 이 사회의 냉철한 칼바람이 불자 그대로 넘어져 버렸어요. 희망을 잃어가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미래의 저를 보았습니다. 나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통장에는 딱 100만원이 있을 뿐이었어요. 능력은 없다고 해도 다 착한 친구이고 밝은 친구인데, 이런 청년들이 살 수 있는 세상을 간절히 바랐어요. 저는 종교가 있으니까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 와중에 소개받은 찌라시(!)가 귀농학교였던 거예요. 저로서는 강동구 촌세상에는 없는 새로운 제안을 딱 받은 거였어요. 일주일 동안 고민해서 전재산 100만원 중에 귀농학교 1년 과정 89만원을 일시불로 납부했어요. 그리고 귀농학교에 갔는데, 정착은 못하고 돌아왔죠.
그렇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첫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경제적인 자립 조건이 부족하다는 거였어요. 물론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 관계가 내가 평생 어우러질 수 있는 관계인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어요. 잘 그려지지 않았어요. 어쨌든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패했지만 꿈을 가지고 돌아온 거죠. 서울에서 일하면서 돈을 모으고 지금 마을에 같이 살고 있는 친구들과 공부 모임을 계속했어요. 처음에는 두 달에 한 번 만나다가 나중에 조금 진지하게 만나기 시작하면서 한 달에 한 번 만나고 모임을 좁혀가며 공부했어요.
그러다가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말로 공부만 할 거냐. 뭔가 시도해 보자. 그래서 우리가 정착할 곳을 찾아보자고 전국으로 탐방을 다녔어요. 처음 유력한 후보지가 괴산이었어요. 당시 혼인하지 않은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몸 가벼운 내가 선발대 역할을 해보겠다고 괴산으로 가서 2년 살았어요. 그런데 그즈음에 모임 친구들의 분위기가 좀 바뀐 거예요. 우리에게 첫째로 중요한 것이 장소가 아닌 것 같다. 평생 개인으로 살았는데 모여 사는 것이 가능할까? 우선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자. 우선 직장을 다니면서 가까이 모여 살 수 있는지 알아보자. 그리고 괴산으로 내려오지는 않겠다고 했죠.
괴산에서는 잘 지냈어요. 거기 할머니들하고 엄청 친해졌고 엄청 잘해주셨었어요. 큰 영농조합에서 실무자로 일하면서 농부님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70대까지 형님이라고 하면서 잘 지냈죠. 제가 떠난다니까 많이 속상해하셨고 아쉬워하셨어요. 하지만 그곳이 제가 공부하고 꿈꿔왔던 모습에 부합하지는 않았어요. 그쪽 분들은 무너져가는 농촌에서 ‘유기농’ 농부들이 자리를 잡고 일단 과도기적 설정을 하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 과도기에 동참을 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은 그 다음 작업으로 느끼거든요. 과도기와 과도기 이후의 삶 중에서 저는 후자를 더 살고 싶어서 선택한 거죠.
친구들은 여기 팔당에 모여 살기 시작했고 우리는 잘 선택했다는 분위기예요. 같이 살아도 되겠다 싶어요. 물론 시행착오도 많아요. 서로 싸우고 갈등을 해소해가고 각자 하고 싶은 걸 참아내는 과정도 경험하면서 다양하게 겪어보는 중입니다.

이제 : 스물아홉에 저는 이미 공동체로 살고 있었어요. 서울에 있는 ‘밝은누리’라는 공동체에 있으면서 즐겁게 지냈지요. 하지만 한 발은 넣고 한 발은 빼고 있는 마음 태세였어요. 언제든 수틀리면 도망친다는 마음으로요. 그런 상태로 내면에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를 직시해야만 하는 때가 왔고 그때는 막 죽을 것 같았어요. 그즈음에 공동체 친구들하고 막 순례를 다니는 중이었어요. 천일순례를 다니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해원을 하자고 했었어요. 전쟁, 침략과 폭력에 노출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해원의 기도를 다니는데, 나 자신도 너무너무 해원이 필요했던 거예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히말라야를 올랐어요. 홀로 기도수행을 하겠다고 갔는데 온갖 분노, 억울함, 아픔,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쏟아졌어요. 트래킹 끝날 때쯤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져서 산기슭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노천탕에서 목욕을 했어요. 왜 사냐, 살 이유가 있냐? 이러면서 거기서도 혼자 다투는데, 어느 순간 강렬하게 스치는 생각이 ‘집착을 버려라.’였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다 이해는 안 가도 그것 하나 잡고 내려왔어요. 그리고 다르게 살기로 결정했어요.
