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시간을 들였을 때 보이는 것들

경기도미술관 2018-2022 신소장품전《빈지 워칭; 14284″》


빈지워칭룸



글, 사진 | 김지연 미술비평가


관능적인 꽃 그림으로 잘 알려진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꽃은 너무나 작고 누구도 자세히 꽃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너무 바빠 작은 것에 시선을 머무르게 할 여유가 없는 뉴요커들이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꽃을 바라보길 바라며 그림을 그렸다. 오키프가 발견한 꽃의 개성적인 아름다움은 그의 그림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람도 오래 보아야 진가를 알 수 있고, 오랫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깊은 속마음을 알 수 있듯이 어떤 대상을 제대로 알고 느끼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라는 시구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미술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방문한 우리는 작품 앞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머물까? 놀랍게도 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이 한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0.2초, 평균적으로도 15초에 그친다고 한다. 대부분의 관람객이 작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는다. 회화나 사진 작품처럼 하나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그렇다 쳐도, 러닝타임 자체가 최소한 수 분에서 수십 분에 이르는 영상작품의 경우 거의 보지 않고 지나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TV 앞에서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바꿀 때에도 15초로는 가벼운 예능 프로그램조차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데, 과연 다양한 의미를 지닌 미술 작품을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런 와중에 대부분의 관객은 여전히 현대미술이 어렵고 낯설다고 한다.



이우성_세상은 내가 꿈꾸지 않게 한다_2014


드라마를 보듯‘몰아 보기’

경기도미술관은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열리는 전시 《빈지 워칭; 14284″》에서 관람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한다. ‘빈지 워칭(binge-watching)’은 '폭식하다'라는 뜻의 ‘binge’와 ‘보다’의 ‘watching’이 결합된 신조어로, 우리말로는 ‘몰아 보기’를 의미한다. ‘몰아 보기’는 사실 전시보다는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OTT플랫폼에서 드라마를 몰아 볼 때 쓰는 단어다. 드라마의 에피소드가 공개될 때마다 하나씩 보는 것이 아니라, 시즌이 완결된 후 한꺼번에 몰아 보면 몰입하기도 쉽고 해당 콘텐츠의 줄거리나 의미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진다.


《빈지 워칭; 14284″》전은 이 ‘몰아 보기’에서 착안해 관람객에게 전시장에 조금 더 천천히 머무르며 몰입해볼 것을 제안한다. 전시 제목에 쓰인 숫자 ‘14284″’는 14,284초, 즉 약 4시간의 ‘시간’을 의미한다. 영상이나 VR작품의 러닝타임을 더하고 회화나 조각 작품 등에 머무르는 시간을 최소 40초 정도로 계산했다. 그렇게 모든 작품들을 온전히 감상하는, 즉 몰아 보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이 바로 14,284초다. 주말에 넷플릭스 드라마 4시간을 몰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전시장이 한 시즌의 드라마고, 작품들은 각각의 에피소드다. 각 에피소드마다 조금씩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는 옴니버스식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함양아_잠_2015-2016


물론 현대미술이라는 언어는 대중에게 여전히 낯설 수 있다. 그래서 미술관은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했다. 전시장 입구와 리플렛에는 ‘전시 관람 유형 테스트’를 통해서 ‘취향껏 골라보기’, ‘띄엄띄엄 보기’, ‘한 번에 보기’ 등 전시를 즐기는 방법을 제안한다. 전시장 내 텍스트와 리플렛을 통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매우 충실히 제공하며, 개인 스마트폰으로 이용할 수 있는 오디오 도슨트도 제공한다. 전시장의 가벽은 일반적인 흰색 벽이 아니라 정글짐 같은 모양의 목재로 구성되어, 가벽 너머로 다른 작품들이 보이도록 제작되었다. 경기도미술관이, 그리고 이번 전시가 지향하는 소통하고 연결되는 공간을 상징한다. 게다가 이 전시의 온라인 뷰잉룸은 주목할만하다. 현재 국공립미술관들은 방역 문제로 관람객 수를 제한하는 편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공공장소에 나서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관람객들도 있다. 그래서 미술관들은 자체 웹사이트에 온라인 뷰잉룸을 마련하거나, 큐레이터와 함께 전시를 둘러보는 영상을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하는 등 비대면으로도 전시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커머너즈’라는 디지털 디자인 스튜디오가 작업한 이번 전시의 온라인 뷰잉룸은, 직관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물론 대부분의 영상작품들까지 온라인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한 배려가 돋보인다. 또한 사이트 내에 14,284개의 파티클로 단어를 형상화하는 '커머너즈'의 디지털 아트 워크 작업 <14284>가 삽입되어, 이 온라인 공간과 접속하는 행위마저 전시의 일부로 만든다. 전시장에도 온라인 뷰잉룸을 관람할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최대 4시간까지 이용할 수 있다. 그야말로 ‘몰아 보기’라는 전시 제목에 딱 맞는 공간이다.


