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경기’의 또 다른 이름, ‘기전’(畿甸)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경기’의 또 다른 이름, ‘기전’(畿甸) >


- 경기학광장Vol.5 _ Research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들어가며: 이름 짓기와 지명의 질서


노(魯)나라 환공(桓公)이 대부(大夫) 신수에게 이름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이름을 명명하는 방법에는 5가지가 있으니, 즉 ‘信[신, 믿음]’, ‘義[의, 뜻함]’, ‘象[상, 본뜸]’, ‘假[가, 빌림]’, 그리고 ‘類[류, 비슷함]’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의 특징을 이용해 이름 짓는 것이 ‘믿음’이 되고, 덕행을 나타내는 글자를 사용해 명명하는 것이 ‘뜻함’이 되고, 비슷한 물체의 이름을 사용해 이름 짓는 것이 ‘본뜸’이 되고, 사물의 이름을 빌려 취하는 것이 ‘빌림’이 되고, 부모와 관련 있는 글자를 사용하여 명명하는 것이 ‘비슷함’이 됩니다.” [公이 問名於申繻한대, 對曰, 名有五하니, 有信·有義·有象·有假·有類라. 以名生이 爲信이오, 以德命이 爲義요, 以類命이 爲象이오, 取於物이 爲假요, 取於父는 爲類라.](『春秋左氏傳』 정태현 역주, 2001, 301-302)


지명(地名, geographical name, toponym, place name)은 인간이 거주하거나 활동을 희망하는 모든 지리적 실체(geographical features)들에 붙여진 음성과 문자 언어 형태의 고유한 이름을 뜻한다. 땅의 이름이든 사람의 이름, 혹은 사물의 이름들을 명명(命名)하는 인간의 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깊은 논의가 있어 왔다. 위에서 제시한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대부 신수의 인명(人名) 명명법은 동방 문명이 만들어낸 최초이자 최고의 이름 짓기(naming)에 관한 하나의 분류법(taxonomy)이다.

서방의 경우, 동방의 명명법을 넘어선 이름이 함축한 기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곧 지명을 포함한 이름들은 하나의 기호(sign)처럼 작용하면서 크게 두 가지 기능을 실행하고 있다고 한다. 즉 겉으로 ‘지시되는(denoted)’ 1차적인 실용적 기능(utilitarian functions)과 ‘암시되는(connoted)’ 2차적인 상징적 기능(symbolic functions)이 있으며, 이 둘 사이의 상호 작용도 존재한다. 전자의 실용적 기능은 공간적 방향 설정과 관련되어 서로 다른 ‘위치’와 ‘영역’을 가리키고 구별하는 실용적인 지시 기능을 의미하며, 후자인 상징적 기능은 기호의 상징적 메시지와 관련되는 문화적 가치, 사회적 규범,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정체성을 구성한다(김순배, 2012, 41).


이름을 짓는 5가지 방식과 이름이 수행하는 2가지 기능은 인간의 지리적 인식과 이해, 지리적 실체에 대한 공감과 의미 부여,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이름을 둘러싼 수행과 실천에 서로 교차하면서 세상을 직조(織造)해 내고 있다. 이름이라는 씨줄[緯]과 날줄[經]로 만들어진 이 유명(有名)의 세계는 곧 새장 속 날짐승과 같이 언어의 구조에 갇힌 인간을 특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상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사물의 질서, 그 자체이다.

