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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28호 | 농부와 시인은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지지봄봄 10주년,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농부와 시인에게 공통으로 닥친 위기


밤을 딴다. 올해는 밤도 졌다. 해마다 추석 즈음이면 집 뒤쪽 밭으로 떨어진 밤을 줍는데, 올해는 주워도 주워도 무슨 밤이 죄다 벌레 먹어 성한 게 하나도 없다. 내가 사는 강원도 내륙 산촌 마을은 겨울평균 기온이 신의주하고 비슷하다는 곳이다. 겨울이면 꽁꽁 언 강을 걸어서 건너는데, 작년 겨울엔 강도 얼지 않고 눈도 오지 않았다. 따뜻한 겨울을 지내며 노인들 눈에 걱정이 어렸는데, 걱정대로 병충해가 왔다. 블루베리 농사도 망했고, 대추 농사도 망했는데, 하다못해 그냥 줍던 밤도 올해는 건질 게 없다. 그 전해는 오월까지 눈이 왔고, 꽃핀 채로 나무가 얼어버렸다. 도시를 떠나 죽기 전에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자고 농사를 시작했는데, 우리의 농사는 해마다 열탕과 냉탕을 오가며 망하고 있다. 이 위기는 우리만의 것일까?


오늘날 농부에게 닥친 위기는 시인에게 닥친 위기이기도 하다. 농민과 시인은 오늘날의 직업적 세계에서는 가장 멀리 있는 직군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농민과 시인은 근본적으로 ‘짓는 사람(poetes)’의 원형이다. 기후위기는 이 ‘지음’에 닥친 위기다. 사람들은 생태위기가 농민에게 직접적인 위기라는 사실은 잘 알지만 그것이 시인에게도 위기라는 것은 잘 모른다. 시인 자신도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시인이란 단지 시를 쓰는 시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글로 세계를 짓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넓은 의미에서의 예술가를 모두 포함한다. 농부와 시인에게 공통으로 닥친 위기는 대지를 잃으면서 생기는 ‘감각 상실’의 위기다. 농민과 시인의 공통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멀어져있다.


농민은 농사를 짓고, 시인은 시를 짓는다. 하지만 농민의 끝없는 반복과 시인의 불시의 창조는 다른 시간성에 기초한다. 농작(農作)과 시작(詩作)은 없던 것을 있게 하는 일이지만 보통 농사에서는 시적 창조와 같은 불시의 도약이 있을 수 없다. 농민의 끈질긴 시간과 그 시간의 축적이 만드는 질서의 반대편에서, 시는 낯선 시간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밭둑에 핀 하얀 개망초가 세상을 뒤덮어버리길 시인이 꿈꾸는 동안 농부는 개망초를 자르려고 낫을 든다. 첫 해에 나는 개망초를 사랑하는 시인이었는데, 5년차인 지금은 낫을 든다. 이렇게 보면 시심(詩心)과 농심(農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도 싶다.


하지만 존 버거는 말년의 생을 보낸 알프스의 산촌에서 농부로 사는 동안 가장 아름다운 글을 지어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구축한 양식을 파괴하며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작가를 ‘말년의 양식’을 가진 작가로 칭하며 최고의 헌사를 바쳤는데, 그런 ‘말년의 양식’을 존 버거에게 갖게 해준 것은 마지막에 그가 만난 자연과 이웃 농민들이었다. 존 버거의 말년의 작업은 삶과 노동과 예술의 연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소농-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1)에서 쓰노 유킨도는 농업경관의 미적 근원이 농민의 노동에 있음을 말한다. 전란에 산하가 황폐해지면 시인도 그 아픔을 노래하지만, “길옆에 무성하게 자란 풀숲, 오물에 파묻힌 돌, 농지에 흩어진 쓰레기”처럼 여행자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것도 거기에 사는 농부의 눈에는 “견딜 수 없는 추함으로” 비치는 것이다. 잘 정돈된 밭과 잘 자란 곡물과 과실들에서 농민들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 추구한다. 그 아름다움은 노동의 성과 속에 형성된 것이다. 논밭이 만들어내는 경관의 아름다움은 정성과 돌봄이 들어갔다는 징표이며 땀과 사랑의 흔적이다. 소농이 땅에 대해 맺는 관계와 달리, 효율성을 척도로 생산량을 폭력적으로 닦달하는 ‘기계화’와 ‘기업농’은 대지와의 그런 아름다움의 관계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기계화는 오히려 농업경관도 후퇴시킨다고 쓰노 유킨도는 말한다.



