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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29호 | 미적 공화국에 관한 엽서

지지봄봄 10주년,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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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우리가 문화예술교육의 현실상황에 대해 대화하다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적공화국 개념에 대해서도 살짝 논의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는 실러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그렇지만 ‘미적 공화국의 건설이라니!’ 과연 대담하기는 하다는 의견을 교환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실러의 [미학편지-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에 나타난 이념들이 제법 실감을 갖추고 생기를 띠는 형상들로 드러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실러가 품고 있는 <미적 공화국>에 대한 생각 중 주요한 테제들 몇 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아마 이 엽서가 이후의 만남과 대화를 위한 즐거운 계기가 되리라 희망해봅니다.


무엇보다 다소 충격적으로 와 닿는 것은 고귀한 도덕세계와 이해타산이 지배하는 감각적인 현실세계의 분리를 아름다움을 통해 매개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실러에게 아름다움 혹은 아름다운 상태는 ‘놀이충동’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홉스가 말했던 <자연상태>에서 <시민상태>로의 전이가 이성에 의한 계약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놀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는 열다섯 번째 편지에서 “인간은 놀이하는 한에서만 온전한 인간이다”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이 테제는 우리의 예술교육과도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어서 좀 더 깊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먼저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그 말의 의미에서 아무래도 훈육적 냄새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실러 또한 ‘미적 교육’에서 교육을 ‘형성하기’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훈육적인 것과 형성하는 것은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훈육적인 것은 이미 강제하는 것이자 지배적인 것, 혹은 위의 세계와 아래 세계의 분리에 기초한 것입니다. 인류의 오래된 위계화의 질서지요.


하지만 ‘형성하기’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정된 분리의 선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아래에서부터 위의 세계로의 고양을 지향합니다. 위계로서의 위/아래가 아니라, 자기향유로서의 위, 고양된 상태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형성하기로서의 교육이란, 어떤 고정되지 않은 것, [특성없는 남자]의 주인공 울리히가 기꺼이 거주하고자 하는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 두 팔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성이란 우리 삶에 드리워진 어떤 반-그림자의 여운들입니다. “실현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것들, 혹은 실현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어떤 것들” 말이죠. 그러니 미리 본보기로 고정화시켜서, 그것을 따르게 하는 것은 여기서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실러가 ‘고귀함’을 단순 교육으로는 주입조차도 안 된다고 보는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훈육적인 강제’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는 ‘꼰대’ 짓이거나 ‘갑질’밖에 안 된다는 것이지요. 실러가 프랑스혁명에 열광하다가 실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이념으로서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공화국을 새롭게 건설하자는 ‘고귀한’ 주장조차도 또 다시 폭력과 대립으로 점철된 강제적 공포정치로 이어지고 있음을 목도했으니까요.



프랑스 혁명의 긴박한 메아리 속에서, 실러는 매우 고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류가 열어놓은 위대한 이상의 공간 속에서 그는 어떻게 훈육적이거나 권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민중들을 저 높은 곳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고민은 19세기, 20세기를 지나서 단지 ‘거대서사’일 뿐이라고만 치부할 게 아니라 여전히 ‘문제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가 미적 공화국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시간이 오고 있고 있습니다. 이는 미셸 푸코의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어떻게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지배받고 통치받지 않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공명하고 있는 듯 보이네요. 그럼 미적 교육으로서 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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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에 앞서 베두인이라는 유목민 민족에서 내려오는 우화를 먼저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어느 신중하고 고귀한 품성의 아버지가 어느 날 생을 마쳤고, 세 형제에게 유언장이 남겨집니다.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전 재산인 11마리의 낙타를 삼 형제가 나눠 갖는데, 큰 아들에게는 반을, 둘째에게는 사분의 일을, 셋째에게는 육분의 일을 나눠가지도록 명한 것이죠. 문제의 세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깊이 존중하며 그 숨은 뜻을 찾으려 하지만 쉽게 해결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나눌 것인가?” 참으로 문제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큰 아들이 5마리, 둘째가 2마리, 막내는 1마리를 최소 가질 수 있으며, 나머지 3마리는 죽여서 나누던가 해야 하는 골치 아픈 상황인 거죠.