이름에 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본 글은 ‘기전(畿甸)’이라는 땅이름이 품고 있는 신·의·상·가·류(信·義·象·假·類)의 방식과 그것이 지닌 구별 및 상징 기능을 살펴보았다. 즉 고대 중국 문명의 질서를 체화하고 있는 ‘기전’ 명칭의 유래와 의미를 먼저 문헌 중심으로 분석하였고, 이 이름이 한국, 특히 경기도의 언중들에게 수용되어 정착되면서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인 지명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형상과 영역을 만들어 간 역사와 변천, 그리고 그 지명 속에 담고자 했던 경기 사람들(京畿人)의 믿음[信]과 뜻[義]을 영역 정체성(territorial identity)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고대 중국의 봉건제와 당나라의 경기제(京畿制)에 영향을 받은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왕기(王畿)’, ‘기내(畿內)’ 등과 함께 ‘경기’ 구역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던 ‘기전’이란 지명은 봉건제 및 군현제의 소멸을 불러온 19세기 후반의 근대화에 밀려 현재는 하나의 고지명(古地名)처럼 화석화되어 지명의 사용이 크게 제한되었다(김용국 외, 2010). 한국의 경우, ‘기전’이란 지명은 현재 ‘기전문화연구소’, ‘기전향토문화연구회’ 등과 같이 학술 및 향토문화 단체 등의 제한된 지명 언중들에 의해서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서울의 부속물이라는 종속성을 극복하는 경기 자체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서울 京’을 의도적으로 제외한 명칭인 ‘기전’, 특히 ‘기전 문화’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전’ 지명을 지명학의 방법론으로 분석한 단독 연구를 찾기 힘든 실정이다. 대체로 역사학과 언어학(국어학·한문학), 그리고 역사지리학에서 중국의 오복(五服) 제도의 하나인 전복(甸服)을 언급하거나(장지연, 2015), 경기(京畿) 지명의 별칭으로서 ‘기전’을 설명하면서 부수적이고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수준이다. 다만 고려시대 이래 조선 전기까지 ‘경기’ 지명의 의미와 영역 변화를 분석한 심승구(2015)의 연구는 1차 사료에 등장하는 경기 지명들을 전체사의 맥락에서 제시하면서 지명에 담긴 정치사적, 사상사적 의미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기전 지명의 의미와 영역 변화를 분석하기 위해, 본고는 위에서 언급한 역사학계의 ‘경기’ 연구물을 주로 참고하였고, 대체로 현지 조사보다는 실내 문헌 조사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경기’ 구역으로 설정하였으며, 시간적 범위는 기전 명칭의 유래를 제공하고 있는 중국 상고시대로부터 현재까지이다. 연구 대상인 ‘기전’ 명칭을 고문헌 및 고지도 등에서 수집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및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 그리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자료들을 주로 이용하였다. 대체로 국가 스케일에서 인식되는 ‘기전’ 지명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관찬 사료들을 주로 참고 하였고, 시대별 지식인 계층의 ‘기전’ 지명 인식 정도를 살펴보기 위해 일부 개인 문집류 등의 사찬 자료들도 참고하였다.

삼국시대의 사료들 중에는 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활용하였고, ‘기전’ 지명의 중국 측 용례를 확인하기 위해서 『중국정사조선전』과 『한국고대사료집성중국편』 등도 참고하였다. 고려시대 사료는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등을 활용하였다. 조선 시대의 자료 수집은 편년 자료로서 『조선왕조실록』, 『고종시대사』,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등을 활용하였고, 고지도의 경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자료를 주로 참고하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현대의 자료들에 대해서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연속간행물(신문 자료 및 한국근현대잡지자료) 등을 활용하였다. 특히 현재 일반 지명 언중들의 ‘기전’ 지명의 인식과 사용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 및 네이버 등의 인터넷 검색 엔진을 활용하였다.


2. ‘기전’이란 이름의 유래와 의미


‘기전(畿甸)’이란 이름은 ‘경기(京畿)’의 별칭으로 ‘왕기(王畿)’, ‘기내(畿內)’라는 명칭과 통용된다.이때 ‘경기’는 왕이나 군주가 거처하는 서울[京]과 왕의 직할지인 서울의 주변 지역[畿]을 아울러 부르는 중국의 고대 봉건제로부터 유래한 말이다(심승구, 2015, 35). 경기나 왕기의 주변으로는 왕이 봉(封)한 제후국들이 분포하며, 왕기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500리(약 200km) 단위로 5개의 구역을 나누어 오복(五服), 즉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의 5등급으로 분류하여 차등화하였다.

왕기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는 오복 지역은 중국 문명과 왕의 교화가 미치는 수혜 지역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여 중국 천자 중심의 봉건 질서와 이데올로기를 지상에 구현한 구별짓기(distinction)와 권력관계의 재현물이다. 이를 통해 자아(self)와 타자(other)를 구분하고, 황복 구역이 끝나는 2,500리 너머 지역은 중국 문명의 교화를 받지 못하는 타자로서의 ‘오랑캐’가 거주하는 차별의 공간이 펼쳐져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堯制五服圖(요제오복도) (上古時代)

<그림1> 중국 고대의 오복도

자료 : 書傳, 學民文化社 影印本(2008), 48-49.