지금까지 이뤄왔다고 생각했던 것들, 얻고 싶었던 것이든 얻어왔던 것이든 그 모든 것들에 굿바이 선언을 하고 내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느껴왔던 것들, 그 안에서 고정되어 있던 집착들을 다 벗어보겠다는 마음이었어요. 당시에 밝은누리 친구들이 홍천에서 마음수행하고 집 지으면서 살고 있어서 나도 거기로 터를 옮겼어요.
그때 여기 ‘없이있는마을’ 친구들이 밝은누리에서 주최하는 공동체 지도력 훈련을 받고 있었어요. 나도 같이 듣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의 기운이 무척 밝은 거예요. 나는 그냥 선배들 따라서 밝은누리에 와서 숟가락 얹고 살았는데 ‘없이있는마을’ 사람들은 좌충우돌 막 자기네 힘으로 개척하고 그런 게 아주 신기했어요. 그들의 기운이 홍천에 가서도 계속 생각이 나더라구요. 없이있는마을과 생똥에게 반한 거예요. 아마 생똥 홀로였으면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생똥을 만나고 또 없이있는마을 친구들을 만나면서 새롭게 개척해가는 품을 함께 들이고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죠.
그렇게 이곳에 와서 결혼하고 5년이 되었어요. 늘 행복하고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에요.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고집을 잘 안 꺾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뭔가 여기에 더 있겠지 싶었던 기대가 무너지는 것도 겪었어요. 3~4년차에는 마음이 아프니까 몸까지 아프고 막 그랬어요. 생똥이랑 점점 냉담해지고 서로 엄청 미워하기도 했고 아픈데 스스로 돌보지 못한 상황도 있었고요. 모든 걸 받아먹던 시절을 지나서 내가 개척해야 하고 같이 만들어가야 하는 어려움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온 거죠. 작년 이후로 좀 달라진 것이 바로 이런 것 같아요. 뭐든 올 수 있고, 뭐가 왔을 때, 그 순간을 살면 된다. ‘이제’라는 깨달음이 온 것이 바로 그즈음인 거죠. 지금도 좌충우돌인 것은 같아요.
Q. 먼 길을 돌아오신 느낌인데, ‘없이있는마을’에 대해서도 설명을 조금 해주세요.

‘없이있는마을’은 기독교 공동체예요. 종교 기반 공동체이지만 종교를 빼고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종교라는 틀에 갇히면 폐해가 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없이있는마을’이라는 이름은 있음은 좋고 없음은 나쁘다고 배워 온 사고방식을 바꾸고 싶은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에요. 시골에서는 죽음이 삶을 이끌기도 하고 그것이 전복되고 순환하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실제로 살아가는 삶에는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공존하는구나, 있음만 추구하거나 없음만 추구하면 안 되는구나, 두 가지가 고루 있는 것이구나. 알게 되었죠. 그런 면에서 ‘없이 있다’는 말은 동시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을 계속 기억하고 일깨우기 위한 이름이에요.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없이있는마을’에는 어떤 틀을 계속 깨는 작업이 있어요. 예를 들면 우리는 거의 도시에서 나고 자라 도시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거를 깨려는 노력을 많이 해요. 우리가 배운 사고방식으로는 좋은 것이 없으면 안 좋은 거니까 좋은 걸 창조해야 좋은 거잖아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좋은 거잖아요.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있음인데, 그렇다고 있음만 포착하게 되면 함께 공존하고 있는 없음을 놓치게 되지요. 두 가지를 늘 동시에 고려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 수련을 많이 해요. 기도하고 명상하고 비우는 훈련으로 있음을 향유하고 감사하고,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불안해하지 않으려면 마음을 알아차리고 보내는 훈련이 필요하죠. 책 공부의 목표도 비슷합니다. 없이있는마을은 이런 뜻을 가지고 이 지역 언저리에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걸어서 10분 거리, 아이들이 마실 나갈 수 있는 거리에 같이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집이 잘 안 구해져서 강 건너 양수리에 떨어져 살고 있는 집도 하나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오가는 다른 지역 분도 한 분 있고요. 비혼공동체 세 곳 포함해서 아홉 가정이 있고 아이들까지 29명이에요. 해마다 오가는 인원들이 있어 규모는 계속 바뀌어요.
Q.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하는 일이 많을 것 같은데요.

