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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28호 | 만나면 꽃이 핀다

지지봄봄 10주년,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렐프(Relph, 1976)는 일상생활을 경험하는 의미 깊은 중심으로 ‘장소’를 보았다. 장소에 대한 이미지는 추상적이거나 개념화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환경에 대한 개인의 경험과 의도로 형성된다고 했다. 당연하다. 생활 세계의 직접적 경험은 오직 장소에서 이루어지며, 마을이라는 장소는 관계와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내 삶의 근간인 신당동 달동네는 후지고 못났다. 매일 깎아지른 허연 시멘트 맨바닥 길을 족히 4~50분은 걸어올라 다녔다. 여름이면 더 곤욕이었다. 시멘트 바닥의 열기를 온몸으로 다 받아 안아야 했고 겨울에는 무릎까지 올라온 눈 위를 허우적댔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나는 골목길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고무줄놀이, 다방구, 숨바꼭질을 하며 하루해가 모자라게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지금의 감성을 이루는 8할은 그때 만들어진 것 같다. 다소 힘겨운 공간이라 할 수 있어도, 그 물리적 환경을 걷어 내고 보면 신당동은 지금 감성의 8할을 차지할 정도로 의미 있는 장소였다. 요즘도 골목길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 길의 끝을 보고 만다.


투안(Tuan, 1977)은 공간은 추상적, 물리적, 기능적 성격을 지니는 반면 장소는 구체적, 해석적, 미학적 성격을 지닌다고 했다. 어떤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과 기억, 기대, 꿈 등을 바탕으로 그 공간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면 그곳이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장소에 대한 개인적 사유와 감정이 녹아들며 유대감이 형성되고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마치 나와 신당동처럼 말이다.


신당동 말고 나를 이루었던 장소가 또 어디일까 고민하다 오륙 년 전 설악면이 떠올랐다.


설악면 청평중학교는 차 없는 뚜벅이는 찾아가기 어렵다. 당시만 해도 대중교통이 새벽, 아침, 점심, 저녁 고작 4번이 허다했다. 시골 마을이 그렇듯 설악면도 조용한 마을이었다. 여느 농촌 마을처럼 땅 한 평 놀리는 법이 없다. 고추든 파든 깻잎이든, 빈 땅에는 뭐든 심겨져 있는 바지런한 마을이었다. 이름 모를 앉은뱅이 꽃들이 길가에 가득하고 하염없이 높고 맑은 하늘은 청평중학교 정문과 잘 어울렸다.


이렇게 예쁜 마을 이면에는 다양한 가족사가 숨겨져 있다. 일흔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뻘 아버지와 필리핀에서 시집 온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 한국말을 전혀 못 하는 일본인 엄마 혹은 아빠와 사는 아이들. 가족 구성이 다양할수록 중학생인 사춘기 아이들의 가족에 대한 기준은 복잡하지만 주변 친구들이 비슷한 가정환경이라 가족의 다양성에 관대했다.



이런 이유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접했을 때 우려했던 이질감은 거의 없었다. 비슷한 환경의 아이들은 이미 부모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고 같은 중학교에 다니며 일상을 나누는 친구들이었다. 올곧이 대한민국 국적의 부모를 둔 나만 문밖에서 지나친 우려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이미 설악면 친구들에게 다문화는 문제되지 않았다. 다만 부모와는 다르지만 완전히 다르다곤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에는 한계가 드러났다.


트위거-로스와 우젤(Twigger-Ross and Uzzell, 1996)은 개인의 정체성은 장소와 관련이 깊으며, 장소는 고유성, 차별성, 자기만족, 자기 효능감을 주기 때문에 정체성의 한 부분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석환(1998)은 장소와 내가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 장소나 타인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의미에 영향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지역 사회의 공동체성을 기반으로 지역감을 향상시키는 등 장소는 인간으로부터 장소 자체의 정체성에 영향을 받고 우리는 장소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청평중학교 친구들과 어려운 환경의 가정에 도배와 장판을 교체해 주는 수업을 진행했다. 그때 아이들에게 어려운 환경의 가정을 선정해 우리가 직접 도배와 장판 등 집수리를 해 주자고 제안했다. 당황해하며 난감해하던 아이들 중, 성훈이가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별거 아니야, 할 수 있어.”


두 집이 선정되었다. 얼마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사시는 할머니 집과 예순이 넘고 장애를 갖고 있는 아저씨 집이 그거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 집은 안방에 담배 자국으로 빼곡하다. 담배를 좋아하시는 할아버지의 작품이란다. 그 집은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장애를 갖고 있는 아저씨 집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인 딸내미 방이 구들이 성한 곳 없이 다 깨져 있어 난방이 전혀 되지 않았다. 화장실은 겨울이면 꽝꽝 얼어 물이 내려가지 않았고, 화장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세탁기도 얼어서 전혀 작동하지 않아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무대야에 깨진 구들을 한나절은 날랐다. 한쪽에서는 화장실 난방을 위해 보온재로 마감하는 작업이 한창이었고, 녹슨 대문은 새롭게 페인트가 칠해졌다.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오후 6시가 되어서야 얼추 작업이 마무리되었으니 나름 큰 공사는 큰 공사였다. 아이들의 얼굴에 뿌듯함이 한껏 배어 나온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가득 찼다. 아이들은 마을을 위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힘들었기에 가치와 의미가 더 컸다고 본다.


아이들은 이제 설악면에 이야기가 생겼다. 이 과정 전까지만 해도 도배를 직접 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않았던 아이들은 이제 도배 정도는 직접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는 설악면이라는 공간이 아이들에게 장소로 전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일상생활 중 의미의 중심에서 직접 경험한 사실, 행위가 무의미한 물리적 공간이 친밀한 장소로 재정립되는 순간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설악면에 대한 정서적 혹은 감정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고, 더불어 이 감정적 유대감은 함께했던 친구들과의 결속과 자신에 대한 자존감 향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문득 골목길을 보면 신당동 골목에서의 놀이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멈추던 것처럼, 아이들도 고무대야를 보고 그날의 고되지만 즐거웠던 하루를 떠올릴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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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진 '지지봄봄'/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 2012년부터 발 행하고 있습니다. ‘지지봄봄’은 경기도의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가까이 바라보며 찌릿찌릿 세상을 향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이라면 어디든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다양한 삶과 배움의 이야기와 그 안에 감춰진 의미를 문화, 예술, 교육, 생태, 사회, 마을을 횡단하면서 드러내고 축복하고 지지하며 공유하는 문화예술교육 비평 웹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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