<그림 1>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이 오복 제도는 도당씨(陶唐氏) 요(堯) 임금시대에 처음 제정된 것으로 평가된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따라 요제오복도(堯制五服圖)에는 천하의 공간을 사각형[方]으로 표현하였고 그 중심에 왕기(王畿)가 자리 잡고, 왕기로부터 주변으로 5백리씩 나누어 사방 5천리의 오복 공간을 배치하였다. 한편 우필오복도(禹弼五服圖)에는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주변 방향으로 오복과 오복 각각을 보완 및 보필(輔弼)하는 구역인 ‘필(弼)’ 구역 500리를 배치시켜 사방 1만리가 되는 구복[주(周) 나라의 九服: 侯(후)·甸(전)·男(남)·采(채)·衛(위)·要(요)·夷(이)·鎭(진)·藩(번)] 공간을 나누고 있다. 이를 통해 상고 시대의 오복 제도가 주(周) 나라에 이르러 구복 제도로 분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기 및 왕성, 그리고 전복 구역이 상호 혼용되면서 후대에는 ‘기(畿)’와 ‘전(甸)’ 구역을 동일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禹弼五服圖(우필오복도) (周代)


‘기전’ 지명에 대해 굳이 형태소 분석을 한다면, 전부 지명소인 ‘기(畿)’는 ‘왕성 밖 왕성에 인접한 공간’을 의미하고, 후부지명소인 ‘전(甸)’은 ‘畿’ 구역 너머 왕성으로부터 500리까지의 공간’을 뜻한다. 즉 왕성으로부터의 지리적 거리에 따르면 ‘기’가 ‘전’보다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후대로 올수록 ‘기’와 ‘전’을 혼용해서 사용하거나, 나아가 ‘기’를 ‘전복’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하면서 중국 상고시대와 주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기복(畿服)’ (앞의 별표는 추정 자료를 뜻함), 즉 ‘왕성으로부터 500리 거리의 구역’이란 왜곡된 인식으로 일반 사전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한편 ‘기’와 ‘전’이란 이름은 ‘畿內’(기내), ‘畿輔’(기보), ‘畿中’(기중), ‘畿縣’(기현), ‘近畿’(근기), ‘圻甸’(기전), ‘湖甸’(호전) 등과 같이 후대 지식인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어 사용되어 왔다.


또한 한자어의 의미에 있어, ‘기(畿)’와 ‘전(甸)’이라는 이름은 초기에 ‘왕성에 가까운 곳’ 정도로 풀이되는 보통명사였다가 후대에 일정한 구역을 지칭하는 지명, 즉 고유명사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경우, 경기의 별칭으로서의 기전은 현재 서울특별시 주변에 분포하는 광역지방자치단체인 경기도의 행정구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서울, 즉 왕성이나 왕도를 포함하고 있는 ‘경기’라는 이름과는 달리, 서울을 제외한 경기, 즉 순수한 서울 주변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기전이란 명칭이 주목되었다. 후대로 오면서 기전이란 이름은 서울, 왕기, 왕성, 왕도를 보조, 보완, 보필, 방어하는 종속적이고 봉건적인 의미를 극복하여, 서울을 제외한 인근 지역의 지리적 독립성과 기능의 독자성, 그리고 개별적인 영역 및 문화 정체성을 강조할 때 주로 애용된 지명이다.

고려 성종 14년(995년) 10도제를 실시하면서 개주(開州)를 중심으로 설치된 적현(赤縣)과 기현(畿縣)이 고려 경기제(京畿制)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당(唐) 나라의 경기제가 한국에 정식 제도로 성립한 것은 고려시대인 1108년(현종 9)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부터 고려의 왕성인 개경의 외곽 지역을 ‘경기’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경기는 개경을 유지하기 위한 기보(畿輔) 공간이자 지방제도의 하나로 정비되면서 지방과는 구별되는 특수한 행정구역으로 기능하였다(심승구, 2015, 36).