그래서 그들은 힘든 문제가 있으면 늘 찾아가는 마을의 한 현자를 만나 자문을 구하기로 합니다. 현자가 말하기를: “나는 그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서 어떤 자문의 말도 줄 수가 없네. 그러니 어떤 말도 기대하지 말게.” 형제들은 낙담해 떠나려 합니다. 그때 현자가 말합니다. “다만, 마침 나에게 늙고 병든 낙타가 한 마리 있다네. 그것을 자네들에게 주겠네!” 그리하여 세 아들은 12번째 낙타를 얻게 되어, 첫째는 6마리의 낙타를, 둘째는 3마리의 낙타를, 막내는 2마리의 낙타를 얻게 됩니다. 그럼 그 현자가 ‘증여’한 말은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도 다시 현자의 것으로 남습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보통 우리는 유산을 정해진 수학적 기준에 따라 나누려 합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나누기 위해서 라도 낙타 일부는 죽임을 당해야만 합니다. 그리스적인 비례의 정의라면 비율대로 그대로 나눴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나눔의 문제에서 기준은 아직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나눌 것인가?' 혹은 '어떻게 더 좋게 나눌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물음이 던져지고, 어떤 문제-해결의 장(場)의 열리게 되는 것이죠. 형제들은 서로가 아버지의 유언이 그냥 수학적으로만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즉 이미 알려진 고정된 공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죠. 현자 또한 어떤 해석의 말들을 건네면서 지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마리의 늙고 병든 낙타만을 가져가라고 했을 뿐이죠. 그것은 결국 ‘살아있는’ 낙타 3마리를 살게 하며, 각 형제에게 한 마리씩 ‘더’ 배분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여기서 12번째 낙타는 그 자신이 어떤 배분에도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해주는 가상의 위치만을 임시적으로 가질 뿐이죠.


이러한 것이 고정화된 본보기처럼 보이는 상황을 중지하고, 문제화하는 것, 그리고 결정되지 않은 새로운 해결의 장을 열고, 그것을 탐색하는 것의 작은 사례라고 봅니다. 한 마디로 놀이죠. 놀이는 새로운 가능성의 장을 만드는 데서 성립합니다. 결국 미적교육은 이런저런 상황들에서 '현자되기 ' 혹은 '12번째의 낙타되기' 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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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우화에서 비례적 정의라는 공리로 배분을 했다면 몇몇 낙타의 죽음은 불가피했습니다. 유목민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낙타 세 마리가 죽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일반화해보면 그것은 <강요되는 벨(V)의 논리>라 말할 수 있습니다. 벨(V)은 라틴어로 ‘또는’이라는 뜻으로 보통 이접의 논리라 합니다. 단순한 선택일 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라면을 먹거나 ‘또는’ 스파게티를 먹거나 말입니다. 왼쪽으로 가거나 ‘또는’ 오른쪽으로 가거나 문제가 되지 않듯이 말이죠. 하지만 ‘강요되는’ 이접, 선택의 경우는 다릅니다.


거기엔 어떤 통합의 가능성들이 조여지고 조여져 결국 사라집니다. 그래서 삶이냐 죽음이냐? 라는 대립적 질문만이 남고, 낙타의 죽음은 불가피해집니다. 어떤 풍요의 영역에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 벨의 논리입니다. 자크 라캉의 예를 들면, 한 여행자가 강도를 만나게 되고, “죽을래, 돈을 줄래?”라고 하는 상황이죠. 여행자는 결국 생명을 부지하고, 돈은 강탈당할 테죠. 그리하여 ‘삶과 돈’이 공존하던 상황에서 삶과 돈이 분리되어 양자 중의 택일을 해야만 하는 벨의 논리가 작동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우리를 몰고 가는 벨의 논리가 많이 작동되고 있습니다. 취업공부냐, 여행이냐? 성장이냐, 환경보호냐? 승자인가, 패자인가? …. 아마도 이것이 실러가 보는 감각충동에 사로잡힌 인간의 세계일 것입니다. ‘근심’과 ‘두려움’만이 지배적인 정서로 군림하는 현실세계이죠. 그래서 상상적 비약을 허용하는, 놀이의 논리가 필요합니다. 실러가 말하듯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어떤 강요도 받지 않는 모든 것”이 놀이이니까요. 친구였던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멋진 농담’이나 위트를 강조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죠. 이러한 놀이의 미학은 인류세라는 항시적 위기의 시대에 인류의 자기 자신되기와 관련해 더더욱 필요한 접근법이라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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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교육에서 사용되는 색채, 소리, 형태, 몸짓, 맛, 말과 글 모두가 고정된 본보기에 종속되느냐, 아니면 자유로운 유희가 허용되느냐에 그 성공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인공지능과 네트워크로 무장되어 전 방위적으로 강요되는 벨의 논리를 멈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적 교육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 혹은 태곳적의 잃어버린 어떤 것으로 나타나지만 여전히 그림자의 여운으로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일깨워야 하겠죠. 그것은 이미 분리된 감각 아래에 생명 자체와도 같이 꿈틀거리는 원초적 지각이거나 ‘느낌’입니다. 놀이충동은 바로 이러한 느낌의 지대에서 출발합니다. 그곳은 어빈 슈트라우스가 놀라울 정도로 명쾌하게 지적했듯이 ‘세계와 나’가 동시에 생성하는 자리입니다. “느낌에서 자아와 세계는 느끼는 주체를 위해 동시적으로 펼쳐진다. 느끼는 존재는 그 자신과 세계, 세계 내의 그 자신, 그리고 세계와 함께하는 그 자신을 경험한다.”


