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31호 | [느긋한 우정] 낯선 오늘을 만나는 힘

한 발 벗어나기




플러스마이너스1도씨가 묻고, 스페이스 빔, 민운기가 대답하다.



인천의 작은 동네, 배다리에 내리니 오래된 시간의 냄새가 났다. 거대한 깡통 로봇에게 인사를 하고 들어간 곳은 '스페이스 빔'. 민운기 선생님께서 운영을 주도하시는 공간이다. 양조공장의 구석구석을 그대로 살린 이곳에는 먼지마저 전시되는 박물관 같았다. 탐정처럼 코끝을 킁킁거리며 공간에 빠져 있다가, 화들짝 발이 멈췄다. 온 시선이 멈춘 곳은 서재였다. 노랗게 빛바랜 미술사 서적부터 철학, 예술, 마을, 아직은 깨끗한 도시 관련 서적까지 책장에는 주제에 관련한 책들이 일목요연하게 꽂혀 있었다. 포스트잇으로 칸칸이 구분되어 마치 도서관에 온 듯했다. 한 사람을 통과해온 책의 흐름을 보니 그제야 민운기라는 사람에게 한 발짝 다가서게 된 것 같았다.


민운기 선생님은 서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인천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내 마주한 지역미술계의 관습은 견고했고 중앙의존적인 행태는 뿌리 깊었다. 그는 성큼 주변으로 나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작업을 해갔다. 인천의 문화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한 기록지 <시각>을 꾸준히 발행했고, 대안 전시 공간이자 일상적 공론의 장으로 <스페이스 빔>을 꾸려갔다. 현재는 도시 공간을 가로지르는 거대 논리에 맞서며 작은 동네 배다리의 면면을 살아내고 있다. 




<스페이스 빔> 공유 서재



발아되는 순간


‘스페이스 빔’에서 기획을 해 오신 지 19년이 되었어요. 그간의 시간을 되돌려 보았을 때, 주로 무엇을 작업으로 구상하고 발현했는지 궁금해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개념이 ‘반-기억’이라는 건데, ‘기억에 반하다’라는 들뢰즈의 개념이에요. 제대로 해석했는지 모르겠지만, 매번 이 개념을 되새기면서 ‘무엇을 하더라도 했던 것은 일단 잊어버리자. 다시 원점에서부터 마주하는 상황, 나를 둘러싼 제반 상황에 나를 열어 놓자’ 하고 있어요. 기존에 알고 있던 세상, 동네, 도시라고 해도, 나를 계속 열어두면 이것저것 정보가 들어오잖아요. 인지하고 있던 것과 새롭게 감각하는 것이 뒤섞이고요. 권력이 발동되는 상황에서는 분노하며 그 사안을 전파하기도 하고, 좋은 사례나 체험이 있으면 나누고 싶어서 제 방식대로 사진을 찍거나 글을 남기기도 해요. 그때그때 가능하고 걸맞은 표현, 언어와 표현 수단, 매체를 동원해서 같이 공유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더 굵직한 일이 필요하겠다 싶으면 기획으로 옮겨가기도 하는데요. 무조건 전시를 위한 전시, 기획을 위한 기획은 하고 싶지 않아요. 했던 것을 반복하기 싫어하는 습성이 있어서 체험하지 않았던 세계나 지점, 영역으로 자꾸 나아가고 모험하고 싶어요. 그래서 걸맞은 주제와 방법, 형식을 계속 고민해나가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탁 잡히는 경우가 있어요.



작업을 위한 사전 단계


평소에 동네 산책을 상당히 많이 하고 계신데요, 산책이 -기억을 위한 행위에도 도움이 될 것도 같은데, 산책하는 팁이 있나요?