생똥 : 농사를 짓고는 있는데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농부님들께 민망해서요. 처음부터 농사를 짓겠다는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시골 살면 당연히 농사를 지으면서 살 것이라고 느끼기는 했지만요. 귀농학교에서도 농사를 막 열심히 지어야겠다기보다는 새로운 터전에서 청년들하고 같이 가슴 펴고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그 구체적인 방법이 농사였던 거죠. 괴산에서도 공교롭게도 일하게 된 곳이 귀농인들이 모여서 함께 일하는 영농조합이라 자연스럽게 농사 쪽으로 계속 연결되었던 거고요.
처음 마을살이 시작할 때는 무작정 없이있는마을 사람들을 다 먹여살릴 기세로 농사를 열심히 지었어요. 형님들의 도움이나 가이드 없이 혼자 농사를 지어보고 싶어서 주변 어르신들한테 땅 빌려가지고 막 이래저래 이상한 농사를 많이 지었죠. 많을 때는 논밭 합쳐서 2,000평도 넘었으니까요.
그런데 풀을 감당하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감당을 해내서 수확을 해도 문제였어요. 수확만 한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갈무리하고 저장하고 식탁까지 가는 것이 정말 일이었어요. 옥수수 같은 건 쪄서 나눠 먹으면 끝나지만 저장하는 곡식들이나 여러 가지에 손이 많이 필요한데 그건 정말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잘 안 챙겨 먹고 묵히고 묵히다가 두더지한테 다 먹힌 해도 있었어요. 밀 농사를 크게 지었었는데 마을 사람들하고 울력을 하고 싶어도 다들 스케줄이 바쁘니까 틈이 안 보여서 혼자 하거나 두세 명 불러서 일하다가 결국에는 시기를 놓쳐서 묵혔더니 두더지가 다 먹었어요. 걸어 다니면 푹푹 빠질 정도로 두더지 구멍이 났더라니까요. 농사만 짓는다고 되는 게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전 과정을 일궈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는 농사짓자고 사람들을 부르는 게 아니라 ‘농생활’을 하자고 불러요. 이 과정을 공부하고 일구고 초대해야겠다고 설정을 바꾼 거죠.
혼인 전에는 밭에서 시간을 다 보내다시피 했지만, 혼인 후에는 아이가 생기고 이제의 아토피가 가라앉지를 않아서 밭에 갈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고민한 끝에 그렇게 전환하게 된 거죠. 대신에 경제활동으로 송촌초등학교에서 오전 반나절 시설관리로 온갖 잡일을 하고 있어요.
그래도 농사에서 시작해서 밥상까지 이어지게 하는 공부모임 겸 동아리 활동이랄까요? ‘너른품밥상연구소’ 친구들을 계속 만나고 있어요. 이름은 ‘연구소’지만 연구를 안 해서 외부에 나가면 말을 조심해요. (웃음) 공동 밥상에 인원이 계속 늘고 있어서 기회는 많이 있으니까, 농생활한 걸로 밥상 차리는 것까지 이어가는 공부를 하자고 제안해서 저 포함 4명이 밥상을 차리고 있어요.
서로 어떤 활동들을 하는지 잘 아니까 ‘오래오래 뜀박질’ 때도 제안을 받아서 손님들 밥상을 차리기도 하고, 나름대로는 마을 안에 아토피 겪는 사람들, 밀가루 소화 못하는 친구도 있고 자기 의지로 육식을 안 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수 있는 밥상의 형태를 연구하기도 해요. 가공식품을 안 쓰고 카레를 만들어 봤는데 맛없다고 난리예요. 가능하면 우리 땅에서 나는 재료들로 카레를 만든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그 경계를 찾는 연구이기도 해요. 후추도 자극적인 식재료라 아토피 등에는 좋지 않아서 원하는 사람은 쓸 수 있지만 공용 공간에 기본 식재료로 채워놓지는 않아요. 어쨌든 ‘농생활’에 충실하자는 거여서 가능하면 우리가 일궈서 먹을 수 있는 것들로 채우자는 마음이 있어요. 나중에 언젠가는 다른 지역이나 나라와 식재료를 교환하는 식으로, 농생활이 다른 나라와 연대할 때는 달라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 저는 아침에는 미취학 아동들을 보육하는 ‘둥굴레 놀이터’로 아이를 데리고 가요. ‘둥굴레 놀이터’는 부모들이 함께하는 공동육아 공간이에요. 아이들의 고유성을 같이 바라봐주고 존중해주고 같이 양육하고 키워내고 함께 논다는 데 방점이 있어요. 지금은 아이 5명이 있고 경기도에서 보육품앗이 공동체 지원을 받고 있어요. 저는 거기에서 어린이들 밥상 이모 역할이에요. 밥을 정말 못하지만 새로운 차원의 도전인데, 정말 착하고 예쁜 아이들이 맛있다고 해줘요.