놀이는 고정화된 재현적 지각을 거부합니다. 놀이에는 하나의 에포케, 정지가 있습니다.


시인 백무산이 「정지의 힘」이라 노래하죠.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영직은 이 시를 논하면서 ‘자동사’의 사용에 주목합니다. 달리다, 가다, 알다, 되다, 피어나다 등 “스스로 내켜서 움직이는 능동사” 말이죠. 이는 놀이의 논리의 정수를 빼어나게 간파한 통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동사의 세계는 능동과 수동, 가해와 피해. 궁극적으로 강요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경계 ‘너머’에 있는 서로가 서로의 자발성을 촉발하는 영역이니까요. 그것은 자기-능동의 영역, 주인되기의 영역입니다. 형성하다는 이미 무언가 다른 것들, 타자들과의 더불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프리드리히 실러가 [미학편지]에서 말했듯, “인간은 사물이 자신의 마음에 든다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가진 것’을 통해서,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 말이지요.” 궁극적으로 미적 교육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모험입니다.


하지만 자기-자신-되기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더불어-있음의 존재론적 연결망에서 벨의 논리를 뛰어넘어 진정한 하나의 함께-하기, 우리-되기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두아르도 콘이 [숲은 생각한다]에서 주장했던 우리-되기, 아마존 인디언 언어로 ‘아무’되기입니다. 촛불의 광장이 보여준 것은 일종의 거대한 놀이였습니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그것이 만들어 내는 그 자리는 어떤 강제적 구조도 없는 자동사의 공간이며, 자기유희의 공간이죠. 즉 자발의 공간입니다. 미적 공화국이죠.


마지막으로 사무엘 베케트가 [최악을 향하여]에서 특유한 간소화 스타일로, 눈부시게 표현한 한 대목을 음미하며 엽서를 접을까 합니다. 여기엔 ‘붙잡고-붙잡히기’의 식별 불가능한 오고감 속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자동사화’ 혹은 ‘자기 능동화’라는 사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손에 손잡고 같은 걸음으로 그들은 꾸준히 나아감. 빈손에-아니. 아무것도 없는 빈손에. 등 돌리고 둘 다 등 굽히고 같은 걸음으로 그들은 나아감. 아이는 붙잡는 손에 닿으려 손 들어 올리고, 늙은 붙잡는 손 붙잡기. 붙잡고 붙잡히기. 꾸준히 나아가며 결코 물러서지 않음. 느리지만 천천히 쉬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며 결코 물러서지 않음. 뒤돌아서. 둘 다 등 굽히고, 붙잡고 붙잡힌 손들로 서로 이어져. 하나로 계속 꾸준히 나아가기. 한 그림자. 또 다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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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진 '지지봄봄'/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 2012년부터 발행하고 있습니다. ‘지지봄봄’은 경기도의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가까이 바라보며 찌릿찌릿 세상을 향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이라면 어디든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다양한 삶과 배움의 이야기와 그 안에 감춰진 의미를 문화, 예술, 교육, 생태, 사회, 마을을 횡단하면서 드러내고 축복하고 지지하며 공유하는 문화예술교육 비평 웹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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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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