산책하면 시각적인 쪽에 많은 것들이 들어오죠. 그 다음에 청각, 후각, 촉각적인 것. 오감이 발동되면서 제 안에 갖고 있던 것과 새롭게 들어오는 것이 부딪히고 버무려지면서 어떤 문제의식이 떠오르기도 하고, 경험으로 축적되기도 하고. 그것은 일정 거리를 두고 대상화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뒤섞이는 한 몸이라고 할까요. 물론 내면에서 충돌을 일으킬 수 있으니 힘들 수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즐기고 기꺼이 수용하는 편이고, 또 그런 태도를 취해요. 기존에 제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사고에 새롭게 들어오는 감각적 요소들을 기존의 잣대로 재단해버리면 변화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마주하게 되니까. 그렇게 계속 들여다보면 진짜 너무 멋있는 숨은 보석 같은 것들을 만나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 <아리랑다방> 전시도 했지만, 보기에 따라 흉하고 불편할 수도 있는 사물도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간


배다리 도시학교를 통해 9년째 다양한 사람들과 리서치 과정을 보내고 계셔요. 올해는 숭의공구상가를 집중해서 탐색하고 계시는데요. 참가자들과 만나기 전에 개인적으로는 어떤 준비 혹은 공부를 하시나요?


저는 기본적으로 참가자분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여지와 기회를 만들려고 해요. 보통 전시를 할 때 큐레이팅을 하면 주제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작가들을 선정하잖아요. 그 과정에는 선택과 배제가 따를 수밖에 없고 자칫 권력이 작동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리고 전문가 중심으로만 접근하면 일반 시민은 그들이 완성한 결과물만 보게 되지요. 그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저 역시 잘 알지 못하고 준비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 그렇지만 필요하고 관심 있는 주제를 던져요. 작가도, 주민도, 저도 공부하는 입장은 똑같은 거죠. ‘학습자로서 이러한 것들을 같이 해보면 어때요?’ 열어 놓고 같이 할 분을 모시는 거예요. 물론 과정이 좀 길고 까다로우니까, 참가자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들을 명시하고 끝까지 수행할 의사가 있는지 묻고요. 그리고 큰 틀과 대략적인 과정, 그 안에서의 단계를 같이 정해요. 물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모르죠. 내어 맡길 수밖에 없어요.




21’ 아리랑다방_ 민운기 기획의 변 中



숭의공구상가 리서치 과정



그러면 참가자들의 입장에서 어떤 변화와 성과가 있을까요? 기대와 달리 완고한 분들은 없나요?


그런 분들도 없지 않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주체가 있고,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는 한 부분이다’ 이런 정도만 판단해도 하나의 소득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일정 시간과 관계 속에 놓이면 기억이나 몸의 감각 속에 무언가 남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쩌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나 조건 때문에 그 정도밖에 발동되지 않는 거구나’ 생각하기도 해요. 전에 나눔가게 ‘돌고(庫)’를 운영하면서 개인 안에는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이 들어 있는데, 그것을 드러낼 기회를 우리 사회가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저는 직접 사람을 접촉하는 것보다, 그것이 가능한 상황을 만들려고 해요. 도로부지에다 텃밭을 가꾸고, 정자를 세우고 한 것도 이 공간을 활용하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죠.



선한 의지에서 시도했지만, 사건·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무책임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잖아요. 함께 시민이 되는 과정은 어떻게 보내세요? 철학아카데미도 하시고, 리빙랩을 통해 여러 주체와 토론하는 시간도 보내시는데, 서로 성장이 되나요?