경기도미술관의 시선 한편 《빈지 워칭; 14284″》전은 2018년에서 2020년 사이 경기도미술관이 수집한 신소장품을 공개하는 자리다. 3년간 수집한 소장품 중 한 번도 전시되지 않았던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되도록 동시대성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이번 전시를 구성했다. 미술관이 구입하는 소장품은 해당 미술관의 특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동시대성을 가진 좋은 작품을 수집하는 것이 최우선이지만, 그중에서도 그동안 미술관이 내세웠던 의제에 가까운 작품, 이 미술관이 소장했을 때 의미가 배가되는 작품들을 구입한다. 그러니 신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는 그동안 이 미술관이 어떤 방식으로 의제를 설정해왔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보고회이기도 하다.



배종헌_기후의원천_콜로세움_2010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그간 경기도미술관의 행보를 보여준다. 외할머니가 남긴 노트의 기록으로부터 한국 근현대사를 톺아보는 금혜원 작가의 <가족사진>, 1950년대 후반 여성국극의 시대를 소환하는 정은영 작가의 <가사들>은 우리의 가까운 과거를 되새기게 하며,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성지순례’하는 형식을 빌려 한국 현대사회의 상징적 장소들을 보여주는 김희천 작가의 <홈>,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수집하듯 진열하여 이상기후의 원인을 드러내는 배종헌 작가의 <기후의 원천_콜로세움>과 같은 작품들은 현재의 우리를 다른 방향에서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또한 6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염주를 돌리며 기도해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신과 종교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진기종 작가의 <염주와 기도>, 삶과 죽음이라는 유한한 시간 속에 갇힌 인간의 신체를 반복되는 이미지의 영상으로 표현한 장서영 작가의 <서클>은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세상의 틈을 발견하고 인지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한편, 안산 대부도의 갯벌에 한 평짜리 판잣집을 설치해 두 달간의 생활을 기록한 송성진 작가의 <1평조차>, 세월호 참사 이후 더는 바다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 상황을 그리고 있는 이우성 작가의 <세상은 내가 꿈꾸지 않게 한다>와 재난 상황 속에서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함양아 작가의 <잠>은 경기도미술관이 위치한 안산이라는 지역에서 더욱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작품들이다.



장서영_서클_2017

몰입의 경험

각각의 작품이 보여주는 세계는 너무나도 넓고 깊어서 전시가 제안한 40초도 매우 부족한 시간이다. 오키프는 ‘당신 손에 꽃 한 송이를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순간만큼은 그 꽃이 당신의 우주’라고 했다. 우리가 하나의 작품 앞에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바라볼 때마다 그 작품 안에 담긴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그리고 나의 세계와 그 세계가 잠시 조우했다가 다시 멀어진다. 이 작가와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면 인지하지 못했을 또 다른 세계이자, 작품 앞을 떠나면 곧 닫힐 시한부의 세계다. 살짝 열린 그곳을 더 엿보고 싶어 작품 앞에 조금 더 머물러 본다. 같은 것을 보아도 본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던 세계에 따라 다른 의미가 생성된다. 두 세계의 조우로 마침내 의미가 생성되었을 때, 우리가 작품 앞을 물리적으로 떠난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향해 열린 문은 닫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고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연결되고 연대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편씩 끊어 보는 드라마가 점선이라면 한꺼번에 몰아 보는 드라마 한 시즌은 짙고 굵은 하나의 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개의 에피소드를, 그러니까 각각의 작가들이 펼쳐낸 19개의 세계를 몰아 본 뒤 전시장을 나서자 나의 세계는 19개의 다른 의미가 겹겹이 더해지며 한층 깊고 넓어졌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 짙고 굵은 선을 따라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각각의 세계에 차례로 몰입하며 이 전시를 통과하고 난 뒤 무언가 달라져 있을 테다. 그렇게 변화할 당신의 세계가, 그리고 어딘가에서 의미로 연결될 우리의 미래가 궁금하다.



경기도미술관 2018-2022 신소장품전《빈지 워칭; 14284″》 경기문화재단 유튜브 채널 <전시인사이드>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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