이와 관련하여 경기제를 수용한 고려시대 당시, 봉건 제도의 일환으로 구축된 오복 제도는 경기와 기전 구역에 왕성을 수호하고 방어하는 봉건적 기능을 부여하였고, 이때의 ‘경기’와 이의 별칭인 ‘기전’이란 명칭은 ‘왕성 주변 지역’이라는 의미를 지닌 보통명사로서 통용되었다. 그 후 조선 태종 13년(1413)의 8도제 및 지방행정제도(군현제)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면서 점차 봉건제 하의 ‘경기’와 ‘기전’이란 보통명사는 지방행정제도 하의 ‘경기도(京畿道)’와 그 별칭으로 인식되면서 고유명사인 지명으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경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인접한 중국 문명의 영향과 통일신라시대 이래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으로 인하여 한국의 순수한 고유 지명은 2자 형태의 중국식 지명으로 개명되어 왔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의 전국 군현 지명에 대한 2자식 한자(漢字) 지명으로의 개명과, 앞서 설명한 고려시대의 당식(唐式) 정치 및 행정, 율령 제도의 수용으로 인하여 고유 지명은 점차 사라지고 중국식 2자 형태의 한자 및 한어(漢語) 지명의 생산과 유통은 확대되어 왔다. 특히 고려 초기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기존의 다양한 형태의 고유 지명들이 2자식의 중국식 유교(儒敎) 지명으로 표준화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김순배, 2013, 36-37). ‘기전’과 ‘경기’라는 명칭 또한 중국 문명으로부터 수입된 유교 지명이라 할 수 있다.


<표 1과 2>는 역사상 ‘기전’이란 이름이 등재된 문헌 기록을 일부 발췌하여 제시한 것으로, 이때 ‘기전’이란 용어는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맥락에 따라 보통명사로, 혹은 고유명사인 (유교) 지명으로도 사용되었다. <표 1>는 한국의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기전’과 관련된 명칭들, 즉 ‘畿甸’, ‘京畿’, ‘畿內’, ‘五服’ 등의 최고(最古) 기록을 뽑아 정리한 것이다. 한국 측 문헌을 살펴보기에 앞서 중국 측 문헌의 경우, 기전 명칭의 사용은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표 1>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7세기 초 중국 역사서인 『晉書(진서)』(卷61, 列傳, 第31)의 구희(苟晞) 열전에 왕성 주변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畿甸’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보다 앞서, ‘오복’이란 명칭 또한 472년에 중국 북위(北魏)의 황제가 백제의 개로왕에게 전하는 문서에 등장하고 있어, 이 명칭이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강조하는 외교 문서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제를 오복, 구체적으로는 황복(荒服)의 바깥쪽에 위치한다고 언급한 대목을 통해 백제가 중국 천자의 문명과 교화를 받지 못하는 오랑캐 구역에 위치하면서도 중국을 사대(事大)하는 정성을 칭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배어있는 중심과 주변의 권력 관계와 차등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주: ‘등재내용’ 항목의 굵은 글씨체와 방점은 필자에 의한 것임.

<표 1> ‘기전’관련 명칭의 고문헌 기록


한국의 경우, ‘기전’이란 이름은 10세기 초반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왕성인 금성(金城, 현 경주)을 침입하여 노략질한 사실을 기록하면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삼국유사』(927년), 『삼국사기』(928년), 『고려사』(928년)가 1년의 차이를 두고 기록되어 있으나, 세 기록 모두 당시 신라의 왕성인 금성 주변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이 기록들에 등장하는 ‘畿甸’이란 명칭은 고유명사로서의 지명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왕성 주변 지역’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서 언급되고 있다.

‘경기’라는 명칭의 경우, 636년인 7세기 전반에 “亰4畿4南岸”(경기 남쪽 해안)이라는 보통명사 형태로 처음 등장한 후, 300여년 뒤인 10세기 전반에 『삼국유사』(928년)와 『삼국사기』(931년)에 기록되고 있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 경순왕을 왕성인 금성으로 직접 찾아가 방문한 사실을 기록하였고, 이때의 ‘경기’ 명칭 또한 신라의 왕성인 금성 주변의 지역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보통명사로 보인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사실을 『고려사』(권2, 세가, 태조 14년 2월)에서는 왕성 주변 지역을 ‘경기’가 아닌 ‘畿內(기내)’로 표현하고 있다(표 1). 이를 통해 10세기 전반부터 ‘경기’와 ‘기내’라는 명칭이 왕성 주변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혼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기내’라는 명칭은 2세기 후반 경인 191년에 고구려 기록에서 일찌감치 등장하고 있어, 기전 및 경기 보다 매우 이른 시기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삼국사기』, 권16, 髙句麗本紀, 제4, 故國川王, 十三年夏四月). 이는 ‘기내’(畿의 안쪽, 왕성 가까운 안쪽)라는 명칭이 가지는 용이성과 편리성이 언중들에게 쉽게 이해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 ‘기전’ 지명의 영역 변화와 영역 정체성의 구축