사실 시민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고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이루어지면서 더불어 산다는 사고와 태도를 지니는 것이라고 보는데, 그 폭과 깊이가 저마다 다르죠.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서로 잘 맞지만 또 어떤 경우는 다투게 되는 일도 생기죠. 어떤 분은 조금만 자기 기준에서 허용이 안 되어도 가만히 있지 않고 상대방을 다그쳐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확인하며 지나친 환상을 안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철학스터디를 말씀하셨는데 다양한 분이 함께하고 있어요. 저마다 이 안에서 배우고 얘기 나눴던 것들을 각자의 활동 영역이나 일상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하겠죠? 요즘 소소한 담론의 장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잖아요? 사실 여기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자신을 열어 놓고 확장시키려고 오신 거니까 걱정이 안 되어요. 문제는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시키며 사시는 분들이죠. 동네에도 보면, 매번 같은 사람들끼리만 만나며 자기 확신을 하고 신념을 증폭해가는 골목 공동체가 있어요.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려고 하기보다는 관성화 된 것들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자리를 여는 공동의 작업자로서 얼만큼 개입해야 할지 고민이 꽤 되어요."


열어주는 만큼 새로운 것들이 들어갈 수 있겠죠. 제가 열어놓는 만큼 들어올 거고요. 문제는 그게 억지로 안 된다는 것이죠. 사람이 쉽게 안 변해요. 직접적인 것보다는 좀 더 다차원적으로 공감과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방법 마련과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봐요.



모두를 향한 이야기, 나를 위한 기록


<시각>지를 97년부터 재작년까지 22년 간 발행하셨어요. 저희도 <시각>지를 읽으며 활동 속에서 나름의 방향을 잡아갔는데요. 꾸준히 기록하시는 이유나 방향이 궁금해요.


<시각>에 담았던 내용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른데요. 초기에는 인천이라는 지역에서 미술 영역의 논의 구조가 폐쇄적이었어요. 지면을 통해서라도 투명한 담론의 장을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요. 엄청나게 보수적인 지역 미술을 비판하면서 비평과 대안을 같이 모색해 본 것 같아요. 그렇게 오랜 기간 발행해왔지만, 당사자들은 변하지 않고 결국은 저 자신을 검증하고 정리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 같아요. 사실 많은 분이 <시각>을 본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어요. 실제로도 그렇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고요. 몇몇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다고 하면 저는 그저 고맙죠. 어쨌든 이렇게 기록해 놓으니까 한 시대에 대한 정리가 되어요. 제가 22년 간 해왔지만 저 자신도 당시를 제대로 기억 못 하잖아요.




인천·도시·문화 비평지 격월간 ‘시각’



스페이스 빔에서 발간된 책들과 빔냥이 ‘낙낙’


비평은 만만하지 않은 글쓰기이잖아요? 어떤 과정으로 글을 쓰세요?


비평글을 쓰려면 그야말로 문제의식이 있어야 하고 사실 확인이 필요하죠. 논리적 근거도 있어야 하고, 나중에 공개되었을 때 나올 다양한 질문이나 지적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요. 평소에 쓰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된 글감이랄까, 자료와 주요어들을 모아두고 있어요. 파일 안에 넣어놓죠. 얼추 준비되면 쓰면서 연결하고, 그래도 부족한 내용은 더 찾아서 보충해요. 그런데 저는 글을 너무 힘들게 쓰는 스타일이에요. 쓰기 시작하면 진도가 나가기는 하는데, 시작하기 전에는 며칠 전부터 끙끙거려요. 그래서 즐겁게 글 쓰는 것을 분들이 너무 부럽죠. 한편으로는 글 대신 늘 휴대폰을 지니고 다니면서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개인의 기록이자 마을의 기록으로요. 도로부지 안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여도 하면서 이 과정도 중요하게 계속 기록하고 있어요.



다시 일상으로


계속 발신하고 발산하는 작업을 하다 보면 텅 비는 느낌이 들고는 하는데요. 일상적으로 자신을 채우기 위해 챙기시는 것들이 있을까요?