감각의 말소에 저항하는 농부와 시인의 연대


어째서 기계농과 기업농은 농민의 기술과 예술을 망가뜨리는 것인가? 권정생 선생님도 생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제초제가 처음 농촌에 들어왔을 때는, 눈앞에서 풀이 말라 죽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는 농민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해를 거듭하다 보면 나중에는 제초제가 표준이고 관행이 된다. 풀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모습이 괴로워 소주를 마시던 농민들도 나중에는 점차 무감각해진다. 농약에는 농업지원금이 있지만 풀 베는 노동에는 지원금이 없으니 농민만 탓할 수도 없다. 약이나 기계는 풀과 벌레를 손 안대고 깔끔하게 죽이는 기술이다. 그런 기술에 의존할수록 대지의 생명에 대한 감각은 멀어진다. 비행기에서 농약을 살포하면 벌레만 아니라 그 밑의 사람도 안 보이는 것이다.


감각의 추상화는 거리와 속도에 비례한다. 도시에서는 이 감각적 추상화가 극단화되어 있다. 생명을 살리는 일도 죽이는 일도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똑같은 풍경이 끝없이 반복되는 도시 안에서는 오염이 정화되지 못하고 외부화될 뿐이다. 더러운 것들이 추방된 공간은 예쁘고 세련된 인공미로 채워진다. 돼지의 비명도 들리지 않고 강물의 악취도 맡을 수 없는 곳에는 ‘즐거운 소비’의 감각만 남는다. 겨울이면 난방이 여름에는 에어컨이 사시사철 똑같은 온도를 유지해주고 전철역 어디서나 똑같은 ‘롯데리아, 파리바게뜨, 배스킨라빈스’를 만나는 평균성과 획일성이 지루해진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감각을 찾아 자연을 헤매거나 인터넷을 헤맨다. 감각의 말소에 저항하고 살아있는 생명 감각을 회복하는 일은 오늘날 예술교육이 대응해야 할 가장 절박한 문제다.


나는 시골에 와서 살면서 어린 시절의 노래들을 다시 떠올리며 부르고 있다. 도시에선 부를 일이 없던 노래,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는, 보고 듣고 있는 풍경들과 완벽히 일치해서 종종 놀라곤 했다. 어느 날 봄에 아이가 말했다. “엄마, 그 노래가 ‘진짜’였어!” “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봐봐, 그렇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어떤 날은 높은 산마루에 “산 할아버지가 구름 모자 쓴” 모습을 보기도 했다. 더운 날 밭에서 일할 때는 왜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인지 절로 알게 된다. 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 꽃이, 그 바람이, 해마다 피고 날마다 부는 데도 늘 다르다.


그런데 시골에서도 이런 풍경이 점점 사라져 간다. 울긋불긋 맘대로 피는 꽃 대신 똑같은 야생화가 집집마다 줄맞춰 심어지고, 산 할아버지 머리 위로는 구름 모자를 뚫고 송전탑과 전신주가 지나간다. 산 위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새로 지은 건물에 길이 막힌다. 이게 다 농촌 살린다는 대책으로 나온 것이다. 농사로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니 ‘돈 되는’ 농사만 대안이 된다. 농사는 돈이 안 되니 체험관광을 하라고 하고, 농사는 돈이 안 되니 곡물을 심어온 논밭에 꽃을 심고 환금성 작물을 심으라 한다. 요즘은 숲과 들판 사이에 곰팡이처럼 검은 밭이 여기저기 늘어간다. 번져가는 검은 색은 인삼밭의 검은 차양과 전기밭의 태양광 패널이다. 농업 생산의 에너지를 태양에서 전기로 바꾸었던 하우스 농업은 저렴한 외국인 노동자와 저렴한 전력에 의존한 전자동화 시스템으로 변해가더니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농촌 전체가 ‘스마트팜’이 되어야 한단다. 전환이 일어날 때마다 소농은 사라지고 농기업 중심으로 농업 생산 체제가 재편된다. 이런 농업은 농민의 마음에서 자연에 대한 사랑과 노동에 대한 자긍심과 시의 마음을 거두어 간다.



