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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남편이 쓴 묘지석의 주인공, 염경애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성 이름 없던 시대, 남편이 남긴 이름


남편이 쓴 묘지석의 주인공, 염경애



옛 여성에 대한 기록은 매우 드문데, 그나마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에도 이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백제 때의 도미 부인 역시 이름이 없다. 도미는 남편의 이름이고, 그의 부인이라는 의미에서 도미 부인으로 부르고 있다.


고려시대 여성들도 사회적으로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만 존재하였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성씨로만 불렸다.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지위에 따라 군·대부인이나 현·군과 같은 봉작호를 가지게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 여성들도 이름을 쓰지 않고 사임당이나 난설헌, 윤지당, 정일당과 같이 당호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책 『경기도 여성 인물(2019 간행)』은 여성의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 데 대해 “전근대가 남성 중심 사회로 이뤄지다 보니 여성의 이름이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고려시대 봉성현군 염경애는 그 이름이 기록돼 내려오는 몇 안 되는 여성이다. 남편이 아내의 묘지명을 직접 썼기 때문이다. 남편이 쓴 묘지명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 염경애 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개경의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난 봉성현군 염경애는 25세에 수원의 향리 집안 자제 최루백과 혼인하였다. 염경애는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는 것은 물론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제사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남편의 내조를 지극 정성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없는 살림에 의식주를 해결하고 4남 2녀, 6남매의 가정교육을 책임졌다. 염경애는 47세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염경애는 훌륭한 아내, 며느리, 어머니의 역할을 다한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


남편 최루백은 “황통 6년 병인년(1146년, 고려 인종 24) 정월 28일 무술일에 한남 최루백(崔婁伯)의 처 봉성현군(峯城縣君) 염씨(廉氏, 1100〜1146)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시작하는 묘지석에서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해 애통하다”며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전했다.


▲ 염경애의 남편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효자각. 현재 화강암 정려비는 조선 숙종 때 세워졌다. 화성 향토문화재 2호로 지정돼 있다. (사진 = 『화성시 문화재 편람』)


여기서 남편은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로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이고,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宜寧郡大夫人) 심씨(沈氏)”라며 아내의 이름을 적시하고 있다.


염경애는 남편이 패주(전남 보성)와 중원(충북 충주)에 수령으로 나갔을 때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함께 천 리 길을 쫓아가 아내의 역할을 다 했다. 또 남편이 군사에 종사할 때에는 가난하고 추운 규방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냈다. 내시(內侍)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있는 것 없는 것을 따지지 않고 음식을 해 보냈다고 한다. 남편은 아내를 회고하며 “무릇 나를 쫓아 어려움을 겪은 23년간의 일들은 다 적을 수가 없다”고 적었다.


남편은 부인이 “그대는 독서하는 분이니, 다른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집안의 의복이나 식량을 주관하는 일을 맡았는데, 비록 여러 번 힘써 구하더라도 맘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설사 불행하게도 뒷날 내가 천한 목숨을 거두게 되고 그대가 후한 녹봉을 받아 모든 일이 뜻대로 되더라도, 제가 재주 없었다고 하지 마시고 가난을 막던 일은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한 일화를 전하면 “크게 탄식을 했다”고 밝혔다.


남편 최루백이 정7품 사직(司直)에서 정6품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승진하자 염경애는 “우리의 가난이 가시려나 봅니다.”라고 기뻐했는데 남편은 “간관은 녹이나 먹는 자리가 아니라”고 나무랐다고 한다. 그러자 염경애는 “문득 어느 날 당신이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쟁론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된다 할지라도 달갑게 여길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염경애에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역사 밖으로 나온 것은 남편이 묘지명을 직접 지었기 때문이다. ‘묘지’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뜻으로 무덤 속에 묻은 돌이나 도판에 그 일생을 새긴 들이다. 염경애가 살았던 고려시대에 묘지는 귀족과 승려들만의 전유물이었다고 한다. 현재 염경애의 묘지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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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여성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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