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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걸음으로(3)

2022-10-13 ~ 2023-03-26 / -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리뷰 -


늑대 걸음으로 (3) :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소설가 신종원 


백남준,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된 교육」, 1968


50년 전에 미리 예고된 미래 사회의 몇몇 장면들. 남준은 1968년에 작성한 보고서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된 교육」에서 이미 데이터의 매체 이동 역사를 예감하고 있다. 데이터는 더 이상 종이로 운반되지 않으며, 프린터의 인쇄 목록에 얹히기도 전에 저절로 생성되고, 복사되고, 캡쳐된다. 물리적인 제한을 벗어난 데이터는 극도로 가볍고 빨라져, 심지어는 미국이나 중국 같은 거대 감시 국가마저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촉발되는 성마르고 위험한 논의들을 완전히 근절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 헤게모니를 독점하려는 이념 조직이나 지도자들은 이제 북한처럼 물리적 네트워크(집선기, 증폭기, 라우터 또는 브릿지 등의 전자 통신 기기)를 통제하지 않는 한 매일같이 새로운 정치적 위협으로부터 도전받게 될 것이다. 전기 통신 사회의 데이터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따위의 미시 생물체들과 무척이나 비슷한 성질을 띠는데, 데이터를 수송하는 전류 자체가 이미 수많은 낟알의 입자kernel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이터의 속성을 결정하는 것은 데이터 그 자체가 아니라 데이터를 이용하는 수단인 셈이다. 종이 위에 머물렀던 시기에는 종이를, 비석이나 석토판 위에 새겨지던 시기에는 천연 자원을, 구술로만 옮겨지던 시기에는 목소리를 흉내 냈을 따름이다.
늑대는 남준을 어떤 통로 안으로 이끌고 간다. 이 통로가 난연성의 피복을 입힌 광섬유 케이블인지, IEEE 802.11 무선랜 규격으로 개설된 가상의 패킷 교환 시설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1024비트 단위로 꾸려진 데이터 묶음들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바다처럼, 우주처럼. 속도가 워낙 빠른 나머지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일은 무의미할뿐더러 불가능하다. 일정한 경로를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셔서, 늑대와 남준은 콧잔등에 앉은 주름을 차마 풀지 못한다. 남준은 늑대에게 종말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종말이라기보다 오히려 은총에 가깝지 않은가? 데이터를 실어나르는 속도는 물론이고 이들을 저장할 공간마저도 충분하다면 남은 것은 말 그대로 폭발뿐이다. 남준이 예측했고 또 기대했던 사회의 조건에 부합하는 기술들이 마침내 마련된 것이다.
이때 늑대가 갑자기 앞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남준도 뒤따라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둘은 차갑고 단단한 바닥으로 끌려가는 대신 공중으로 가볍게 떠오른다. 남준은 플라즈마로 염색된 발광성 실오라기처럼 통로 안을 이동하는 수많은 빛줄기들 가운데 합류하여 짧은 시간 함께 흐른다. 마침내 다다르게 되는 장소는 어둡고 광막한 구球의 내부이다. 남준은 서로 다른 통로에서 쏟아져 들어온 빛줄기들이 내벽을 따라 회전하며 드러내는 곡면들을 머릿속에서 이어 붙여 공간의 형태를 유추해 본다. 국제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데이터는 모이면 모일수록 부드럽고 완만한 축구공 모양의 덩어리로 집적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행성들처럼. 아니, 이미 우주 그 자체도 처음에는 3센티미터 크기의 공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늑대와 남준은 이른바 데이터스피어Datasphere 안에 들어와 있다. 빛과 열기, 울림만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사이버네틱스 집합체 속에. 남준은 측두골 부분에서 따끔따끔한 자극을 느끼는데, 바깥귀 안쪽에 숨겨진 속귀신경이 가장 먼저 전산 신호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준의 감각 수용기들은 하나하나 금속 회로로 전환되어 컴퓨터 언어들을 해독하기 시작한다. 누골이 불시에 달아오르더니 안구가 끓는 듯한 통증이 찾아온다. 남준은 과열된 눈물로 화상을 입은 나머지 앞을 볼 수 없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력을 포기하는 대가로 또 다른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장엄한 동력이 전류의 형태로 이동하고 전달되며, 불과 수 초 만에 천 개의 지식과 만 개의 미덕을 창조하고 다시 무너뜨리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제야 남준은 늑대를 제대로 알아보게 되는데, 짐승의 두 눈은 과충전된 트랜지스터처럼 시시각각 전기 에너지를 방출하며, 온몸의 털은 푸른 벼락으로 이루어져 있어 서로 닿을 때마다 사나운 스파크가 튀어오른다. 남준은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질끈 눈을 감는다. 그러자 처음으로 늑대의 목소리가 남준에게 다가와 들린다. 늑대는 말한다.
미안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미래에 살고 있습니다.