H2O와 생명의 물


대학에서 ‘대안사회 구상하기’라는 과목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물의 대안, 불의 대안, 공기의 대안, 흙의 대안 등을 주제로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수업이었다. 물을 주제로 한 팀이 계속 방향을 못 잡고 헤맸다. 왜 그런지 보니 ‘물의 위기’라는 것을 실감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수도만 틀면 물이 콸콸 나오는 세상에서 평생을 살았으니 ‘가뭄’이란 단어가 이들에겐 추상 명사였다. 비가 오지 않는다는 일기예보는 놀러가기 좋은 날이란 뜻이었다. 일부 학생들은 계속 물의 위기는 없다고 말했다. 지구에는 물이 아주 많기 때문이란다. 물 부족이 아니라 수질오염과 식수 부족이 문제고, 결국 그건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단골메뉴처럼 제시하는 대안은 공기 중의 수소와 산소를 포집하여 H20를 만드는 기술이라든가,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해수담수화 같은 기술적 대안들이다. 강이 오염되면 공기 중의 수소와 산소를 포집하면 되고, 지하수가 고갈되면 바닷물을 퍼 올리면 된다. 걱정할 게 무엇인가? 우리에겐 돈도 있고 기술도 있는데. 과연 그럴까? 내가 물었다. “수만 명에게 식수를 공급한다는 그 해수담수설비는 무엇으로 돌아가나요?” “전기요.” 학생들이 대답한다. “그럼 전기가 멈추면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전기가 멈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전기가 멈추면, 바닷물을 마시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그래서 해수담수설비만 아니라 원전도 함께 수출했죠.” 그러면 또 핵발전소는 안전한가? 물을 생산하기 위해 핵 발전을 하는 문명은 정상이 아니다.


그들에게 ‘물’은 무엇이었을까? 알고 싶었다. 물을 어떻게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 각자 물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한 번 그려보기로 했다. 학생들이 그린 물은 수돗물, 생수병, 물컵, 수영장, 바닷가 등이었다. 도시에서 상상할 수 있는 물이 대략 그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특히 기억에 남는 그림이 있다. ‘물 한 방울’을 그린 그림이었다. 물 아껴 쓰기 포스터에 나오는 것 같은 ‘한 방울의 물.’ 실제 삶에서 그런 물을 본 적이 있는가? 하지만 물 한 방울을 그린 학생들은 의외로 많았다. 수소와 산소를 결합한 H2O, 그것이 물의 근원이었다. 물을 분자로 표상한다는 것은 그만큼 고립된 원자와 개인의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의미다.


나중에, 내가 사는 시골 마을 강의에서, 나는 똑같이 물 그림을 부탁한 적이 있다. 할머니들의 그림에서 물은 샘물, 시냇물, 강물, 우물, 저수지 등으로 나타났다. 모두 ‘우리 집에, 우리 동네에, 나 어렸을 적에’와 같은 구체적인 삶의 장소와 사연을 가진 물이었다. 그래서 그림에는 물과 함께 집이 나오고, 숲이 나오고, 사람이 나왔다. 아무도 한 방울의 물 같은 것은 그리지 않았다. 그 중에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샘물가에 여러 동물들을 그려 넣은 할머니의 그림. 물을 그리라는데 왜 이렇게 동물을 잔뜩 그렸냐고 주위에서 핀잔하듯 물으니, “짐승들이 물 먹을 때가 제일 좋더라고, 봐 얼마나 이뻐!”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마치 정말로 살아있는 소며 돼지며 닭이며, 참새와 개구리를 보듯이, 그림 속의 짐승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먹어라 많이 먹어, 시원하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소금물에서 H2O와 NaCl을 분리해 해수로 담수를 만들자던 기술의 신화는 오늘날 기후담론에서도 탄소포집술로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자는 기술주의적 탈탄소론에서도 나타난다. 공기 중의 수소와 산소를 포집해서 물을 만드는 기술이나 공기에서 이산화탄소만 분리해내는 탄소포집 기술이나 모두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효율성과 유용성은 있을지 몰라도 생명에 대한 감각이 없다.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감각의 부재는 예술에서 대지로부터의 힘을 박탈하고 마침내 고사시킬 것이다.