기전의 원 명칭인 경기는 중국의 고대 봉건사회로부터 유래한 이름으로 군주가 거주하는 도읍을 보호하고 그 기능을 돕기 위해 설정한 왕의 직할지였다. 천자의 봉건적 지배질서를 공간에 재현한다는 원리 하에 만들어진 경기는 본래 ‘경(京)’과 ‘기(畿)’가 결합되어 있는 형태였으나, 당(唐)을 거쳐 송(宋) 나라에 이르러 점차 분리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심승구, 2015, 35-36). 경기의 별칭인 ‘기전’ 또한 ‘기(畿)’와 ‘전(甸)’이 결합한 명칭이며, 영역적으로 보았을 때 왕성과 가까운 ‘기’ 구역을 기준으로, 그 안쪽 왕성의 ‘경’ 구역과 바깥쪽 500리까지의 ‘전’ 구역의 둘 사이에 분포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전’이란 이름이 가리키는 영역에는 왕이나 천자가 거주하는 왕성으로서의 서울 구역을 제외하고 있어 엄밀히 말해 ‘경기’라는 명칭과 비교하여 왕권과 봉건제에 도전하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은 조선시대 이래, 고려시대의 경기제를 극복하여 8도체제 하의 하나의 지방행정구역으로서의 독자적인 ‘경기도’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기전’이란 별칭이 자주 언급되고 애용된 근본적인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의 경기제는 고려시대인 1108년(현종 9)이래 공식적으로 제도화 되었다. 그 후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왕도가 이전하면서 개경 중심의 경기는 현재의 서울인 ‘한양’ 중심으로 다시 재편되었다. 한양 중심의 경기는 그 뒤 몇 차례의 변화를 겪다가, 세종대에 이르러 오늘날의 경기도와 유사한 영역으로 정립되기에 이른다(그림 2)(심승구, 2015, 36).



<그림 2> 경기의 영역 확대 [고려전기~고려말(1390)~조선전기(1486)]

자료: 심승구 2015, 43.


경기 영역에서 가장 큰 변화는 조선이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이루어졌다.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에 개성의 북부지역이 서해도로 넘어가고 대신 한양의 남쪽 지역이 대거 경기 지역에 포함되었다. 이미 공양왕 때 양광도 해안과 한강 주변 지역으로 확대된 경기가 동남쪽 내륙으로 크게 확대된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한강 이북 지역과 서해안 연안에 한정되었던 사대부들의 거주지가 한강 이남과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의 확장은 인접한 다른 도의 영역에도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경기 영역이 동남쪽으로 확장되면서 충청도의 영월군을 갈라 강원도에 붙이고, 강원도의 영춘현을 충청도로 옮겼다. 또한 충청도의 일부 영역이 경기에 편입되자, 그 대신 옥천·황간·청산·영동·보은 등 경상도 상주목 관내 지역이 충청도로 넘어가 오늘날과 유사한 도 경계가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한양의 천도는 경기의 변동 뿐 아니라 전국의 지방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심승구, 2015, 46).


고려와 조선에 걸쳐 ‘경기제’의 구성과 기능을 역사적으로 심도 있게 분석한 심승구(2015)에 따르면, 고려 개경의 ‘경기’ 영역이 확장되는 계기는 1388년 위화도회군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이성계 일파는 신왕조의 물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1391년 (공양왕 3년)에 과전법(科田法)을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기존 경기의 영역을 확장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설정된 경기 좌・우도는 군현의 수로 볼 때 문종 23년(1069)에 확장된 경기의 54개 군현보다는 적지만, 그 동안의 군현의 통폐합 등으로 인해 영역은 오히려 확장되었다.

이처럼 경기의 영역을 확장한 것은 과전법을 시행하기 위한 일환이었으며, 고려 말 신왕조 건국 세력들은 과전을 경기에 한하여 지급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그에 소요되는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경기의 영역을 확대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경기 좌・우도에 일반 행정을 담당하는 각각 도관찰출척사를 파견하면서 조선시대의 경기는 중앙과 구분되어 점차 지방행정구역인 하나의 도(道)로 자리를 잡아나갔다(심승구, 2015, 42).


