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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걸음으로(4)

-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리뷰 -

늑대 걸음으로 (4) :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글 소설가 신종원

 
Photo © Gianni Melotti


흰색 도포 차림에 검은 갓을 쓴 남준이 좌중들 앞으로 걸어 나온다. 행사장 한가운데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가 소리 없이 쓰러져 있다. 악기의 내부에 놓여야 할 물건들―그러니까 해머나 지주막대, 핀블록 같은 부품들은 모조리 탈구되어, 오직 고상하고 반듯한 껍데기만이 온전히 남아 있다. 악기의 상판 양쪽에는 펠트 모자를 하나씩 올려두었는데, 이 중절모들은 하나같이 지붕이 뚫려 있다. 전지용 가위를 집어든 남준이 가까운 나무로 다가가더니 가지를 잘라낸다. 남준은 떨어진 가지들을 모아 모자 안에 넣고 세운다. 마당을 가로지르며 몇 번 더 똑같은 동작이 반복된다. 이 나뭇가지들은 수목과 분리되어 죽어가고 있지만, 꼭대기 부분을 오려낸 중절모의 외양 때문에 거꾸로 모자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처럼 오인되기 쉽다. 남준은 정성들여 장식한 모자 위에 자기 갓을 덧씌우고는 서슴없이 불을 붙여버린다. 동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악사 김석출 일행의 무악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고 점점 더 커진다. 한때 악기의 관절을 구성했던 단풍나무나 박달나무 계열의 밝은 목재들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남준은 흙을 채워 넣을 것이다. 마치 이 상자형 악기 혹은 음악 상자가 어느 망자의 무덤 내지는 관이라도 되는 양. 이렇게 종로구 사간동 일대의 부식토들은 남준의 삽에 의해 수 차례 옮겨지며 매장용 흙으로 전환된다. 1990년 7월 20일. 남준은 이렇게 59번째 생일에 오랜 친구와의 약속을 지킨다.

남준은 보이스를 추모하기 위해 종로 중심가에서 벌였던 굿판에 〈늑대 걸음으로〉라는 이름을 붙인다. 작가인 남준 본인이 글이나 말로 부연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 퍼포먼스가 '늑대 걸음'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는 아직까지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다. 남준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우리는 오직 모호한 가정만을 논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예컨대, 남준은 보이스의 생전 작업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은 나를 좋아한다I Like America and America Likes Me〉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1974년에 보이스는 뉴욕의 르네 블록 갤러리로 이동하여 사흘 동안 살아 있는 코요테와 함께 생활했는데, 펠트 직물을 뒤집어쓴 채 지팡이를 내밀거나 휘두르며 야생 동물과 교감을 나누는 중년 독일인의 모습은 반전주의, 환경 운동과 같은 시대정신과 맞물려 크게 조명받는다. 보이스에 따르면, 늑대보다는 작고 여우보다는 큰 이 갯과의 포식자야말로 미국이 되찾아야 할 정신의 표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남준이 보기에, 늑대를 흉내 내어 걷는 행위야말로 원시적인 상상력에 다가가는 무용舞踊의 첫 동작은 아니었을까? 보이스가 인간을 경계하는 코요테를 안심시키기 위해 가장 공들였던 몸짓은 걷기였다. 코요테처럼 걷기. 그런 뒤에야 펠트를 내려놓고 코요테와 함께 창밖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늑대처럼 걷지 않고는 남준과 만날 수 없었다.

미래를 떠올리면 낙관뿐이었어요. 어렸을 때는요.

늑대가 이야기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게 다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따금 불행을 겪고, 이따금 비극이 일어나도 결국은 옳은 길로 가고 있다고. 어른들이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늑대가 빛줄기들을 쫓아 주둥이를 치켜 올린다.

입천장에 혀를 붙이고 있지 않으면 목구멍 밖으로 무언가 터져나올 것 같은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죽음이 중지되기를 바라요. 죽음에 관해 쓰고 싶지 않습니다. 미래로 다가갈수록 희망이 아니라 파멸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해 나는 무시로 괴로울 따름입니다.