우리가 씨앗이니까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2)란 책에서 생태주의 운동과 문화예술 운동을 잇는 놀라운 물음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에게 석유문학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이다. 유럽에서 석탄은 문명과 문학의 중요한 소재로, ‘석탄문학’으로 불릴만한 계보를 갖고 있다. 우리 역시 석탄에서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 같은 ‘작품’을 연상할 수 있고, 연탄을 소재로 쓴 시도 떠올릴 수 있다. 광부들의 파업이 나오는 런던 프라이드 같은 영화나, 사북항쟁 같은 정치적 사건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석유로부터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가. 롭 닉슨은 묻는다. 왜 석유에서는 문학이 나오지 않는 것인가. 석유문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석유문학은 비서구 지역에서 나타난다.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석유에 대한 감각을 갖지 못한 것은 석탄과 달리 채굴지가 유럽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석탄에서는 노동자의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만 석유에 뭍은 피 냄새는 맡을 수 없었다. 감각의 상실은 결국 예술의 종언으로 귀결된다. 이 책은 환경파괴와 기후위기를 식민주의적 세계체제가 만든 느린 폭력으로 해석하고, 이 폭력에 가담하지 말고 저항할 것을 작가들에게 호소한다. 민중예술, 하위문화, 지역문화가 사라진 곳에서는 허공에 뜬 부유하는 예술과 부르주아적 취향과 취미를 만족시키는 소비주의 형식주의만 살아남았다. 농사도 예술도 ‘돈이 되는’ 것만 살아남는다. 농부가 농사를 짓지 못하는 곳에선 시인도 노래를 짓지 못한다. 자본의 환금상품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농부와 시인의 생태주의적 연대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귀촌하여 살면서 밭농사 말고 지어온 농사가 하나 더 있다. 책농사다. 동네 주민들과 함께 5년 째 책읽기모임을 하고 있다. ‘자치와 자급 공부모임’, 줄여서 우리가 ‘자자 모임’이라 부르는 이 작은 모임의 사람들은 토종 씨앗 지키기도 하고, 작은 도서관 살리기도 하고, 강을 지키는 시민 감시단도 하고, 지역 의료 실태조사도 하고, 이주여성 상담도 한다. 뭘 해야 할 지 몰라서 모였는데, 함께 책을 읽고 경험과 고민을 나누면서 서로가 서로의 선생님이 되고, 길잡이가 되었다. 작은 풀씨들이 부둥켜안고 자라는 것만 같다. 지구가 망하는데 8년 남았다고 과학의 시간이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다른 시간을 알고 있다. ‘씨앗의 시간’이다. 씨앗은 자신의 시간을 생성한다. 우리는 우리가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가 지금 쌓고 있는 지식과 관계가 지구에 남겨야할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녹아내리는 지구에서 희망이 있다면 그건 기후관리학이나 지구공학 같은 거대 과학기술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심고 있는 씨앗이다. 우리는 생명의 힘을 믿는다. 그 씨앗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저항이고 예술이다. 자연농과 순환경제를 지키려는 소농의 기술이 농민의 저항이라면, 글 짓는 사람은 어떤 글로 여기에 응답해야 할지, 나의 글농사는 늘 이 씨앗의 물음 앞에 선다.





1) 쓰노 유킨도 지음 『소농-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성삼경 옮김, 녹색평론사 1991.

2) 롭 닉슨 지음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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