<표 2>는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경기의 별칭으로서의 ‘기전’이라는 이름의 용례 일부를 발췌하여 제시한 것이다. 첫 사례인 1323년 『고려사절요(권24, 충숙왕 10년)에 등장하는 ‘畿甸’은 문맥 상, 한 국가의 일반적인 지역을 가리키고 있어 ‘왕성 주변 지역’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 사례를 제외하고 그 후대의 사례들은 모두 경기 및 경기도, 나아가 경기 중 왕성을 제외한 구역과 그 구역에 사는 백성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고 있어 구체적인 고유한 위치와 영역을 지칭하는 고유명사, 즉 지명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1363년 『고려사』(권80, 志, 권34, 食貨 三)와 1416년의 『태종실록』(31권, 태종 16년 5월 3일 갑오)에 등재된 ‘畿甸’은 각각 ‘京畿’와 ‘京畿賑濟使(경기진제사)’라는 명칭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이를 통해 공식적인 행정구역 명칭으로는 ‘경기’가 사용되었고, 특히 ‘기전의 백성’, ‘기전의 전지’와 같이, 왕성을 제외한 경기 지역을 구별하여 지칭할 때는 ‘기전’이란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



주: ‘등재내용’ 항목의 굵은 글씨체와 방점은 필자에 의한 것임.

<표 2> ‘기전’명칭의 기록 (고려 ~ 조선시대)


한편 ‘畿甸’의 ‘畿’자를 동일한 의미를 가지면서 쓰기에 간편한 ‘圻’자로 표기한 ‘圻甸’(기전)이 16세기 초인 1519년 『중종실록』(35권, 중종 14년 2월 15일)에 처음 등장하여 1720년경의 『숙종실록』(65권, 부록, 숙종 대왕 행장)에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숙종대왕 행장을 수록한 1720년경의 기록에서는 ‘圻甸’과 ‘畿甸’이 하나의 문서에서 동시에 기록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는 숙종대왕이 서거한 이후 그의 일대기인 행장(行狀)을 작성하기 위해 시대와 작성자를 달리하는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옮겨적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추측된다.


조선 ‘경기(도)’만의 특징과 관련하여 심승구(2015, 56-57)는 고려 및 중국의 경기제와 다른 조선 경기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즉 고려의 경기가 조선의 경기보다 그 영역의 크기는 작았으나, 고려의 경기는 지방의 행정구역이 아니라 경기제 본래의 기능, 즉 왕성 수호와 보좌 기능을 강조하고 황도(皇都)인 개경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호하는 특수한 행정구역이었다. 고려는 ‘5도양계제’와 구분하여 황도인 개경 주변 지역을 ‘경기’로 설정함으로써 직할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경기는 그 명칭과는 달리 왕의 직할지로서의 성격은 고려에 비해 크게 약화되었다. 조선은 경기를 8도에 포함시켜 이해한 것이다. 다만, ‘경기도’라는 명칭 대신 ‘경기’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도록 제한하여 직할지로서의 의미만은 살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와 동시에 군현제의 상급체계인 도제 안에서 ‘경기도’를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였다. 경기제에 대하여 봉건제의 명분과 함께 중앙집권적 군현제의 실리를 조화롭게 운영하고자한 점은 중국은 물론 고려와도 다른 조선 ‘경기’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조선 경기제의 특징은 기전 명칭이 경험한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지명)로의 성격 변화 과정에서 그 구체적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 기전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10세기 초반부터 고려 말의 14세기 초반 경까지 대체로 ‘기전’이란 이름은 보통명사로 통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조선 태종 13년(1413)에 8도제와 군현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봉건제와 오복제를 상징하는 왕의 직할지로서의 보통명사 ‘경기’라는 명칭은 점차 조선 후기로 오면서 독자적인 지방행정제도 하의 하나의 도, 즉 고유한 위치와 영역을 갖춘 행정구역이자 이를 지칭하는 지명으로서의 ‘경기도(京畿道)’라는 고유명사로 변화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경기’ 이름의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의 기능 변화는 ‘경기’의 별칭인 ‘기전’의 변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를 반증하듯 조선 후기인 1807년의 『순조실록』(10권, 순조 7년 1월 10일)에는 “畿甸 海西 關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각각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의 별칭으로서, ‘기전’이 봉건제와 오복제 하의 보통명사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비로소 하나의 지명(행정구역 명칭)인 ‘경기도’를 대체하는 공식 지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19세기 후반인 1894년의 『승정원일기』(3050책, 고종 31년 9월 26일)에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한 관직 명칭인 ‘소모관’이 ‘경기 소모관’이 아닌 ‘畿甸 召募官(기전 소모관)’으로 기록되고 있는 사실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표 2).