재충전하는 시간 말이지요? 제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일상과 작업이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주말에도 '스페이스 빔'에 나와서 놀멍일멍(?) 해요. 빔에 나와야 세상과 소통하는 기분이 들어서요. 많은 책을 접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책을 통해 적지 않은 자극을 받죠. 개인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책은 철학자 이진경의 <노마디즘>이라는 책이에요.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해석한 책인데, 여기에서 짚어주는 개념이 저의 사고와 행동에 유연함을 줬어요. 이 외에도 SNS를 통해 누군가 소개한 좋은 기사나 글을 보면서 배우기도 하고, 좋은 분들 만나면 그것도 공부가 되고요. 집에서는 뉴스, 역사나 환경, 여행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잘 봐요. 그리고 편식이기는 한데, 제가 축구광이라 시즌 때면 새벽에도 일어나 경기를 보는 것이 낙이기도 해요.



활동하면서 드는 자기 한계나 요즘의 고민이 궁금해요.


만약 상상력이 고갈 되고 기획에 대해 다른 고민을 못 하게 되면 그땐 끝이겠죠. 그렇게 안 되려고 나름의 긴장을 유지하고 어떤 또 다른 역할을 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제 상태를 스스로 잘 판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고요. 그래서 제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비우려 하고 있어요. 아, 그리고 이건 즐거운 고민인데요. 요즘 '스페이스 빔'이 마을교육공동체, 학교와 자주 연결되면서 아이들이 이곳을 찾는 빈도가 늘고 있어요. 이 흐름에 맞춰 ‘빔도 변화해야겠다’ 싶어서 내부에 어떻게 변화를 줄지 고민하고 있어요. 조금 더 친환경적으로 바꾸고, 아이들이 안전하고 쾌적하게 활동하고, 나아가서는 부담 없이 눈치 보지 않고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되면 좋겠다’ 싶고요. 아이들의 작은 아지트를 만들어서 일정 기간 자신이 운영자가 될 수 있게 분양을 할까, 이런저런 상상도 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저는 제도적인 것에 구속 받거나 끌려가고 싶지 않아요. 자유로운 한 개인이고 싶어요.”



선생님의 작업 책상에서



04‘ 채집프로젝트 도록 마지막 페이지



민운기 선생님은 댑싸리를 좋아한다. 어느 날 배다리 생태공원에 자리를 잡고 움튼 이 작은 아이가 ‘깨끗한 관리’라는 명분 아래 밀어졌을 때 분노로 파르르 떨었고, 그런데도 이듬해 다시 피어났을 때 얼마나 대견하고 기뻤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의 투쟁 -공공부지의 주인이 누구인가 묻고, 자본 권력에 진저리치는 모습- 속에서 댑싸리를 지키기 위한 마음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위계와 구분이 다양한 삶을 부지기수로 밀어내는 것을 겪어온 그는 스스로도 기획자나 예술가, 작가나 대표라는 어느 한 기준으로 불리기를 꺼린다. 경험이 경력으로, 기억이 관성으로, 호명이 권력으로 작동하는 것을 알기에, 시도한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가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사유의 주름을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그의 손발이 닿는 곳곳에는 책이 수두룩하고 삶의 면면이 기획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스페이스 빔'에 오는 이들은 어떤 작업을 하던, 어떤 생을 살던, 이제는 개인으로,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불린다. 누구 선생님, 누구 님으로. 우리의 대화 역시 같은 선상에 있었다. 민운기 선생님은 어느 질문에도 명확하게 주장하거나 선뜻 대답해주지 않았다. 글자로 새겨지는 순간, 그간 쌓아온 두터운 질문이 납작해지고 하나의 기준으로 제시될까 염려하는 것처럼. 그가 시간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떠낸 이야기가 부디 한 개인의 고백으로 읽히면 좋겠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댑싸리처럼.



김세영 /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목2동에서 나고 자란 지 한참인데, 이렇게 잘 누비고 제대로 발 딛기는 오 년 정도 되었네요. 제 꼴대로, 제 멋대로 살아도 되는 문화를 그리며 동네에서 이런저런 기획을 하고 있어요.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골칫거리를 만들겠다며 끙끙거리는 모습이 그렇게 웃기고 또 소중합니다. 사진은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멤버들이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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