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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 박물관 6

지역출신 배제한 경기관찰사… 군사·행정·사법권 권력 남용 견제

2020 중부일보 연재 시리즈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 박물관〉은 개관 25주년을 맞이하여 전시실 전면 개편을 진행한 경기도박물관이 중부일보와 함께 2020.06.28부터 2020.09.20까지 총 10회 시리즈로 제작한 콘텐츠입니다. 더 자세한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 박물관〉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중부일보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즐기실 수 있습니다.



경기를 다스리다



분청사기 상감 ‘정통4년명’ 김명리 묘지 보물 제1830호 조선 1439년 안동김씨 문온공파 위탁 태종 11년(1411)

경기경력京畿經歷(현 경기도 부지사)을 지냈던 김명리金明理 (1368~1438년)의 가계와 이력 등 행장行狀을 적은 묘지이다. 종 모양으로 상단에는 투각으로 연꽃봉오리를 장식된 묘지로 희귀한 사례이다.


“나무는 뿌리가 있어 자라서 무성하고,물은 샘으로부터 흘러서 바다에 이른다.

나라에 기전(畿甸)이 있음은 나무에 뿌리가 있고 물에 샘이 있음과 같도다.

기전의 정치가 잘되고 못됨은 나라 전체의 무게와 관계되며 풍속이 순후하고 병든 것은 사방의 오륭(汚隆)에 관계한다.”

- 1540년(중종 35)에 경기관찰사 임백령에게 내린 교서 중에서 -




경기도박물관 고려·조선실 전경

기존의 주제별 전시실로 구분되어 있던 공간(Room 타입)을 하나의 큰 공간(Hall 타입)으로 바꾸고, 벽과 천장을 노출시켜 개방감을 극대화 하였다. 특히, 건물의 역사를 대변할 수 있는 기둥을 노출시키고 전시에 적극 활용하여 모던한 공간연출을 하였다.


경기(京畿)는 도성(都城) 외곽지역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며, 왕기(王畿)‧기전(畿甸) 등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조선은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왕권의 대행자인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를 통해 국왕-관찰사-수령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였다. 관찰사(觀察使)는 흔히 감사(監司)·도백(道伯)·방백(方伯)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초대 관찰사인 장자충(張子忠)을 시작으로 1908년 마지막 관찰사인 김사묵(金思黙)까지 약 650여명이 이 자리를 역임하였다.

"경국대전"에서 관찰사는 종2품으로 규정짓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높은 품계의 대신(大臣)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관찰사 임명 대상자는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했다. 뇌물죄로 적발되거나 행실이 옳지 못한 사람, 해당 도의 출신이면 안됐다. 상피(相避)의 규정에 따라 같은 도에 복무하는 친척이 있으면 제수될 수 없었다. 임명 받은 관찰사는 임금에게 교서(敎書)와 도끼(斧鉞)를 받았다. 관찰사는 강력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외교나 국방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집권세력이 중요시 한 자리였다. 



경기도 관리들의 근무평가서 京畿道褒貶等第

순조 24년(1824) 경기관찰사 박종기가 경기도 관리들의 군무성적을 평가한 자료. 관찰사는 관내 모든 수령을 규찰하여 연2회 근무를 평가하였다. 이 평가는 포상 및 징계와 직결되어 있어 관찰사의 절대적인 권력 중 하나이다.


◆ 경기관찰사에 부임하다

‘경기’는 수도 주위를 관할하는 지역으로 8도 중 가장 큰 도였으며 이곳을 책임지는 관찰사는 그 임무가 막중하였고 이에 따른 강력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권한[직계권(直啓權)], 도내 수령들의 포폄, 도내 모든 군사와 민사를 지휘했음은 물론이고, 압송하라는 왕명이나 대간의 상주(上奏)가 없으면 파면되더라도 도사(都事)가 관찰사직을 대행할 수 없었다.

경기도는 8도 중 가장 큰 도였으며, 수원부·광주부·개성부·강화부의 유수(留守)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등을 함께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경기도는 행정은 물론 외교·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항상 집권세력에게는 중요한 자리 중 하나였다.

또한 ‘경기’는 임금의 가르침[王化]이 가장 먼저 미치는 공간으로 새로운 정책을 실험적으로 시행한 곳이다.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세금과 부역을 담당해야 했다. 왕실의 능원묘(陵園墓)와 중앙의 유력 가문의 무덤이 다수는 위치하였다. 따라서 왕릉의 봉심(奉審)은 경기도관찰사의 주요한 업무 중 하나였고, 능원묘에 대한 관리에는 제향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는 일까지도 포함하였다. 또한 국왕의 능행이 있을 경우 능행로의 보수와 준비도 경기도관찰사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청원군 심대 호성공신교서 靑原君沈岱扈聖功臣敎書 보물 제1175호 조선 1604년 청송심씨 충장공파 기증 선조 25년(1592)

경기관찰사로 한양 수복을 위해 삭녕군(현 연천) 등피나루에서 왜적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심대를 공신에 책봉하는 교서이다.


◆ 경기감영의 위치 변화

감영(監營)은 각 도(道)의 관찰사가 거처하며 업무를 처리하던 곳을 말하는데 경기감영은 기영(畿營)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감영은 관찰사를 보좌하기 위해 파견된 경력(經歷), 도사(都事), 판관(判官) 등의 수령관, 실무행정에 종사하는 9품 이상의 관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413년(태종 13) 경기감영은 이전부터 위치했던 수원에 설치되었다. 이후 곧 감영을 광주(廣州)에 옮겨진 뒤 세조 때 한성부 돈의문 밖 반송방(盤松坊)에 설치되었다. 광해군 때 영평과 포천이 병합되어 영평대도호부로 승격된 후 이곳에 경기감영이 옮겨지기도 했지만, 인조반정 이후 다시 한성부로 돌아왔다. 돈의문 밖에 위치한 경기감영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을 겪으며 불에 탔다. 이 때 잠시 도성 안으로 옮겨져 한성부 서북쪽에 잠시 자리 잡았다가 1641년(인조 19)에 옛 터인 돈의문 밖에 그대로 다시 감영을 다시 지었다.

1895년(고종 32) 고종은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경기관찰사를 한성관찰사로 고쳤고, 이듬해 경기관찰부(京畿觀察府)로 바꾸어 수원으로 감영을 이전하였다. 1910년 경성부에 경기도가 편입되면서 감영은 광화문 옮겨졌다가 1967년 다시 수원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성준(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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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새롭게 만나는 경기도박물관〉

    기획 및 발간/ 경기도박물관, 중부일보

    원문 제공/ 중부일보(http://www.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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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밝히고 계승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박물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