남준은 늑대와 자신을 연결하고 있는 디지털 올가미, 한 올의 통신 프로토콜을 내려다본다. 미약한 전류가 흐르는 이 플라즈마 끈은 데이터스피어 공간 안에 가득찬 어둠과 시시각각 충돌하며 백색의 빛들을 산란시키고 있다. 이곳에 조성된 빛들은 태양과 달을 비롯한 천체들의 일주운동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 말은 전산망에 공급되는 전력의 양과 흐름이 불안정해지는 경우, 어느 때나 연결이 끊어지기 쉽다는 말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런 단절은 서서히,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지 않고 순식간에 일어난다. 지아니 멜로티의 사진 속에서 걸어나온 남준의 시점으로, 늑대와 남준 사이에는 자그마치 50년의 시차가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미래가 전기를 동력 삼아 통신하는 한, 늑대와 남준 사이의 연결도 순식간에 끊어진다. (사실 미래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다.) 그래서 늑대가 통신 장애의 징후를 읽어내기도 전에, 둘은 서로에게서 사라진다. 회선 불량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어서 금방 복구되지만, 이제 늑대 앞에는 한때 남준이 바로 여기 있었음을 드러내는 전기적 자취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전자 디스플레이의 영역 변색 현상처럼. 열적 죽음을 맞은 남준의 형체는 붕괴되어 단순한 도형들로 나누어졌는데, 머리(△)와 몸통(○), 팔다리(□)가 그것이다. 이 흔적은 어느 20세기 예술가의 육신을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처럼 데이터스피어 내부를 떠돌아다니다가―마침내 머리 위로 날아가 행방불명되고 만다. 물론 늑대는 필요하다면 다시 한 번 돌아가 남준을 깨울 수 있다. 굳이 지아니 멜로티의 사진이 아니더라도, 인터넷에는 남준과 관련된 이미지 파일들이 수없이 공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남준은 같은 부분에서 늑대와 단절될 것이다. 그러니까 늑대는 사실 처음으로 남준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사실 늑대는 이미 수백 번째 남준을 찾아왔으며, 이제 겨우 멜로티의 사진을 떠나고 있을 따름이다.

어쩌면 남준 본인이 일부러 통신 장애를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붓다나 공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처럼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나 애매모호한 아포리아 속에 지혜를 감추기를 즐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준은 록펠러재단의 자문역으로 활동하는 동안 기업들이 예술가를 후원해야만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다음과 같이 의견을 밝힌 바 있다. “1. 최근 역사에서 흔히 예술가의 직감은 다가오는 사회적 변화를 알리는 초기 경보 시스템으로 (때로는 컴퓨터보다 더 잘) 작동했다.” (「후기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 1974) 남준에 따르면, 예술가들은 신선이나 도사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잠수함 속의 토끼, 탄광 속의 카나리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이다. 우리 예술가들은 죽음 혹은 죽음에 가까운 몸부림으로 위기를 경고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우리 안에, 새장 안에 구속당한 채 잠자코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음악과 무용 등 전통 예술부터 텔레비전, 컴퓨터에 이르는 최첨단 사물들까지―다루지 못하는 매체가 없었던 미디어 아티스트가 결국 타자기 앞으로 다가와 앉아 있는 모습은 어떤 사실을 말해주는가? 누군가 내 귀에 대고 藝術(예술)은 document가 아니라 creation입니다, 속삭이고 있다. 이 속삭임은 과거의 어느 시간대에 발화되어 오랫동안 전리층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이 시간대로 내리쬐고 있는 것 같다. 시대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제안할 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에 살게 될 것이다. 그때가 오면, 또 다시 늑대들이 달려와 해와 달을 집어삼키고, 세상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겠지만, 새로운 시대의 성자들이 괴물의 가슴을 찌르러 나타날 것이다. 북해의 어느 신화처럼. 바그너의 교향곡과 오페라처럼. 에너지는 이동하며, 생명은 벡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준의 무덤을 파헤치는 한 마리의 늑대가 있다. 살해당한 인간의 두개골을 갉아먹는 어니스트 시튼의 동물화 속 굶주린 야생동물이 아니라, 내륙과 공해 깊숙이 보이지 않게 매설된 지중전선로 또는 해저 광케이블을 따라 끊임없이 질주하는 디지털 늑대. 이제 그 늑대는 인터넷 표준시의 자오선을 넘어가고 있다. 타자기 앞을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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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원은 단편소설 「전자 시대의 아리아」로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영상, 음악, 텍스트 작업을 주로 다루며, 종이책의 안과 밖에서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와 발화를 탐구하고 있다. 최근 장편소설 『습지 장례법』(문학과지성사, 2022)을 펴냈다.

세부정보

  •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기간 / 2022.10.13~2023.3.26

    장소/ 백남준아트센터 제1전시실

    관람 / 오전10시~오후6시/매주 월, 설날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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