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도박물관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 박물관 7

2020-08-30 ~ 2020-12-31 / 실학 태동한 경기도… 성호 이익·다산 정약용, 조선 개혁 꿈꾸다

2020 중부일보 연재 시리즈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 박물관〉은 개관 25주년을 맞이하여 전시실 전면 개편을 진행한 경기도박물관이 중부일보와 함께 2020.06.28부터 2020.09.20까지 총 10회 시리즈로 제작한 콘텐츠입니다. 더 자세한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 박물관〉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중부일보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즐기실 수 있습니다.




조선후기 개혁의 중심, 경기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 (경기도박물관)

고려 31대왕인 공민왕과 그의 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나란히 병좌한 부부초상화이다. 고려시대 직할지적 성격이 강했던 경기가 경기좌도와 우도로 나뉜 것이 공민왕대이다.


원래 경기라는 의미는 오늘날 행정구역으로서의 경기도와 달리 수도 ‘경(京)’과 수도 주변지역인 ‘기(畿)’로 이루어진 용어이다. 이처럼 경기는 군주가 거주하는 도읍을 보호하고 도읍의 기능과 역할을 보조하기 위하여 설정된 공간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경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018년으로 고려 현종 때이다. 천년 전에 경기라는 푯말을 들긴 했지만, 수도 주변부라는 공간적 한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수도인 개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한 경기의 권역이 정해졌다.

수도도 아니고 지방도 아닌 제왕의 통치력이 미치는 공간으로 일종의 직할지적 성격이 컸던 경기가 수도와 구분되는 행정적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고려 공민왕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경기는 관료들의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나아가 수도를 보호하는 군사 거점 지역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경세유표(실학박물관)

다산 정약용이 1817년에 저술한 국가개혁 정책서이다.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한 관제·토지제도·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원리 등이 제시되어 있다.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

경기가 서울의 주변부가 아닌 중심지로 오롯이 부상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에 와서였다. 조선후기 서울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함께 종래 정치도시이지 행정도시에서 새로운 경제도시로 발돋움하였다. 이에 따라 경기 또한 수도의 주요 물자 운송지로 주목되었으며,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경기의 경제적 공간적 범위가 확장되었다.

조선시대 전국의 교통망은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조성되었다. 한양의 외곽에 위치한 경기는 이러한 대로들이 지나는 경로였다. 경기를 지나는 대로는 18세기 이후 유통경제의 확대로 점차 늘어났다. 경기는 확장된 수도, 즉 ‘수도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통팔달의 지역이 된 것이다.

18세기 이후 한양에서 분화하였던 교통로가 확장하여 경기에서 분기되는 도로가 많아졌다. 이른바 6대로, 10대로로 불리는 주요 간선도로가 한양에서 전국 각지로 뻗어나갔다. 경기는 한양에서 출발한 간선도로가 첫 번째로 지나는 지점이었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서와 같은 조선후기 고지도에는 경기 지역의 지선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지선도로의 다양화는 빈번한 교통로의 이용과 활발한 인적‧물적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수도로 통하는 관문이자 경로 역할을 담당하면서 어느덧 경기는 각종 정보와 물류가 집결되는 지역으로 성장했다. 수도의 주변 지역이 아닌, 개방과 개혁이라는 시대정신에 부응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곳이 된 것이다. 조선후기에 개혁과 개방성을 가진 새로운 학문 경향으로 ‘실학’이 경기지역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성호집(경기도박물관)

경기 실학의 종주인 성호 이익의 문집을 총 정리한 것으로 당초 성호 사후 11년 뒤인 1774년에 편집되었으나 가계가 몰락하면서 1917년 제자인 순암 안정복의 학맥을 잇는 성재 허전의 문인 그룹에 의해 발간되었다.


실학이 태동한 경기

조선후기 실학은 국가의 오래되고 낡은 제도를 개혁하여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던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새로운 학문 경향이다. 물론 실학의 탄생에는 17세기와 18세기에 이루어진 여러 개혁정책도 큰 힘이 되었다. 1608년에서 1708년까지 100년의 노력 끝에 실행하게 된 대동법, 1750년에 이루어진 균역법, 1774년 공사노비의 신공(身貢) 폐지, 도망한 공노비에 대한 추쇄 폐지 등은 백성들의 처지를 크게 개선하는 조치들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개혁조치들이 백성의 고충을 해결하는데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18세기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경기 지역의 남인(南人)계 학자들은 주류 정치권으로부터 밀려나 있었다. 이들은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늘 민초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 신분 제도, 관리 선발과 임용, 중앙과 지방의 행정 체계 등 전반적인 국가 개혁이 필요했다.

국가 개혁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제도 개혁이었다. 성호 이익은 “아무리 완벽한 법이라 해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있으면 고쳐야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익의 개혁 사상을 계승한 다산 정약용은 조선을 새롭게 리뉴얼해야 된다고 믿었다. 그는 󰡔경세유표(經世遺表)』라는 국가개혁안을 담은 책을 저술하면서 “시대 흐름에 따라 제도가 변화되어야 함은 세상의 도리이자 이치이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온갖 법도가 무너지고 모든 일이 어수선하여 털끝 하나도 문제 아닌 것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바꾸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여 정부의 과단성 있는 개혁 조치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조선후기에 태동한 실학을 경기지역에 삶의 터전이 있었던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으로 이해되어, 경기지역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성립한 실학이 조선후기 실학을 대표하였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조선후기 실학의 계보를 “반계가 일조(一祖)요, 성호가 이조요, 다산이 삼조이다”라고 정리하였다. 아직도 반계-성호-다산은 조선후기 실학 계보의 주축으로 인정되어오고 있다. 반계 유형원은 실학의 개창한 인물이고, 성호 이익은 실학을 체계화했으며, 다산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세 사람은 정치적으로 모두 남인 출신이었으며, 경기 출신 혹은 연고가 있는 인물들이다.


글 : 정성희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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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박물관〉

    기획 및 발간/ 경기도박물관, 중부일보

    원문 제공/ 중부일보(http://www.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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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밝히고 계승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박물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