인스턴트 글로벌 대학
2022년 1월 13일, 동영상 공유 플랫폼 데일리모션에 업로드된 240초 길이의 비디오 하나. 터키 국영 통신사인 아나돌루 에이전시에서 입수한 일명 Y-26632552 파일은 방송국 편집실에서 자막뉴스로 제작되는데, 뒤따르는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다; 아프가니스탄 후스트에서 100명이 넘는 탈리브 전사들이 군사 교육 과정을 이수하다. 카메라는 조직의 주요 인사들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의 국민들이 참관 중인 가운데 분열식을 치르고 있는 군인들을 보여준다. 이어서 격투 시범, 모의 전투, 전술 사격에 차례대로 참여하는 이 남성들은 조준경이 달린 총기를 사용할 뿐 아니라 첨단 군장까지 착용하고 있다. 9․11 테러로 격분한 미국이 알 카에다와 관련 단체들에 전쟁을 선포했던 2001년, 이 무장 단체의 전투원들 대다수는 1947년 소련에서 개발된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을 사용했다. 방탄모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군복조차 구하지 못해 이슬람식 전통복장 깐두라를 그대로 입고 터번이나 케피야를 머리에 두른 채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2021년 아프가니스탄 공세에서 탈레반은 세계가 기대하는 반정부 테러리스트의 기준을 뒤집어버린다. NATO의 외교 안보 연구원들은 아프간 일대에서 활동하는 무자헤딘들이 전략과 무장 면에서 급격하게 현대화될 수 있었던 근거 가운데 하나로 초고속 정보 통신망의 확대를 지적한다. 점조직 형태로 흩어져 있는 게릴라 조직의 특성상 제식 훈련을 편성하기가 무척 까다로웠는데, 중국과 파키스탄계 통신 기업들이 듀랜드 라인에 인터넷을 보급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베테랑 교관들이 간단한 총기 조작부터 실전 체험까지 일련의 전술 과목을 직접 녹화하여 업로드한 뒤에는, 단순히 비디오를 시청하는 행위만으로도 기초 전투 교육을 이수하는 셈이다. 탈레반은 2007년경부터 원격 훈련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몇몇 영상들은 초창기에 개설된 좀비 SNS 계정들의 메신저와 보관함 내부를 아직까지 은밀하게 떠돌아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지저분한 푸티지 수준이었던 영상 제작 기술은 탈레반 수뇌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눈에 띄게 발전해서, 2021년 11월 카불 점령을 공표하는 선전 영상에서는 숙련된 전문 편집자를 거느리기에 이른다. 지금 이 시간에도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는 무장 반군의 테러리스트 요원들을 길러내는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전자적 학문 커뮤니티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3일 안에 수도를 점령하겠다던 러시아 연방군의 공세가 북부 전선에서 돈좌되면서, 전쟁의 양상이 지지부진한 국면으로 접어든다. 양측 군인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전황을 생중계한다. 우크라이나 국군은 국제의용군의 참전을 독려하고, 세계 곳곳에서 군용품과 구호물자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러시아 연방군은 자국민을 상대로 전쟁의 명분을 납득시키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세 개 전선에서 격돌 중인 두 국가의 군인들이 유튜브와 트위치 같은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동시간대에 방송을 진행하는 모습이 종종 목격된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다국적 시청자들은 호스트의 방탄모나 방탄복에 거치된 액션캠의 눈을 빌려 전쟁에 참여한다. 이들 대부분은 1인칭 슈팅 게임의 POV 시점에 이미 익숙해서, 실시간 방송을 녹화 중인 익명의 군인을 게임 캐릭터처럼 인식한다. 누구나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 내지는 군인들에 대한 호의와 연대를 표현하려는 목적으로 찾아오지만, 종전 시기가 지체되면서 전쟁의 공포와 긴장감은 점차 자취를 감춘다. 이제 다국적 시청자들은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인기리에 중계되는 일렉트로닉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듯 몰입한다. 한편 위키미디어는 시시각각 전황 지도를 업데이트하고 있는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주제로 개설된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양측 군대의 전술을 예측하고 평가하며 종일 논쟁을 벌인다. 이렇게 적지 않은 수의 인터넷 이용자들이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일시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쟁에 관한 여러 가지 입장을 교환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흡사 풀무치와 같아서, 언제든지 보다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찾아 무리 지어 자리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슬라이드 또는 비디오테이프의 새로운 용도
오늘날 통신사들은 최저가 요금제라도 지불할 수만 있다면 갓난아이에게조차 약관 동의를 받아낼 것이다. 무게 160그램에 두께 7밀리미터로 한손에 가볍게 쥐여지는 이 전자 제품은 무선 인터넷 연결을 제공하는 통신 기기이면서, 최대 256기가바이트의 용량을 자랑하는 고성능 촬영 장치이기도 하다. 디지털 문명 사회의 시민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광학 장치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손에서 놓지 않는다. 카트만두의 수도승들과 더블린의 예수회 사제들조차도 자기 명의로 가입된 스마트폰으로 상담 신청을 받는다. 그러나 통신과 촬영, 두 기능을 한꺼번에 제공하는 기계가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섬뜩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이것은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이미지를 아주 빠른 속도로 전파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22년 1월에는 서벵골에서, 5월에는 텍사스에서, 10월에는 자바, 그리고 서울에서 무책임하게 촬영된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 공간으로 방류되며 무고한 시민들이 집단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되다. 누군가 아무런 제약 없이 사건을 보도할 수 있다면, 언론윤리헌장을 준수하는 기자들은 이제 누구를 위해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가?


신종원은 단편소설 「전자 시대의 아리아」로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영상, 음악, 텍스트 작업을 주로 다루며, 종이책의 안과 밖에서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와 발화를 탐구하고 있다. 최근 장편소설 『습지 장례법』(문학과지성사, 2022)을 펴냈다.

세부정보

  •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기간/ 2022.10.13~2023.3.26

    장소/ 백남준아트센터 제1전시실

    관람 / 오전10시~오후6시/매주 월, 설날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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