지명 ‘경기도’의 별칭으로서 기능하는 ‘기전’ 지명의 형성은 앞의 ‘기전 소모관’의 사례와 함께, 19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즉 <표 2>의 하단과 <그림 3>의 상단에 제시한 사례와 같이,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인 ‘경기도’를 활용한 ‘경기도’, ‘경기읍지’, ‘경기영사례’가 아닌, 경기도 전체의 상황을 반영하는 지방지도, 지방읍지, 지방영지의 명칭으로서 ‘기전도’(1800~1822), ‘기전읍지’(1863~1907), ‘기전영지’(1895), ‘기전영사례’(1894)가 소수의 사례이기는 하나 19세기부터 등장하고 있는 점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畿甸圖 (기전도)> (1800~1822)

<그림 3> 기전(경기)의 영역 자료: (상) 《東國輿圖》(서울대 규장각 소장, 古大4790-50); (하)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시스템(http://www.atlaskorea.org).



기전(경기)의 군현 분포 (조선 후기)

주1: 행정구역의 굵은 외곽 경계는 필자에 의한 것임.

주2: 조선시대, 대체로 충청도에 소속되었던 평택(平澤)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경기도 진위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38년에 평택군으로 개명되었음.


19세기에 들어 강화된 ‘경기’와 ‘기전’의 고유명사화는 하나의 영역적 기표(territorial signifier)이자 영역 정체성(territorial identity)을 상징하는 ‘지명’의 성립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지명은 구체적인 위치와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지명을 통해 해당 지명 영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긴밀한 유대감과 소속감,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는 물리적이고 동시에 인식 수준의 주요 기반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의 지방행정구역으로서의 조선시대 ‘경기(도)’는 1895년의 23부제의 시행으로 잠시 그 지명이 사라졌다가, 이듬해인 1896년의 13도제의 실시로 명실 공히 하나의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인 ‘京畿道(경기도)’로 자리 잡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표 3>에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정치적 혼란과 식민지 경험 속에서도 ‘기전’이란 지명이 경기도에 거주하는 사람들, 즉 ‘경기인(京畿人)’들에 의해 그들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확인하고 강화해 주는 전통적인 상징물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한말에 경기도를 유람하는 것을 ‘기전을 유람’한다고 표현하거나(皇城新聞, 1900.2.15.), 경기도 포천군을 ‘기전의 저명한 문향’으로 인식하였다(태극학보, 제23호, 1908.8.25.).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이천군, 용인군을 경유하는 수원-인천 간의 새로운 철도를 건설하는 기업 명칭으로 ‘기전 산물’이 언급되고 있다(동아일보, 1935.10.1.).


주: ‘등재내용’ 항목의 굵은 글씨체와 방점은 필자에 의한 것임.

<표 3>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 이후 ‘기전’ 지명의 기록


1995년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된 이후, 현재 한국 최대의 인구를 보유한 광역지방자치단체로 성장한 경기도는 고려시대(태조 1년, 918년) 이래 서울에 의존해 온 종속성을 탈피하기 위해 독자적인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표 3>의 경기일보(2000.12.30.) 기사에 제시된 바와 같이, 경기인들은 경기도의 정체성을 ‘기전 문화’에서 찾고 있다. 그 결과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학술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그들은 학술지 ‘기전문화연구’ 및 ‘기전문화’, 학술총서인 ‘기전문화예술총서’, 그리고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전문화대학’ 등을 만들었다.

경기도의 지방정부와 시민단체, 문화단체, 그리고 지방 언론 등이 주도하고 있는 ‘경기문화 정체성 찾기 사업’과 ‘기전 문화의 부활’이라는 구호는 지난 천여 년 간 서울(개경, 한양, 경성, 서울특별시)이라는 중심 권력과 문화에 기생해온 ‘경기’의 봉건성과 종속성을 극복하여 진정한 ‘경기도’의 자립과 독립을 주장하는 하나의 선언서와 같다. 이때 ‘기전’이란 지명의 선택 과정은 바로 서울과 왕성을 내포하고 있는 ‘京畿(경기)’라는 지명을 ‘배제(exclusion)’하고, 서울을 제외한 ‘경기도’의 순수한 영역을 가리키고 있는 지명, 즉 ‘畿甸(기전)’을 ‘포함(inclusion)’하는 과정이다.