그밖에 마을에서 ‘온살림’이라는 몸, 마음 양생하는 운동을 하고 있어요. 몸을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동아리 활동이에요. 제가 아이를 갖고 나서 아토피가 전신에 올라오고 무척 심해졌어요. 도저히 치료가 안 될 정도여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함께 우리 안의 ‘앓이’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몸을 살려가자, 근데 그게 마음과 전혀 상관없지 않으니 마음도 같이 수련하자는 거예요. 1년에 한 번은 ‘몸 비워 마음 깨우기’라고 해서 단식하고 생채식하는 실천을 한 달 동안 해요. 하반기에는 ‘오래오래 뜀박질’이라고 몸 살리는 차원의 뜀뛰기를 하고요. 중간중간 같이 몸에 대해 공부하고 오는 겨울에는 먹거리 공부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우리가 늙었을 때 우리 스스로를 돌볼 수 있으려면 지금부터 꾸준히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서로 격려하고 있어요.

Q. 지역에 장단점이랄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제 : 장점이라면 깨끗한 자연이요. 개울에 가재가 살아요. 돌을 딱 들면 가재가 막 나와요. 그래서 우리 밭이름이 ‘가재밭’이에요. 수종사 종소리도 들리고요. 여기 앞에 생협이 있는 것도 좋아요. 우리는 거의 생협만 쓰는데 여기가 본점이니까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것도 좋아요.
생똥 : 양수리 인프라가 좀 부럽기도 해요. 양평군민은 혜택이 있잖아요. 에코힐링센터(체육센터)의 수영장 입장료가 인상되었는데 양평군민과 타지역 주민이 많이 달라요. 체육공원, 운동장 이런 것들이 공짜인 것은 부럽죠.
이제 : 남양주는 그런 것이 없어요. 양평은 인구소멸지역이어서 지원이 더 많다는 것 같아요.
생똥 : 우리가 이 동네에서 혼인을 했거든요. 마을 분들 중에 유일하게 우리 신혼집 주인 아저씨가 화환을 보내주셨어요.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사양을 했는데도 끝내는 보내주셨어요. 처음에 맺은 관계들이 감사하게도 우리를 좋게 봐주셔서 집을 구할 수 있었어요. 코로나 때 와서 처음에는 많이 뵙지 못했지만 엄청 잘 모이고 뭉치던 마을이었대요.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고는 하시는데 좋은 인연이고 인정 많은 마을이에요.
이제 : 단점도 분명하죠. 일단 집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요. 청년들이 이주를 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은 고맙게 살고 있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면 좋겠어요. 지역에 무엇을 바란다면 안정적인 주거겠지요. 이 지역에서는 길게 보기 어려우니까 다른 지역 개척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디일지는 모르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거예요. 북한이 개방되면 그쪽으로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디 바닷가 마을에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생똥 : 우리가 ‘없이있는마을’을 일구고 있지만 다른 특수한 마을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어요. 우리 세대를 낀 세대라고 생각하는데, 풍요도 경험하고 빈곤도 동시에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우리 세대가 이상한 일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Q. 실학박물관을 아시나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생똥 : 지역에 실학박물관이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에요. 다만 어린이체험 같은 것이 좀더 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하고 서너 번 가니까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서 아쉬웠어요.
이제 : 실학박물관에서는 뮤지엄숍에서 일하고 있어요. 또 작년부터 실학박물관과 함께 지역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이야기를 모으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올해는 기획작업에도 참여하면서 모종의 작당이라는 프로그램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주민의 입장으로서는 주말에는 좀 더 다양한 것 같지만 우리는 주말에 나갈 일이 없어서요. 주중에 프로그램이 좀 더 다양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할머니들하고 뭔가 같이 할 것이 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들이 너무 귀여우시고 진짜 열심히 일하세요. 아침에 밭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시고 하루 죙일 뭘 가꾸시는데 그런 할머니들하고 접점이 없어서 아쉬워요. 할머니들이랑 노는 축제 같은 것이 있으면 재미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실·실·실 프로젝트>가 내년에도 있으면 좋겠어요. 지원사업도 많으면 좋겠고요.
이들이 지금/여기에서 바라는 것은 친구들, 어린이들, 할머니들과 같이 먹고 노동하고 노는 것이다. 이 소박하고 귀여운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철없이 히히 웃으며 함께 희망한다.
2025 실학박물관 지역활동가 아카이브 <모종의 발견>
조선 후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고민하던 학자들을 실학자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활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종의 발견>은 지역 곳곳에서 싹트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찾아 숨겨진 가능성과 가치를 세상에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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