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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소사벌의 소사원마을과 대동법 시행비

경기도 문화자산 

8. 소사벌의 소사원마을과 대동법 시행비 

       글과 사진  김준기 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

소사벌은 평택시와 안성시와 천안시의 경계에 펼쳐져 있는 드넓은 벌판입니다. 조선시대의 고지도를 보면 소사평(素沙坪)이라는 지명이 빠지지 않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이 벌판이 국가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곡창지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이 벌판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안성천이 흐르고 있는데, 경기만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어서 원래는 조수가 밀려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갯벌과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였는데, 조선시대부터 이루어진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지금과 같은 농경지로 변모했다고 합니다.

이 소사벌에는 소사원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지역이었는데, 1914년 양성현이 안성군에 병합될 때 안성으로 넘어왔다가 1983년 평택군에 편입된 마을입니다. 현재는 평택시 비전2동에 속해 있지요. 이렇듯 ‘원(院)’ 자로 끝나는 마을은 예전 관에서 운영하던 숙식시설이 있던 곳입니다. 특히 소사원마을은 경기도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이어지는 삼남대로가 통과하던 교통의 요지였지요. 그래서인지 이 마을에는 여행자의 수호신인 미륵불이 있어서 행인들이 쉬어가며 여행의 무사기원을 빌기도 했었습니다.

   소사동의 돌미륵 

소사원마을은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름 그대로 대동법의 시범적 시행과 그 성공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지요. 평택시를 가로지르는 서동대로에서 소사2길을 따라 소사동에 접어들면 소사원마을 북쪽 고갯마루에 우뚝 솟아 있는 비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각 안에 있는 기념비는 높이 3m, 너비 85㎝, 두께 24㎝의 비신을 거북 모양의 귀부가 떠받들고 있고, 비신 위에는 두 마리 용이 서로 얽혀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모습이 새겨진 이수를 얹은 형태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비석의 형태이지요. 이 비석은 원래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50m 떨어진 언덕에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위치인 평택시 소사동 140-1번지로 옮겨진 것은 1970년대 초라고 하며, 1973년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에는 기념비뿐만 아니라 벼슬아치의 공적을 기리는 선정비 4기도 있어 이 지역이 오랜 기간 행인들의 왕래가 활발했던 곳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아무래도 선정비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에 세우기 마련이니까요.


          소사동 소사원마을의 대동법시행기념비 

대동법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각종 세금을 쌀과 포목으로 내도록 통일한 조선시대의 조세 정책 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까지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기본 정책은 조용조 제도였습니다. 땅에 붙는 세금이 조(租), 군역(軍役)과 요역(徭役, 노동)에 해당하는 세금이 용(庸), 지역의 토산물을 세금으로 내는 것이 조(調)였지요. 그런데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 군역과 요역, 조(調)에서 비리가 발생하여 조용조 제도의 문제점이 심각해집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떠돌이가 되어 난민화된 백성들이 많아서 군역과 요역을 지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으므로 이에 해당하는 세금이 제대로 징수될 리가 없었습니다. 또한 조(調)의 경우도 지역에 따라 조세의 부담이 균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물로 바치던 특산물의 생산 시기와 납부 시기가 맞지 않는 등 폐단이 많았지요.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지방의 특산물 대신 쌀이나 무명을 토지의 결수(結數)에 따라 일정하게 납부하도록 하자는 대동법과 관한 조세 개혁의 논의는 선조 대에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지주로 이루어진 기존 기득권층의 반발이 심했고, 조선의 열악한 통신, 운송체계의 한계로 말미암아 쉽게 정착되지 못했지요. 대동법이 광해군(1608년)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지만 지배층의 반발로 다른 지역에서는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효종 시기 실학자 김육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 공납의 불균형과 부역의 불공평을 없애기 위하여 호서지방에서 대동법을 시범적으로 실시하였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물론 이때도 반대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지만 김육은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상소를 거듭하였고, 이후 대동법은 호남 지역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동법 시행을 제대로 알리겠다는 취지로 효종 10년(1659)에 기념비를 경기도와 충청도에 걸쳐 있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소사벌에 세우게 된 것이지요. 이 기념비의 원래 이름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忘碑)인데, 이와는 달리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라고도 불리는 것은 위와 같은 연유 때문입니다. 결국 대동법은 전국으로 확대 시행되었고 현종을 지나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전국적으로 정착되기에 이릅니다.

                                                                                                       소사벌에 펼쳐진 드넓은 논 

이렇듯 대동법은 시행부터 완전히 정착하기까지 거의 100년의 시간이 걸린 대대적인 조세 개혁이었습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농민들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고, 다양한 상품이 물물 거래되던 것을 쌀과 포목으로 일원화시켰기에 상품 유통과 화폐 중심의 경제 체제를 발전시키는 데도 기여를 하게 됩니다. 경제가 발전하자 백성들의 교역과 상거래가 늘어났고, 전국의 유명 장시들도 속속 들어서게 되지요.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바른 방향으로 나아갔던 대동법의 실시는 조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조세 개혁정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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