4. 나오며: 기전 문화의 부활


중국 고대의 봉건제와 오복제에서 유래한 ‘기전’이란 명칭은 ‘경기’라는 이름의 별칭으로 사용되어 왔다. 고려시대에 당나라의 경기제가 공식적으로 수용되면서 한국에는 ‘경기’라는 명칭과 함께 ‘기전’이라는 이름의 사용이 증가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고는 고대 중국 문명의 왕성 중심의 봉건적 질서를 내면화하고 있는 ‘기전’ 명칭의 유래와 의미를 문헌 중심으로 분석한 후, 이 이름이 한국, 특히 경기도의 언중들에게 수용되어 정착되면서 보통명사에서 일정한 위치와 영역을 가진 지명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영역 정체성의 관점에서 조사하였다.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기전 명칭의 유래와 의미를 분석하여 기전이라는 이름이 중국 상고시대의 오복제에서 언급된 ‘왕기’와 ‘전복’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것임을 확인하였다. 당의 경기제가 고려 현종 9년인 1108년에 공식 수용되기 이전인 10세기 초반에 이미 ‘기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이때 기전이란 명칭의 의미는 ‘왕성 주변 지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쓰이면서, 동시에 왕과 왕성을 수호하고 방어하는 봉건적 질서를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후 14세기 중반을 경유해 조선이 건국되면서 ‘경기’라는 행정 구역이 강화 및 확대되면서 경기의 별칭인 기전 또한 ‘왕성 주변 지역’이라는 보통명사의 의미를 벗어나 구체적인 위치와 영역을 가진 지방행정구역으로서의 지명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조선 후기인 19세기에 이르러 ‘기전’ 명칭의 고유명사화가 강화되어 급기야 ‘경기(도)’라는 정식 명칭을 대신하는 공식 지명으로 자리 잡게 된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를 걸치면서 기전 지명은 구체적인 위치와 영역을 가진 영역적 기표로 작동하였고, 일정한 영역 정체성이 구성되기에 이른다.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된 1995년 이후, 경기도는 한국 최대의 인구 규모를 가진 광역지방자치단체로 성장하였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난 1000여 년 간 서울로부터의 종속성을 탈피하기 위해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경기 정체성’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그 영역 정체성 구축의 중심에는 ‘기전 문화의 부활’이 자리 잡고 있다. 이때 ‘기전’이란 지명의 선택 과정은 바로 서울과 왕성을 내포하고 있는 ‘京畿(경기)’라는 지명을 ‘배제’하고, 서울을 제외한 ‘경기도’의 순수한 영역을 가리키고 있는 지명, 즉 ‘畿甸(기전)’을 ‘포함’하는 과정이다.

한편 ‘기전’ 지명의 존속과 개명을 둘러싼 대립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후자와 관련하여, ‘기전’ 지명을 혁파하여 새로운 지명으로 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즉 ‘기전’이란 한어(漢語) 지명은 태생적으로 왕성에 종속된 구역으로서의 ‘경기’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기전’이란 지명 또한 왕 및 천자 중심의 고대 중국의 봉건적 질서를 옹호하는 오복제에서 파생된 이름임을 고려할 때, 앞으로 이 이름에 담긴 기성의 믿음[信]과 의미[義]를 탈피하고 경기도의 진정한 자립과 정체성 구축을 위해서는 ‘경기’도 ‘기전’도 아닌 제 3의 새로운 지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다. 전자와 관련하여서는 ‘기전’ 지명이 “비록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개념을 수 백 년 이상 사용해 온 우리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재개념화 하고 범수도권 지역의 지역 정체성을 표상하는 용어로 그 의미를 재구성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궁극적으로 지명의 의미를 둘러싼 갈등과 이에 대한 해결은 결국 인류가 경험한 지명 변천의 수많은 역사가 말해 주듯, 그 지명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경기도 사람들의 뜻과 실천에 달려 있다.




글 김순배

한국교원대학교에서 문화ㆍ역사지리학을 전공하였다. 현재 청주 흥덕고등학교 지리 교사이며 한국지명학회 연구이사와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연구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땅에 새긴 이름으로 인해 누군가의 경관이 되고 장소가 되는 지명의 문화정치와 전통적인 지명 위치 및 영역 고증에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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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5 _ 2020 여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6.30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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